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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58화 (5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7. 복귀, 그리고(3)

케빈이 온몸을 긴장시킨 채 문을 힘주어 열자, 안쪽에서부터 약초의 향기가 훈훈한 공기와 함께 흘러나왔다.

보글보글. 무언가를 끓이는 희미한 소리를 들으며 아시엘은 주위를 살폈다. 빼곡히 들어찬 책장에는 온갖 의학서와 약초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내심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 의외로 평범한데요.."

-하지만 시선을 좀더 높은 곳으로 두자, 아시엘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뱀, 이름 모를 거대한 곤충 그것도 모자라 몬스터의 눈알과 내장이 부유하고 있는 술병들이 선반 위에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와.."

아시엘은 경악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케빈은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우울한 표정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좀 괴짜야. 이상한 영감이지. 그래도 실력만은 확실하니까 안심해. 신관처럼 단숨에 낫게 하지는 못하니.."

그가 까, 라고 말을 끝맻기도 전이었다. 쐐애애액-하고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점점 가까이에 다가오는 것을 깨달은 아시엘은 얼굴이 헤쓱해졌다.

이 상황, 뭔가 익숙한데. 그것보다 위험하잖아!! 하는 오만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나감과 동시에, 한 발 늦게 위험을 감지한 케빈의 머리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쇠붙이 하나가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몸을 푹 숙이는 케빈. 뒤이어 그들의 뒤쪽에 무언가가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어쩐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요..?"

아시엘이 잔뜩 쫄아든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잠시 얼이 빠져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케빈은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영감님!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졌어요? 올 때마다 왜 이러냐고, 진짜!"

억울함이 가득 담긴 외침에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하얀 백발에 왜소하지만 다부진 몸의, 차가워 보이는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노인이었다. 나타난 노인은 다르지만 어째 이 상황도 익숙한 것 같아 아시엘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 다음 순서는 분명-

"네놈이나 루이카엔이나 올 때마다 밉상 짓만 하는데, 내가 어떻게 네놈들을 반기겠냐? 멍청이!"

역시 호통이군. 아시엘은 남들보다 배로 예민한 귀를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노인의 몸에서 터져나온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량에 귀끝이 저릿해 졌다.

하지만 곧이어 방금 것보다 더 엄청난 고함이 바로 옆에서 폭발했다.

"아, 누가 반겨달라고 했어요! 제발 표창 마중이나 보내지 말라고요!"

"이놈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빠악. 노인의 거친 손이 케빈의 뒤통수를 후렸다. 아그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는 케빈.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아시엘은 잠시 선배의 두개골이 으스러지지나 않았을지 심각하게 걱정해야 했다.

케빈의 목에 얌전히 감겨있던 앤 역시 불길한 기운을 느꼈는지 은근슬쩍 그의 팔을 타고 내려와 아시엘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그래, 오늘은 뭐 때문에 그 낯짝을 들이민 거냐."

"우씨.."

한바탕 두들기고 나서야 본론을 묻는 노인이 야속해 케빈은 무어라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늙은 치료사가 다시 주먹을 쥐자, 그는 기겁하며 몸을 발딱 일으켰다.

"잠깐, 잠깐 잠깐! 우리 치료, 치료 받으러 온 거라구요. 저 녀석이랑!"

"음?"

그제야 노인의 푸르스름한 눈이 뻘쭘하게 서 있는 아시엘에게로 향했다. 관찰하는 듯 자신을 아래위로 살피는 그에게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하..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흥, 악마새끼처럼 새빨간 눈이로군. 거기다 계집애같은 얼굴이란.. 신입이냐?"

케빈은 미소를 머금은 입 끝에 경련을 일으키는 아시엘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아시엘이라고 하는데 루이스 아르셰인 경이 데리고 들어왔어요."

"그 싸가지 없는 놈이?"

제국 최고의 기사를 단번에 싸가지 없는 놈으로 일축해 버리는 노인의 작태에 케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료사 영감은 방금과는 조금 다른 눈으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호오.. 루이스, 그 녀석이 업둥이를 데려왔다더니 사실이었군. 그렇다면 시녀들이 떠들고 다니던 이야기의 진위도 대충 알겠군 그래."

"소문이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아시엘. 순간 케빈은 위험을 느끼고 재뻘리 노인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늦어버렸다.

"악, 안돼!"

"루이스 아르셰인이 파견에 나갔다가 악마가 내린 듯한 미모를 가진 꼬마 여자애에게 홀딱 반해버려, 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 애를 아카데미에도 보내주고 보살펴 주며 키웠다지."

어쩐지 서두부터 불안한 말 투성이었다. 아시엘은 표정관리를 하려 애쓰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얼굴이 점점 창백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꼬마는 커서 루이스를 따라 셀레니스에 입단했다. 그런데 꼬마는 사실 남자였다. 더불어 그래도 사랑이 식지 않아 루이스는 그 뒤로 황궁을 뻔질나게 드나든다-는 얘기."

이제 아시엘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표정관리고 뭐고 당장에 피를 토하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케빈은 이마를 짚었다.

황궁 안의 입소문은 무섭다. 오해받을 만 한 외모의 아시엘과 팔불출 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루이스는 가십거리로 삼기 딱 좋은 사람들이었다. 얼핏 들으면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글쎄. 여자들의 입은 무서웠다.

노인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아시엘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다 짖궂은 얼굴로 직격타를 날렸다.

"그리고 루이스는 사실 6살짜리 꼬마 여자애한테도 반하는 변태라는 것도."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아시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곧 치료동 내부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빽 고함을 질렀다.

"절대 아니에요오오오오!!"

똑똑. 고민에 빠져 있던 아델레트는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문 밖의 상대는 벌컥 문을 열었다.

"여어."

십 년은 늙은 듯 한 얼굴로 휘적휘적 들어온 것은 역시나 단장, 루이카엔이었다. 아델레트는 인사 대신 맞은편의 의자를 발로 밀어주었다.

"어째 부단장이랑 단장이랑 바뀐 것 같은데."

"그럼 네가 일 하던가."

괜히 농담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루이카엔은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죽겠다. 정말로."

"왜?"

아델레트는 그렇게 되물으면서 루이카엔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그것을 마치 음식을 가리는 아이가 피망을 바라보듯이 질색한 얼굴을 한 루이카엔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진짜, 루이스 경이 존경스럽다. 적어도 10년 동안 그 옆에서 버텼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제국의 최고 기사라는 게 쉽게 되는게 아니지."

여러 의미로 말이야, 하고 말을 끝맻은 아델레트는 딱하다는 눈빛으로 루이카엔을 바라보았다. 루이스가 궁을 나간 이후 황제의 헛소리 상대가 되어 준 제 2의 희생양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아으으! 진짜 돌겠네. 도대체 황제라는 사람이 한가한 것도 아닌데 매일같이 어떻게 그 많은 양의 폭약을 개조해 대는지 모르겠다니까."

"수고하네."

"후! 그래서 내가 한가지 수를 생각해 냈지."

갑자기 루이카엔이 눈을 반짝이자 아델레트는 고개를 갸웃 했다. 황제의 헛소리를 듣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 냈다는 걸까. 그 표정을 읽어 낸 루이카엔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검지 손가락을 쳐들어 보였다.

"이름하여, 남한테 떠넘기기!"

"...."

참으로 치사하다면 치사하고, 그 답다면 그 다운 방법이었다. 아델레트는 어이없이 이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불쌍한 녀석은 누구지?"

"후후. 누구겠어? 아시엘 만큼 적임자도 없잖아!"

"...하아."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이마를 짚었다. 또다른 희생자에게 잠시 묵념한 아델레트는 힘이 빠져 축 처진 손으로 루이카엔이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오늘 저녁, 슈베이만 대공 전하가 환궁한다고 하더라. 3일 후에 귀환 파티를 주죄할 예정이 있대. 우리도 참석해야 하고.. 그건 제르닌 쪽 사건 보고서인데.. 아무래도 석연찮은 구석이 꽤 많아. 거기다 루아 이클립스도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 같아."

"이클립스가?"

루이카엔은 종이 한 장을 넘겨 대충 살펴보다 다시 덮고 서류더미를 팔에 끼우고 몸을 일으켰다.

"이건 내 집무실로 가서 천천히 볼게."

"그러던지."

얼른 나가라는 듯 훠이훠이 손을 내젓는 아델레트. 그녀를 잠시 야속하게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고 다시 홱 뒤돌아 아델레트를 바라보았다.

"왜?"

"아니. 아까 폐하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셔서. 너라면 답을 알 것 같은데."

"뭔데?"

아델레트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음.. 하는 소리를 내던 루이카엔은 곧 아까 라이펜이 짖궂은 표정으로 꺼내 놓은 물음을 그대로 말했다.

"예쁜 금발을 가진 소녀에게는 어떤 드레스가 잘 어울릴까, 하고."

"뭐?"

"일단 빨간 색의 무릎까지 오는 미니 드레스가 어떠냐고 말하긴 했는데. 혹시 여자친구라도 생기신 건가."

아델레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에는 종아리가 보이는 귀여운 스타일의 드레스가 유행하기는 했다. 시내에만 나가면 여자들을 줄줄 달고 다니는 루이카엔에게 그런 것을 물었다는 건, 황제가 어떤 소녀의 취향에 맞춰 선물을 하고 싶다는 뜻.

"글쎄. 그럴 지도 모르지. 폐하도 미인이시고.. 황후 마마는 돌아가신지 꽤 되었으니."

"역시 그렇지?"

루이카엔은 살짝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대로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고 다시 혼자 남은 아델레트는 서류를 보는 데 골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몰랐다. 황제는 지금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선물을 받을 이는 생각보다 꽤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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