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5. 복귀, 그리고(1)
내려갈 때보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휙휙 올라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도 그리던 지상에 당도했다. 무거운 나무문을 힘주어 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밖에서 스며든 새벽의 여명과- 여전히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보초병 두 명이었다.
"에라이!"
빠악! 신경질적으로 그들을 발로 걷어찬 케빈은 가장 먼저 햇볕이 들기 시작하는 경비대의 로비 가운데로 척척 걸어갔다.
그 뒤로 아시엘, 카이스 그리고 제르닌이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나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죽겠다."
제르닌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아시엘은 그대로 몸을 눕혀버렸다. 거의 3일동안, 틈틈히 눈을 붙인 것 뿐잠도 자지 못하고 바쁘게 여기저기 뛰어다녀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빨리 돌아가서 자고 싶어.."
어느새 아시엘의 옆에 드러누운 케빈이 힘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할 힘도 없는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막 니엔과 지하감옥에서 빠져나온 헨슨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그들의 꼴을 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좀 쉬어가며 하시면 되었잖아요. 셀레니스 기사단의 권한으로 황성 압송되는 시간 좀 늦출 수 있었을 텐데."
"아, 몰라 몰라.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라고."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짜증스레 대꾸하는 케빈. 그런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시엘은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켰다.
"할 일 다했으니까 가요, 이제. 가서 씻고 자던지 쉬던지 하자구요."
"...하아. 보고서는 내일 제출해야지."
자꾸만 찌푸려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제르닌은 자리에서 일어나 케빈을 툭툭 쳤다.
"네놈도 일어나. 적당히 인계해주고 가자."
"뭔가 굉장히 볼품없는 퇴장이네. 뭐, 항상 그렇지만."
케빈은 그렇게 툴툴거리며 상체를 일으키고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아시엘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아서 졸고 있는 카이스를 발가락으로 툭툭 쳤다.
"어이, 일어나. 돌아가자."
그 말에 반응한 것인지 카이스는 별 저항 없이 부스스 일어나 짐을 챙기러 위층으로 비척비척 올라갔다. 그 뒤를 아시엘이 졸졸 따랐다.
케빈 역시 한차례 하품을 하고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헨슨."
마지막으로 남은 제르닌은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헨슨에게 손짓했다.
"예?"
"다른 대원을 깨어나면 상황 설명 해주고. 에슈튼한테 캐물어서 전 경비대장 시신 찾아. 임시책임자는 너다. 알아서 황성으로 압송해. 후임 대장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끝을 늘이는 제르닌. 하지만 그것은 헨슨이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사라져 다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몇일 뒤에 임명장이 내려올 거다. 알아서 잘 하도록."
의아한 얼굴의 헨슨을 격려하듯 두어 번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제르닌은 다른 이들을 따라 윗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네 사람은 헨슨의 배웅도 마다한 채 곧바로 마구간으로 가 각자의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셀레니스 생활관의 새하얀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는, 해가 중천에 이르러 있었다.
벌컥! 한 손으로 문을 거칠게 열어제낀 케빈은 그대로 쇼파에 돌진해 드러누웠다.
"으아! .. 우리 왔어."
"인사가 좀 늦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먼저 앉아있다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케빈 때문에 비켜선 베르칸이 볼멘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케빈은 엎드린 채로 쿠션을 끌어안았다.
"아아.. 오늘만 좀 봐줘. 3일동안 거의 못 잤다고."
"나 참."
혀를 차면서도 그에게 담요 한 장을 가져다 주는 베르칸. 그리고 한쪽에서 스윽스윽-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쇼파 아래에서 노란 무늬의 뱀이 기어나와 늘어진 케빈의 팔을 감고 올라갔다.
"앤! 보고싶었어!"
혀를 날름거리는 앤을 곧바로 안아든 케빈은 그 서늘한 비늘에 얼굴을 마구 부볐다.
뱀과 주인이 눈물겨운 상봉을 바라보던 슌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어느새 옆에서 늘어져 있는 아시엘에게 물었다.
"어이, 룸메이트. 첫 임무는 어땠어?"
"뭐 그럭저럭.."
아시엘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방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모든게 다 귀찮아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래도 투정부릴 수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묘하게 몸이 풀렸다.
"하아~ 역시 집이 좋아요."
"그렇죠?"
케빈처럼 쿠션을 끌어안고 아시엘이 말하자 베르칸은 쿡쿡 웃으며 그의 하얀 볼을 쿡쿡 찔렀다.
"아무래도 그렇지. 제르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 이 꼴이야? 카이스도 다크써클이 턱밑까지 내려올 것 같은데."
"좀 잠을 못 잤을 뿐이야. 너희들, 피곤한 건 알겠지만 일단 보고가 먼저다."
슌의 물음을 대충 넘긴 제르닌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세 사람을 재촉했다. 그러자 잠시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그들이었지만 곧 순순히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제르닌은 세 사람을 이끌고 1층의 한곳에 있는 아델레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차피 루이카엔은 없을 테니.'
지금쯤이면 엉뚱한 황제 폐하의 헛소리를 듣고 있거나, 얼마 전에 돌아온 루이스의 한탄에 맞장구 치고 있거나 어디 가서 여자들을 꼬시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아델레트는 단장이 떠맡기고 간 서류더미에 화풀이라도 하고 있겠지.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어느 한 지점에 이르자, 제르닌은 헤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그런 상태의 아델레트에게 이번 보고를 했다간.."
제르닌의 중얼거림에, 아시엘은 물론이고 케빈과 카이스마저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당장에 들고 있는 펜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아니, 단검을 던질지도.
꿀꺽. 꽤 비장한 얼굴로 침을 삼키는 아시엘의 모습에 제르닌은 다시 한 번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톡톡..그는 손을 들어 아시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걱정 마.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게 더 불안한데요."
아시엘 역시 살짝 표정을 풀고 헤헤 웃었다. 어느새 새하얀 문 앞에 선 네 사람은 용기를 내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연다?"
끄덕.
케빈은 동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힘껏 밀었다.
스륵.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푹신해 보이는 붉은색 카펫이 깔린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소박하고도 우아하게 꾸며진 방의 가운데에는, 제르닌의 예상대로 서류에 파묻혀 있는 아델레트가 있었다.
"왔어?"
처음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얼굴도 들지 않고 말하는 그녀. 그 목소리에 살짝 언짢은 기가 배여 있는 것을 알아차린 아시엘은 몸을 살짝 긴장시켰다.
제르닌은 아시엘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먼저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다녀왔어."
"그래, 수고했어. 꽤 까다로웠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아델레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종이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펜을 든 손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제르닌과 아델레트의 사이에 어색하면서도 묘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어리둥절해 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무표정 일색이었다.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케빈은 아까부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시 아델레트의 입이 열렸다.
"부상은?"
"별 거 없어."
제르닌의 짤막한 대답에, 그녀는 그제야 서류에서 눈을 떼고 네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멀쩡하다 라고는 하지만 전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나 피곤하오'라는 것을 이마에 써붙인 듯 했다.
그리고-
"케빈, 아시엘. 개기지 말고 빨리 치료사한테 가라."
아델레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네?"
"말대답 하지 말고 가라면 가. 보고는 제르닌 한 명이면 충분하니까."
아시엘이 어리둥절해져 되묻자 그녀는 얼른 나가라는 손짓을 하며 한번 더 재촉했다. 결국 여전히 어리벙벙해 있는 그를 보다못한 케빈이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얼른 나가자. 여기 계속 있다간 아델레트 눈빛에 쏘여 죽겠다."
"어, 어? 아, 네."
겨우 정신을 차린 아시엘은 케빈의 손에 끌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아델레트와 제르닌의 눈치를 살피던 카이스 역시 은근슬쩍 그곳에서 은근슬쩍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다시 닫히고, 안에는 제르닌과 아델레트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욱 어색한 공기가 그들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