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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54화 (5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3. 사건 종결(3)

"..헨슨?"

에슈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 올 이유는 없었고 더군다나 낮에 그리 차갑게 퍼붓고도 이쪽으로 올 까닭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저 인간은 헨슨이 틀림 없었다.

"무슨 일이지."

에슈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헨슨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

침묵 속,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고요한 정적의 시간이 숨막히도록 느리게 흐른 후, 드디어 헨슨이 입을 열었다.

"당신입니까?"

"뭐가."

에슈튼의 얼굴이 더더욱 짜증에 물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흔들리는 눈동자가 스며나오는 그의 불안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얼마든지 말 해 드리겠습니다... 그 여자, 에나를 당신이 죽였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뭐?"

순식간에 에슈튼의 눈빛이 불안감에서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누굴 죽였다고?"

"범인으로 지목되어 잡혔다가 어제 탈출한 그 여자 말입니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에슈튼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헨슨은 그런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가 죽은 시간. 당신만 알리바이가 없더군요."

에슈튼의 입가에서 거짓말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지난 밤. 저희 대원들은 밤에 폭음을 들은 후, 탈출한 죄인을 찾기 위해 수색을 개시했습니다. 기사님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때 전 대원들을 구역별로 5명씩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도중에 빠져나간 인원은 없었다 하고, 돌아다니는 민간인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의 얼굴이 차차 딱딱하게 굳어갔지만 헨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즉, 이 근방에서 그녀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경비대에혼자 남아 있었던 당신 뿐이라는 겁니다. 더불어, 당신은 살해 동기 역시 확실하죠."

"그게, 무슨.."

"에나는 진범이 아니죠. 그녀가 혹시라도 다른 경비구역으로 탈출해 당신이 다짜고짜 잡아넣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입장이 참 곤란해졌을 텐데요."

은근한 뉘앙스의 말에 에슈튼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치미는 불안감을 애써 숨기려 했지만 손끝이 달달 떨려오는 것 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베카도 당신이 죽였을 테니 말입니다."

"....!"

비틀. 에슈튼은 어지럼증을 느낀 듯 이마를 감싸쥐었지만 곧 격하게 고개를 내젓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라고-헛소리 작작해!"

"아니라고 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이미 셀레니스 기사단원들은 당신이 범인이라 반쯤 확신하고 있으니 제가 가서 거짓 증언 한 마디만 해도 바로 들이닥쳐 당신을 체포하겠지요."

"...."

"저는 이미 그들에게 신뢰를 얻었으니까요."

에슈튼의 얼굴이 헤쓱해졌다. 잠시 그 상태로 있던 그는 침착을 되찾고 차분하게 말했다.

"원하는 게 뭐냐.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1천 골드."

헨슨은 에슈튼에게 검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1천 골드 정도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젠장!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에슈튼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는 아무 말도 않는 헨슨을 사납게 노려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아직 경비대 안은 내 편이 더 많아.. 네놈 따위, 감방에 처박아 주겠어. 그렐, 그렐!!"

그런 상관의 행태를 지켜보던 헨슨은 아무 대답이 없어 그가 당황하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 제가 오늘 저녁식사에 몰래 수면초를 넣었거든요. 경비대 안에 깨어있는 사람은 당신과 저 뿐입니다."

"뭐라고?"

뿌득. 에슈튼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헨슨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즉, 우리의 은밀한 거래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말입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에슈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슬 퍼런 눈으로 발칙한 부하를 노려보았다.

"..네가 안전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헨슨 파블."

한참 후에 입을 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꺼져 있는 벽난로에 나가갔다. 저 자식이 또 뭘 하려는 거야, 하는 심정으로 몸을 긴장시킨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헨슨은 그가 부지깽이를 집어들자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하, 멍청한 놈. 그래.. 레베카 그년! 완전히 스토커 취급하며 거들떠도 안 보기에 죽여 버렸다고. 애초에 니엔 같은 멍청이랑 만나는 골빈 여자였으니 아까울 것도 없지. 뭐, 에나란 여자는 몰라 나도. 어느 놈한테 뒈져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놈에게 감사해야 겠군."

에슈튼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 섬뜩한 모습에 헨슨은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에슈튼은 그가 물러선 만큼 휘청휘청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들고 있는 부지깽이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니엔을 이용해서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갔지. 하지만 그 멍청한 대장 녀석이 얼마 전 네놈과 비슷한 헛소리를 지껄이기에 그놈도 죽여버렸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자리를 비웠다고 한 건.."

그의 경멸에 가득 찬 얼굴을 보며 에슈튼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리고, 이제 와서 네깟 놈 하나 더 없어진다고 달라질 건 없지. 마침 다른 녀석들도 네가 다 재웠다지? 그러니까 왜 제 무덤을 파고 난리야."

"정말로 미쳤어?!"

헨슨은 악을 쓰며 뒤로 몇 걸음 더 물러섰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에슈튼은 그의 머리를 향해 부지깽이를 부웅, 크게 휘둘렀다. 부웅! 헨슨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들어 방어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문이 벌켝 열리며 방 안에 돌풍이 몰아쳤다.

"....!"

그리고, 카앙-!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거친 쇳소리가 헨슨의 귀를 때렸다. 헨슨은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하얀 제복을 입은 금발 소년의 작은 등을 보자마자 급격하게 안도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단호한 눈빛의, 여려보이는 소년. 아시엘이 금빛 레이피어로 에슈튼의 무거운 부지깽이를 막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마자 에슈튼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젠장, 건방진 꼬맹이 같으니라고!"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부지깽이를 거두고, 아시엘이 다시 자세를 잡을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또다시 금속의 충돌음이 방 안에 크게 울려퍼졌고, 마치 바위를 때린 듯 한 강한 충격이 그의 손목을 덮쳤다.

"크윽..!"

땡그랑! 결국 그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를 놓쳐버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손목을 감싸쥔 그는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새롭게 나타난 방해꾼, 케빈을 노려보았다. 혹시나 검에 이라도 나가지 않았는가 살펴보던 케빈은 그의 강렬한 시선을 알아차리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임마, 어디서 우리 예쁜이를 치려고. 생채기라도 났으면 너 황성으로 압송 되도 곱게 못 죽었어."

"케빈 선배, 도와주신 건 고맙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예쁘다는 말은 남자한테 절대로 칭찬이 아니거든요."

아시엘은 투덜거리며 헨슨의 팔을 잡고 부축하려 했다. 어느새 다가온 카이스가 주저앉아 있는 헨슨을 어마어마한 완력으로 단번에 일으켜 세웠고, 제르닌은 뽑았던 검을 다시 넣으며 케빈의 옆으로 갔다.

"케빈이 먼저 간 것에 감사해라. 나라면 그냥 막는 것만으로는 안 끝났을 테니."

어이,정말로 벨 생각이었냐? 라며 케빈이 옆에서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제르닌은 상관하지 않고 싸늘한 눈초리르 에슈튼을 내려다 보았다. 에슈튼은 상황 파악이 다 되었는지 하하,하, 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함정이었나?"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밖에서 헨슨 씨의 연기에 감탄하다가 상황이 좀 급해진 것 같아서 끼어들었죠."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에슈튼의 살벌한 눈이 아시엘에게로 향했다. 케빈과 제르닌이 양 옆에 버티고 있어 당장 달려들지는 못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당장에라도 소년을 집어 삼킬 듯 사나웠다.

"젠장.. 황제의 개 주제에! 온갖 고결한 척, 순결한 척 하면서 모든 천박한 일은 다 하고 다니는 더러운 놈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에슈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기사? 하! 기사도의 기 자도 모르는 근본도 없는 것들 데리고 뭘 하겠다고. 함정이나 파고 찌질하게 기다리는 꼴이라니."

하하하! 그는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에슈튼은 이 가시들이 곧 분노에 차 고함을 지르거나 자신을 벨 거라 확신했다. 감히, 라는 말을 지껄이며 죄인이 된 자신을 걷어차고 욕설을 내뱉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완전히 엉뚱한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냐?"

케빈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지금쯤 파견나가 고생하거나 셀레니스 생활관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멍청이들 중에서는 고귀하네, 뭐네 하고 설칠 놈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예, 뭐 이런 것보다는 밥을 더 좋아하는 동료들이었으니.

"기사도? 개나 주라 그래. 어차피 우리 중의 반이 평민이고.

그딴 거 따지다가 일은 언제 하라고? 위에서 얼마나 부려먹는지 아냐? 필요하면 치사하게 함정도 파고 엿듣기도 하고 뒷치기도 해야 먹고살지. 인생은 실전이야, 임마."

헨슨은 저기, 기사가 하기엔 좀 난처한 말 같은데요, 하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솔직히 그가 봐온 이들의 모습은 흔히 듣는 올바른 기사상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것이다.

에슈튼은 케빈이 태연하게 하는 말에 되려 얼이 빠지고 말았다. 제르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헨슨에게 지시했다.

"좀있다가 니엔이 에나 양 자택에 데려다 주고 오면 이녀석 지하감옥에 가둬. 곧 해 뜨는 대로 우리는 복귀하겠다."

그 말에 에슈튼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곁의 케빈에게 재우쳐 물었다.

"그 여자, 죽지 않았던 겁니까?"

"그럼. 수면제 먹고 죽은 척 했을 뿐이야. 남은 건 오늘 대원들 저녁밥에 넣었고-아 배고파. 저녁을 굶었더니 현기증이 다 나네...어쨌든 대충 피처럼 보이려고 물감 좀 뿌리고 들킬까 봐 발견되자 마자 니엔이랑 헨슨이 옮기는 척 하면서 미리 준비했던 빈집으로 데려다 줬지."

무심하게 대꾸한 케빈은 진심으로 배가 고픈 듯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부여잡고 툴툴거렸다.

"밥도 못 먹고 이게 뭐냐고. 먹을 것 좀 있어?"

"없어요."

아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인상을 팍 찡그린 케빈은 너 때문이잖아! 라고 하는 듯 에슈튼을 사납게 노려보다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때 마침 문가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엔 크라인, 지금 도착했습니다."

"어 왔으면 이놈 좀 헨슨이랑 가두고 와라."

뻣뻣하게 경례하는 니엔에게 케빈은 손가락으로 에슈튼을 가리켜 보였다. 예, 하고 대답한 두 대원은 곧바로 옛 상관이자, 지금은 살인자가 된 남자의 양팔을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별 저항 없이 순순히 그들을 따라 일어난 그를 끌고 방에서 나가려는 두 사람을 아시엘이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같이 가죠."

"네?"

니엔과 헨슨 그리고 다른 기사들까지 아시엘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시엘은 검지손가락을 세우며 잊어버렸나는 듯 말했다.

"아직 풀지 못한 게 남았잖아요. 지하감옥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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