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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59화 (5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8. 복귀, 그리고(4)

아시엘의 혼을 쏙 빼 놓은 치료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완전 걸작이구만, 걸작!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군."

"작작 해, 영감님. 새파란 어린애 괴롭히면 재미있어요?"

케빈은 어버버 거리는 아시엘을 뒤로 보내고 고함을 쳤다. 이라도 드러내고 으르렁거릴 기세의 그를 웃음기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노인은 곧 팩 하고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와라, 치료 받으러 왔다며."

괴팍한 노친네. 케빈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아직 멍해져 있는 아시엘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가자. 치료만 받고 이딴 곳에서 얼른 나가 버리자고."

"아.. 네."

겨우 고개를 끄덕인 아시엘은 케빈과 노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건물은 안쪽으로 꽤 깊은 구조였다. 들어갈 수록 약초의 향들과 무언가를 끓이는 소리는 점점 진해졌고 바닥에 깔린 카펫도 점점 두터워 졌다.

아마 온갖 희귀한 약재와 동식물이 든 유리병을 떨어뜨리더라도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고, 아시엘은 속으로 짐작했다.

또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안쪽에 커다란 책상과 의자 그리고 여러 개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두 사람을 의자에 앉게 하고 자신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꼬마 놈은 오른쪽 다리인가."

"....? 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치료사로 산 게 얼마인데 그것도 못 알아보겠냐. 얼른 다리나 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시엘이 의아하게 묻자 노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델레트와 비슷한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아시엘은 순순히 부츠를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

퉁퉁 부어 있는 소년의 발이 드러나자 케빈과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충 붕대를 감았다고는 하지만 서툴게 한 처치라 그닥 도움은 되지 않은듯 했다.

"넌 이러고 어떻게 멀쩡하게 걸어다녔냐? 독한 놈."

"헤헤."

노인이 욕설을 내뱉으며 옆의 약재를 집어 들자 아시엘은 쑥쓰럽게 웃어 보였다. 그런 소년이 밉살스러웠던지 치료사는 다른 손으로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끄악!"

"웃지 마라, 정들라."

아시엘은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노인은 그의 발목을 잡아 손으로 살살 비틀고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 아야!"

"쯧,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 뿐이냐. 참아!"

다시 입을 다물고 천장을 바라보는 아시엘. 그 모습에 어떤 의지까지 느껴져서 케빈은 킥, 웃고 말았다.

노인은 아시엘의 발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초즙을 살살 문질러 발랐다. 그러고는 하얀 붕대를 집어 들고 꼼꼼하게 힘주어 감았다.

"내일이면 붓기가 빠지고 아프지 않을 거다. 다음, 케시비언!"

감사.. 윽, 합니다, 하고 힘겹게 말한 아시엘은 재빨리 다리를 내리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케빈은 죽을상을 지으며 윗도리를 벗고 붕대에 허술하게 감싸인 어깨를 보였다.

노인은 팔을 걷어부치고 피가 배여 나와 붉게 된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선명한 검상이 드러나자 혀를 쯧 찼다.

"네놈도 미련하게 이러고 돌아다녔단 말이냐. 이건 꿰매야 겠군."

"으.. 싫은데. 영감은 마취도 안 해 주잖아!"

"징징거리지 말고 닥쳐. 어이, 꼬마."

멍하니 앉아 있다 갑자기 호명된 아시엘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한번 더 혀를 찬 노인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저기에서 바늘 통이랑 실 좀 가지고 와라."

"아, 네."

아시엘은 발딱 일어나 책장이 늘어선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뒤에서 "우리 애한테 멋대로 심부름 시키지 마." "얼씨구, 다 큰 사내애한테 극성 오빠 노릇이라도 하려고?"하는 대화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무수히 서 있는 책장을 뒤져 겨우 그가 바늘통과 연금술로 만든 수술용 실을 찾아낸 것은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을 때였다.

그는 양손에 하나씩 쥐고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조심 안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들어가자 그런 그의 예민한 귀에, 두 사람이 소곤소곤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시엘은 걸음을 멈추고 무의식적으로 청력을 조금 돋구었다.

"어째 셀레니스에는 저런 녀석들만 모여드는 건지. 그래, 저 길고양이 녀석은 어디서 주워 온 거냐."

노인이 담배를 피워 물었는지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시엘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뒤로 물러섰다.

뒤이어 케빈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라. 루이스 경이 주워 왔다니까.. 아카데미 수석으로 졸업하고 절차대로 들어온 놈이에요.듣기로는 하노빌 영지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 녀석 알아요? 어떻게 보자마자 길고양인지 귀족 꼬만지 구별해요."

"그런 건 눈빛이나 행동만 봐도 단번에 나와. 네녀석만 봐도 알지. 그것보다 네 놈, '그건' 끊었겠지."

그거? 아시엘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를 더더욱 기울였다.

다시 케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래 전에 끊었다고요. 이젠 손도 안 대요. 그것보다 저 꼬맹이 귀가 귀신같이 밝으니까 좀 조용히 하라구요."

"흥, 그건 잘 했군. 하여튼 다시 한번 더 그딴 거 손 댔다간 혀를 이 손으로 뽑아버릴 줄 알아."

노인의 으름장이 이어졌다. 아시엘은 더 이상 들으면 될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찾아왔어요. 잡동사니가 많아서 좀 오래 걸렸네요."

"잡동사니라고? 그것들이 얼마나 희귀한 약재인지 알기나 해! 네놈들 한 둘보다 훨씬 비싸다고."

아시엘이 자연스럽게 미소지으며 물건들을 건네자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들을 거의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케빈이 자신의 눈치를 살짝살짝 보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아시엘은 시치미를 떼고 그의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팔이나 내라, 애송이."

노인이 바늘에 실을 꿰며 그렇게 말하자 케빈은 똥 씹은 표정으로 베인 상처를 들이밀었다.

바늘이 점점 그의 살갗에 가까워져 가자, 아시엘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의 예상대로, 어마어마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두 사람이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묵묵히 걷던 케빈은  평소처럼 나무 하나 하나를 주의깊게 살피고 있는 아시엘에게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

"네?"

아시엘은 고개를 돌려 케빈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케빈은 그가 딴 생각을 하다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말했다.

"피곤하지?"

"음... 아뇨."

아시엘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케빈 역시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아까와는 다르게 아시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영감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다소 심란해졌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얼른 가서 밥 먹고 자자고."

"네엡."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며 빠른 걸음으로 케빈을 앞질러 갔다. 그에 케빈도 걷는 속도를 올려 빠르게 후배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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