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60화 (6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59. 수난의 그림자(1)

"......"

아시엘은 멍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곤하지 않다는 말이 무색하게 어젯밤 저녁도 먹지 않고 로비의 소파에서 곯아떨어졌던 그다. 누가 옮겨 준 거지? 그는 잠이 덜 깬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으으-"

침대 안에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켠 아시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지만 그 사이로 언뜻 언뜻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항상 코를 골던 슌도 맞은편 그의 침대에 없는 것을 보니, 이미 기상시간은 한참 전에 지난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시엘은 앗차, 하며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늦잠 자 버렸네."

평소처럼 양쪽 볼을 탁, 소리 나게 때린 그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샤워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재빨리 몸을 씻은 그는 머리를 대충 말리고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한 후, 아시엘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잘 잤냐?"

로비에 내려가자,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케빈과 늑대로 변해 늘어져 있는 두 쌍둥이-베르칸과 벨킨이 그를 반겼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케빈의 인사에 생긋 웃으며 대답한 아시엘은 벨킨의 옆에 자리잡았다. 새로 온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슬쩍 한쪽 눈을 뜬 벨킨은 인사하는 것처럼 굵은 꼬리를 설렁 흔들어 주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베르칸 역시 커다란 앞발을 소년의 허벅지에 살짝 올렸다 도로 내렸다. 아시엘은 킥킥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들의 등을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피곤하게 하품을 쩌억 한 케빈은 소년에게 퉁바리를 주었다.

"안 피곤하긴 개뿔. 어제 그대로 소파에서 자 버렸으면서."

"하하.. 죄송해요."

아시엘이 어색하게 웃자 케빈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아니, 사과할 것 까진 아니고.. 아참. 루이카엔이 너 부르던데."

"네? 왜요?"

아시엘이 고개를 갸웃하자 케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무슨 일인지는.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녀석, 징글맞게 엄청 헤실거리고 있었으니까."

"끄응."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에 아시엘은 신음을 흘렸다. 지난 몇 주간 단장이라는 그를 지켜본 결과,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다.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갈 거냐?"

"가야죠. 신참 풋내기 주제에 어떻게 단장한테 개겨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한 아시엘은 베르칸과 벨킨의 꼬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똑똑. 단장의 집무실 앞에 선 아시엘은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하얀 대리석 문을 두드렸다. 곧 안쪽에서 루이카엔이 들어오라는 허락이 돌아왔다.

"오, 소년이여. 기다렸다네."

아시엘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루이카엔은 전에 없이 활짝 옷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집무실에서 볼 때는 항상 서류더미에 묻혀 죽을 기세로 빌빌거리던 단장 이었기에 아시엘은 더더욱 불안해졌다.  푸드덕. 루이카엔의 독수리, 에니르가 주인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아시엘의 어깨에 앉았다.

그것을 잠시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옆에 쌓여있는 서류더미에서 종이뭉치를 하나 뽑아 아시엘에게 던졌다.

그것을 한손으로 척, 받아낸 아시엘은 의아하게 물었다.

"이게 뭐에요?"

"너네들이 맡았던 일의 보고서. 다음 주 대전회의 때 필요하니까 황제폐하께 좀 전해 줘. 다녀오면 오늘 하루 동안 다른 일은 안 시킬게."

그 파격적인 조건에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이카엔은 느긋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자 출발! 에니르를 데리고 가. 황제 폐하가 좋아하시니까!"

"에, 에? 잠깐만요!"

아시엘은 나가지 않으려고 뻗댔지만, 루이카엔에게 등을 떠밀려 결국 바깥으로 거의 쫒겨나 버렸다. 쾅! 임무 수행 전에는 절대로 다시 들어오지 말라는 듯 등 뒤에서 문이 매정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시엘은 한숨을 푹 쉬며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다 보았다. 어째 예감이 안 좋았다.

그런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에니르가 꾸륵, 하고 울며 얼굴에 부리를 부볐다.

"그래, 별 일이야 있겠어."

아시엘은 그런 독수리의 목을 긁어 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의 쓸데없이 예리한 감은 여지없이 척척 들어맞을 예정이었다.

생활관 밖으로 나선 아시엘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구름 몇 조각이 떠가는 하늘은 푸르고 바람도 적당히 부는 그야말로 최고의 날씨였다. 설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질라고. 아시엘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에니르가 앉아 있는 어깨가 조금 묵직하게 아파왔지만 뭐 그런 것은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자유 시간- 이라. 아시엘은 문득 루이카엔이 내건 조건이 떠올라 기분이 더더욱 좋아졌다. 셀레니스 기사는 바쁘다, 굉장히. 그와중에 틈틈히 생기는 자유시간은 그야말로 꿀과 같았다.마법 연구를, 특히나 최근 진전이 없는 치유 마법을 더더욱 파고들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아시엘은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시엘은 다시 천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언제부턴가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항상 그의 예민한 귀에 잡히던 잡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끈덕지게 따라붙는, 기분 나쁜 시선.

아시엘은 꾸륵, 하고 우는 에니르의 목을 살살 긁어 주며 달랬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다 대충 감을 잡은 그는 독수리에게 속삭였다.

"에니르. 내가 신호하면 날아."

"꾸륵."

그 말을 알아들은 양 에니르는 아시엘의 어깨에서 내려와 팔에 살풋 내려앉았다. 여전히 천천히 걸으며 청각을 한계까지 돋궈 주변을 관찰하던 아시엘은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확인했다.

'역시. 어제의 시선도 착각이 아니었어.'

그는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손에 짧은 검의 자루가 잡히자 그는 주저 없이 시선이 느껴지는 쪽의 나무에 세 자루의 단도를 날렸다.

퍽, 퍽! 공기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간 단도들은 차례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먼 곳에 있는 나무 한 그루에 박혔다. 적의 시선이 한순간 단도로 분산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아시엘은 다리에 마력을 모아 파박, 하고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에니르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감시자의 시선이 다급하게 아시엘을 좇았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남자는 어이가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단도가 박혀 있는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긴 흑발과 흑안의 미남자- 지난번의 그였다.

"나 참."

그의 시선의 끝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고 있는 단도에 머물러 있었다.

"휘유~ 생긴 거랑 다르게 엄청 터프하네."

곧 하! 하고 다시 허탈하게 웃은 그는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역시 그 여자랑 닮았어. 그런데.. 어째서 '인간' 의 마력만이 느껴지는 걸까."

마치 즐거운 고민을 하는 것처럼 그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러다 손가락을 탁, 튕겨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몸을 둥실 공중으로 띄웠다.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정도 높이 올라간 그는 양쪽으로 손을 쭉 뻗어 결계를 깨뜨렸다.

파직,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곧 일상적인 잡음들이 그의 귀에 스며들었다. 만족스럽게 미소지은 남자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저번에 그랬던 것과 같이, 그는 검은 연기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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