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62화 (6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1. 소년, 소녀로(1)

생활관으로 돌아온 아시엘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올라가면 누워서 책이나 읽어야지, 하는 행복한 상상에 젖어,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비에 들어섰다. 하지만.

"다녀왔습니-"

다, 하고 차마 끝맻지 못하고 아시엘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로비 한 가운데에 생활관에 남아있던 기사들 모두가 무언가를 둘러싸고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순간 아시엘의 머릿속에 퍼뜩  '선물' 이란 한 단어가  떠올랐다.

'도망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아시엘은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때마침 루이카엔이 그를 발견했다.

"어, 아시엘!"

".....!"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한숨을 푹 내쉬고, 아시엘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원위치 시켰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이리 와 봐."

제기랄 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중얼거리며 그는 루이카엔이 부르는 대로 다가갔다. 루이카엔은 그의 팔을 붙잡고 무리의 한 가운데로 이끌었다.

얼떨결에 큼직한 상자 앞에 선 아시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저.. 이게 뭐에요?"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거래. 너한테."

누가 한 건지 모를 대답을 들으며 그는 상자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겉면이 반들반들 광이 나는 것이, 척 봐도 고급스러운 포장재에 싸여 있었다. 거기다 한 귀퉁이에 장식되어 있는 비단 리본과 그 아래에 멋들어진 필체로 쓰여 있는 [샤이린 의상실] 이란 서명. 아시엘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저한테 온 거 맞아요?"

"맞다니까. 이거 보라고."

루이카엔은 리본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쪽지를 들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아시엘 아르셰인 귀하' 라고 적혀 있었다.

"......."

아시엘은 이마를 탁 짚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아델레트는 절망하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면서도 재촉했다.

"어서 열어 봐. 그 황제 폐하가 보내신 거니까 폭탄 같은 게 들어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빨리 처리해야지."

"하아.."

아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상자 뚜껑을 잡았다. 다른 기사들의 호기심 반, 걱정 반 섞인 눈들이 그곳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스륵. 과연 값비싼 재질의 것인지 뚜껑은 손쉽게 열렸다. 그리고, 아시엘과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 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빨간 천이었다. 곱게 개어져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순간 일동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시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것의 끝부분을 집고 들어올렸다. 점점 그것의 모습이 드러나며 동시에 내부의 공기도 식어갔다.

그들의 눈이 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틀림없는 드레스였다.

소매가 없고, 가슴 부분부터 감싸게 되어 있는 천이 골반에서부터 종 모양으로 퍼져 무릎쯤까지 닿게 되어 있는 아름답고도 귀여운 파티용 드레스.

상체 가장 윗부분은 보라색 보석이 박힌 붉은 꽃 장식이 달려 있었고 치마는 적당히 주름진 천 위에 반투명한 망사가  어지러이 둘러져 있었다. 아시엘은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비싸 보이는 최고급 드레스를 손에 든 채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게.. 왜 나한테?"

상자 안쪽에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여러 장신구들, 칙칙한 색깔의 가발과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가위에 다소곳이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루이카엔은 그것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일단 이 모든 것은 명령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지. 아델레트, 아시엘을 최대한 예쁘게 꾸며서 내일 파티에 데리고 와. 안에 들어있는 가발은 황실 연금술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제작한 거니까 조심히 다루고. 혹시라도 도망치려고 하면 어떻게든 붙잡도록. 그리고 안에 있는 책은 약간의 뇌물이니 받을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해. 그럼 잘 부탁해♡"

"...."

순식간에 생활관 안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얼음을 깨는 것 처럼 그 분위기를 깨트린 것은- 아시엘이었다. 그는 곧장 바깥으로 튀어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를 모든 남자들이 우르르 나가 가로막았다.

"안돼, 아시엘! 참아!"

"싫어요! 나 안 해! 기사 안 한다고!"

참으로 패륜적인 말이었지만 아무도 소년을 탓할 수 없었다.아시엘은 순간적으로 힘을 실어 선배들 무리를 뚫고 돌진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제복 옷깃을 낚아채는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아악! 놔요!"

"안 돼. 너 놓치면 우리 단체로 감봉이라고! 그리고 조금 보고 싶기도 하단 말이야!"

사심을 입 밖으로 내뱉은 청년 기사- 오스카는 버둥거리는 아시엘의 허리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그러자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는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고 손을 펼쳤다.

"이그니스 루 테이라 아만."

펼쳐진 손바닥 위에 붉은색 불의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야, 안돼!"

기사들은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그에게로 달려들어 손목을 붙잡았다. 다행히도 발동되기 직전에 마법 캐스팅은 해제되고 동시에 아시엘의 체력 역시 고갈되고 말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들은 헉헉거리는 아시엘을 끌고 다시 선물상자 앞으로 끌고 갔다. 루이카엔은 잔뜩 울상을 짓는 아시엘에게 상자에 들어있던 책을 건넸다.

"....?"

"그쪽이 진짜 선물인 것 같은데. 폐하 말씀으로는 뇌물이라는 책이야."

아시엘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책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표지에 적혀 있는 커다란 인쇄체 글씨를 발견하자 마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 이거!"

루이카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로서는 책 쪽엔 문외한이지만 아시엘의 입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예상이 맞는 듯 했다.

"이거, 대륙에 15 부밖에 발매 안 된 고대 역사서잖아요!"

탄성을 지르던 아시엘은 곧 표정을 굳히고 한쪽에 곱게 놓여 있는 드레스를 한 번 바라보고, 또 책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 찝찝한 표정에 모두는 속으로 됐다!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확실히 책벌레 중의 책벌레인 아시엘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아시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유일한 탈출구는 동료들이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그는 다시 몸을 바로 돌려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희귀본 책과 끔찍한 드레스가 코앞까지 들이밀어져 있었다.

"..젠장!"

결국 그는 욕을 내뱉으며 테이블에 쾅, 하고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보기 드문 아시엘의 완전 K.O였다. 희귀한 구경거리가 생긴 기사들은 킥킥거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잘 생각했어! 주군의 명령이 무엇이건 간에 따르는 게 기사의 명예지."

"제 남성으로서의 명예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하지만 조금의 울먹임이 섞여 흘러나오는 소년의 목소리에, 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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