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61화 (6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0. 수난의 그림자(2)

아시엘은 한참 동안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드문 드문 사람들이 보이고 생활 잡음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아, 흐으.. 하아.."

몸을 가눌 힘도 없어 아시엘은 대리석 기둥에 몸을 기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미친!'

말 그대로 정말 미친 상황이었다. 분명 자신이 들어갔던 공간은 결계. 하지만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주술사나 마법사들이 펼치는 결계 특유의 공간 일그러짐이나 공기의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고위 마법사라고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아시엘은 자신의 한쪽 손목을 걸고서라도 말할 수 있었다. 절대로 그는 원한 살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분명 끈질기게 따라붙던 시선은 틀림없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으니 더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후-"

아시엘은 숙였던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창백해 졌는지 주변의 사람들이 걱정스레 쳐다보고 갔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영문 모를 이상한 구슬에, 결계에 스토커라니.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가 짜증스럽게 자신의 금발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데, 하늘에서 푸드덕 소리가 나더니 에니르가 내려왔다.

아시엘의 어깨에 착륙한 독수리는 애교스럽게 그의 볼에 부리를 갖다댔다.

"아..."

아시엘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숨은 차오르고 머리는 지끈거리지만, 일단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있었다.

"젠장.. 어쩐지 기분이 안 좋더라니."

일단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맞았지만 설마 이것보다 더 한 일이 있을까. 아시엘은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털고 몸을 똑바로 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본성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순백의 건물 앞에 다다르자 아시엘은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옷을 단정히 정리하고 아직까지도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힌 그는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두 번째로 오는 본성이었다. 탁 트인 홀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보자 아시엘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채 얼마 가기도 전, 아시엘은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아시엘 경."

".....!"

우뚝. 그 자리에 선 아시엘은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느글거리는 목소리.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그쪽으로 돌렸다. 물론 생긋 화사하게 미소짓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아시엘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백작- 하노빌 백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조금 뒤쪽에는 루아 이클립스의 제복을 입은 그의 아들이 아시엘을 사정없이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 어째 본성에 올 때마다 자네를 만나는 것 같군. 그런데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당신을 만나서 그런 겁니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아시엘은 더더욱 활짝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흠.. 그런가?"

정말로 걱정한 것은 아닌지 백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그러다 말투를 바꿔 옆의 아들을 가리켰다.

"내 아들이네. 구면이라지? 이번에 루아 이클립스에 들어갔다네."

"네. 그렇습니다."

적한테 왠 친한척이냐. 아시엘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구면이고 자시고 니스는 아카데미 시절 아시엘을 괴롭히려다 된통 당한 전적이 있었다. 아시엘에게 주먹으로 터지고, 2차로 걸쭉한 길거리 욕설로 터진 그는 그 뒤로부터 만나기만 하면 이를 북북 갈지만 차마 덤비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시엘이 미소지으며 오랜만입니다, 하고 인사하자 니스는 얼굴을 더더욱 찌푸렸다.

"네놈을 만나다니 오늘 하루는 재수가 없을 것 같군, 거지새끼."

니스의 욕설을 살포시 무시해 준 아시엘은 그를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 그러니까 아주 밟아 줬을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그였다. 아시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키도 자라고 근육도 붙었는데, 정신 상태는 그때랑 똑같은 것 같네. 뭐, 지금 보니 왜 그런지 대충 알겠다만."

"....!"

니스의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점점 얼굴이 굳어져 가는 하노빌 백작 쪽으로 돌아선 아시엘은 삐딱하게 서서 고개를 까닥했다.

처음의 예의 바른 태도와는 비교도 안 돼는, 불량한 자세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전해 줄 것이 있어서요."

"...."

그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아시엘은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뒤에서 부자의 사나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더더욱 속도를 내서 걸을 뿐이었다.

"진짜 재수가 더럽게 없네."

"꾸륵."

에니르가 동의한다는 듯 아시엘의 어깨에서 짧게 울었다. 손으로 가볍게 그의 머리깃을 쓰다듬어 준 그는 익숙한 복도로 접어들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장식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여기저기에 섬세한 꽃 모양의 조각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복도 한구석에는 비싼 관상용 나무가 화분에 심겨 놓여 있었다.

"완전 봄 기운이 가득 차 있네."

여름이면 제복이 여름용으로 따로 지급되나? 더울 텐데. 따위 생각을 떠올리던 아시엘은 이윽고 황제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문 앞을 지키던 근위병이 아시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용무가?"

"황제 폐하께 서류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근위병은 잠시 아시엘을 바라보다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성함이?"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 아시엘..음. 아르셰인 입니다."

아직도 성을 붙이는 것이 어색해 아시엘은 살짝 뜸을 들였다. 하지만 역시 그 이름은 효과가 직방이었다.

"아, 아르셰인.. 몰라뵙고 죄송합니다. 얼른 폐하께 고하겠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듯 근위병은 허리를 푸욱 숙였다. 아시엘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역시 제국 최고의 기사가 들인 아들이란 타이틀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문이 열리자, 아시엘은 근위병에게 고개를 숙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 하나를 더 통과한 아시엘은 지난번과 같이 커다란 의자에 앉아 서류와 씨름 중인 황제- 라이펜과 마주했다.

"아시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시엘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례를 취했다. 그리고 라이펜의 일어나, 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아까의 누군가와 똑같이-루이카엔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라이펜의 얼굴과 딱 마주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음?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뇨. 그냥..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으셔서."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라이펜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거나 이리 줘."

"아, 네."

아시엘은 옆으로 다가온 보좌관 페이튼에게 서류를 건넸다. 페이튼은 그것을 정중하게 받아들고는 라이펜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흠."

라이펜은 그것을 지어들고 몇 장 넘겨보더니, 다시 탁 덮고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참. 선물은 도착했나?"

"선물요?"

"오늘 아침에 보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시엘. 라이펜은 턱을 쓰다듬었다.

"엇갈렸나 보군... 뭐, 좋아. 어차피 돌아가면 알게 될 거니까."

"?"

아시엘은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라이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훠이 훠이 저었다.

"아, 안돼. 깜짝 선물은 미리 알고 풀어보면 재미 없잖아?"

"...."

아시엘은 직감했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 중에서 그 선물이라는 것이 가장 최악일 것이라는 것을.

소년의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지만 라이펜은 모르는 척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렸다.

"내일 밤, 별궁에서 파티가 열리는 건 알고 있지?"

"아, 네."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델레트에게 전해 들었던 것 같았다.

"3개월 동안 황궁을 떠나 있었던 대공 전하의 환궁 축하 파티.. 아닌가요?"

"맞아. 그리고 거기엔 나도, 황자와 황녀 그리고 너희 셀레니스 기사단도 참가할 예정이지."

"그것도 들었어요. 저희는 폐하의 호위를 맡을 거라고."

아시엘의 말에 라이펜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맞아. 하지만 너희들 중 몇 명은 다른 임무를 맡게 될 거다. 그 곳에 초대된 거물 귀족들이 몰래 뒷거래를 하려고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지."

"그렇게 간 큰 놈들이 있단 말이에요? 아니, 애초에 무슨 거래요?"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셀레니스 기사단에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은 물론이고 황제와 대공이 한꺼번에 참석하는 만큼 경비가 삼엄할 것이다. 보통은 그런 와중에 거래를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판단하고 물러갈 터였다.

하지만 이 윗사람들의 세계는 녹록치 않았다. 라이펜은아직 윗물에 고인 썩은 물을 모르는, 순진한 소년에게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우리 제국은 법으로 노예와 마약을 금하고 있어. 하지만 몇몇 귀족들이 돈벌이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지. 그 때의 거래는 아마 마약 수 킬로그램을 넘긴다는 서류겠지. 돈 앞에선 간덩이도 커지나 봐."

"아, 그래서.."

아시엘은 떫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윗분들이 그런 추잡한 일에 손을 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찝찝했다.

라이펜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너희들 몇 명은 잠복해서 그걸 찾아낸다. 뭐이런 거야. 원래 구두나 수정구로 전하려고 했는데, 도청당할 수도 있으니까- 네가 돌아가서 아델레트랑 루이카엔한테 좀 전해줘."

" 네."

아시엘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나가 보라는 라이펜의 말에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조용히 닫히고 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라이펜은 피식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 내일이 기대되는군."

"하지만 폐하. 그런 거래는 몇 번씩 있어 왔습니다. 새삼 그걸 단속하시려는 건.. 그리고 그 선물의 의중도 전 모르겠습니다."

라이펜은 페이튼의 질문에 쉿,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 없어. 단독으로 벌이는 일이라, 루이스한테 들키면 맞아 죽을 지도 모르거든."

"...."

페이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라이펜은 빙긋이 웃으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어쨌든- 그 애가 미끼 역할을 충실하게 해 줄거야. 신중한 나의 형을 움직이게 할 미끼가."

대공- 슈베이만이 그 때의 일과 관련이 있다면, 그녀와 똑같이 생긴 소녀의 존재에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설령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대되는군.'

라이펜은 입술에 더더욱 진한 미소를 그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