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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57화 (5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6. 복귀, 그리고(2)

"보고. 보고할게."

분위기가 완전 어색하다 못해 점점 묘하게 흘러가자, 제르닌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델레트 역시 태연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닌은 쿵쿵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진지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루이카엔에게 들었겠지만, 이번 일은 꽤 복잡하게 됐어.."

아델레트는 턱을 괴고 늘 그렇듯이 무심하고도 도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타박타박. 카이스를 생활관에 남겨 두고, 케빈과 아시엘은 황궁의 정원을 지나고 있었다. 3일만에 보는 나무들과 여러 조각품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피던 아시엘은 문득 옆에서 걷는 케빈을 올려다 보았다.

"있잖아요. "

"왜?"

"아델레트 선배는 어떻게 우리 둘만 딱 집어서 내보낸 걸까요?"

아아- 케빈은 아시엘의 의문을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우리 기사단에는 죄다 폭주하는 마차 같은 녀석들 뿐이라. 파견 나갔다가 머리에 열 올라서 날뛰다 다쳤으면서도 그거 까먹고 있다가 방치해서 뒤로 넘어간 놈 여럿 있거든."

"흐음-"

"그래서 아델레트가 하나 하나 챙기다 보니까 어디가 다쳤는지, 안봐도 아는 감이 늘어버린 거지."

아시엘은 호오-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반짝였다.

"그거 신기하네요!"

"그렇지. 아무리 숨기고 있어도 약간의 부자연스러움은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텁. 케빈은 갑자기 손을 들어 아시엘의 머리를 꾸욱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끄아악! 뭐 하는 거에요!"

"조심해라. 아델레트가 널 요주의 인물로 찍은 것 같으니까."

낄낄 웃으며 아시엘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 놓은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잔뜩 골이 난 채 잠시 원망스레 선배를 노려보던 아시엘은 투덜거리며 엉망이 된 금발을 정리했다.

"내 머리가 무슨 장난감이에요! 케빈 선배도 그렇고 루이카엔 씨도 그렇고 카이도 그렇고. 틈만 나면 이래."

"큭큭-니가 참아. 원래 막내는 귀염 받으면서 크는 거야."

그러면서 은근슬쩍 다시 올려지는 케빈의 손을, 아시엘은 질겁하며 피했다.

"겨우 다 정리했는데, 하지 마세요!"

"그래, 그래-알았어."

여전히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하는 케빈. 아시엘은 그제야 안심했는지 머리를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며 다시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곧 두 사람은 다른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간간히 서로 툭툭 쳐 가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자신들을 은밀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사락. 두 사람이 멀어지자 마자 수풀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흠 잡을 데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완벽한 외모의 20대 젊은 남자였다. 매끄러운 흑발이 어깨까지 내려와 찰랑거리고, 마찬가지로 새까만 눈동자가 잔혹한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흐음-"

잠시 멀어지는 두 사람을-아니 정확히는 아시엘을- 바라보며 흥미로운 듯 새하얀 턱을 쓰다듬던 그는, 곧 유난히 빨간 입술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냥 경비대에 실험한다고 뒀던 물건인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그. 그쪽의 멍청한 부대장이 그런 사고를 칠 줄도 몰랐고, 저렇게 간단하게 간파당할 줄도 몰랐다. 너무나도 길었던 인생이 슬슬 지겨워 질 찰나 때마침 찾아낸 유희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저 꼬마, 내가 아는 얼굴인 것 같은데 말이지."

어느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그는 이제 멀리 언뜻언뜻 보이기만 하는 소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아름다운 금발, 그리고 인간들 중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홍안까지.

"흠."

잠시 그를 주의깊게 살피던 그는 문득 떠오른 한 가지에 다시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그 여자'를 꼭 닮았군. 그런데 왜 황궁에?"

하지만 또다시 떠오른 의문점에 그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여자'를 닮은 소년이, 내 실험을 방해했다니."

한참동안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퍼뜩 들더니, 갑자기 스륵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는 시커먼 연기가 잠시 감돌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응?"

케빈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시엘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몸을 돌렸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케빈의 물음에 그는 어느새 비어버린 허공을 주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로 누군가가 있었다면 옆에 있는 케빈이 먼저 깨달았을 터. 한구석에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불길한 감각을, 아시엘은 애써 털어냈다.

케빈은 그런 아시엘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별 일 아니겠지 하는 생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야.. 그것보다, 다 왔어."

"아.."

아시엘은 그제야 자신이 새하얀 건물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얼이 빠져 있었나 보다, 하고 살짝 자책한 그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보았다.

황궁 내의 모든 곳들과 마찬가지로, 빛나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하지만 별다른 장식이 없어 소박해 보였다.

잠시 눈을 빛내며 건물을 관찰하던 아시엘은 어느 순간부터 케빈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요, 선배?"

"..아니. 들어가 보면 알아."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한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옆에서 영문을 몰라 하는 아시엘에게 말했다.

"아시엘. 너 그 무기상의 영감을 만나본 적 있다고 했지?"

"...?네."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레이피어를 구한 곳으로, 들어가자 마자 단도를 맞을 뻔 했던 일은 기억에도 새로웠다.

"..저 안에 있는 영감은, 그 영감의 3배쯤 더 성질이 더러워."

".....!?"

케빈은 점점 경악으로 얼굴이 굳어가는 아시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그래도 치료사니까 설마 환자를 죽이기야 하겠어."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우울하게 대꾸한 아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케빈의 제복 옷깃을 다잡았다. 그런 그를 보며 픽 웃은 케빈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다 박살냈다고?"

"...."

아델레트의 책상 앞. 제르닌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죄책감이 가득 깃든 그의 얼굴을 잠시 어이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곧 찌증스럽게 자신의 하늘색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하아.. 그래도 아시엘은 똑똑해서 믿었는데 완전 루이카엔 놈이랑 똑같잖아! 또 한놈은 제르닌처럼 옆에서 동조나 하고.. 너네는 선배라는 놈들이 안 말리고 뭐했어!"

결국 그녀의 짜증이 폭발하자 제르닌은 몸을 움찔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좋은 생각이라며 얼씨구나 하고 동조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었다. 절대로.

다행히 그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 한 아델레트는 조금 진정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구슬은?"

"ㅇ, 아시엘이 가지고 있다."

제르닌의 대꾸에 아델레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조마조마해 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르닌은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자 깜짝 놀라 몇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어쨌든.. 이 건은 루이카엔이랑 상의해 볼 테니까, 넌 일단 나가봐."

"아..어."

명백한 축객령에 제르닌은 안심하며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아델레트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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