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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63화 (6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2. 소년, 소녀로(2)

루이카엔은 풀이 잔뜩 죽은 채 테이블에 엎드려 있기만 하는 아시엘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킥킥거리며 상자 안에 들어 있는 푸석한 가발을 집어들었다.

"그나저나 이건 뭐래? 황실 연금술사라면 로웬 백작님이잖아. 그 분한테 직접 부탁하셨다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요리조리 살피던 그는 무심코 그것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칠던 가짜 머리가 진짜 루이카엔의 머리칼과 같은 갈색으로 변하더니 쑥쑥 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자라던 가발은 이윽고 루이카엔의 허리 부근까지 길어지고 멈췄다. 졸지에 탐스런 웨이브가 진 긴 머리를 가지게 된 그는 머리칼을 붙잡고 감탄을 흘렸다.

"캬~ 이런 거였구만. 신기하네."

"신기하고 자시고 빨리 벗기나 해! 눈 썩는다."

루이카엔은 눈살을 가득 찌푸리고 있는 기사들을 잠시 불만스럽게 바라보다 곧 씨익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요염한 윙크를 해 보였다.

"어머, 오빠앙~ 너무해."

"크아아아악!!"

순식간에 황제 직속 기사단은 초토화가 되었다. 죽인다며 칼을 빼드는 기사와 자기가 죽는다며 바닥에 뒹구는 동료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그는 가발을 벗었다.

루이카엔의 머리에서 떨어지자 마자 그것은 본래의 칙칙하고 짧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야, 이거 신통하네. 그나저나 로웬 백작님, 한가하신가? 이런 거나 만들고."

"황실에서 주는 월급 받고 하는 일이라곤 연구밖에 없으니 그렇겠지. 가끔 가다 사고도 한 번씩 쳐 주시고."

아델레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 말에 일동은 모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가 실험하다 생긴 사고들은 전부다 어마어마해서 항상 그 수습에 진땀을 흘려 왔던 그들이었다.

"그나저나 아시엘. 그만 멍 때리고 따라 와."

"네?"

아시엘은 그녀의 부름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한 소년의 얼굴에 쯧, 하고 혀를 찬 아델레트는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 다시 상자를 정리해 들었다.

"왜요?"

"파티장에 여자 아이 복장을 하고 가야 하잖아. 여자로서의 기본적인 행동과 예의를 미리 익혀두지 않으면 금방 의심 살 걸?"

꽤 일리가 있는 말에 아시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나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괜히 들켜서 여장하고 파티에 참석하는 변태 기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쩐지 자포자기 한 듯한 그 뒷모습에 루이카엔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시간이 흐르고, 단거리 파견에 나갔던 이들이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몬스터 퇴치에 동원되었던 케빈도 녹색 피를 덕지덕지 묻힌 채 생활관에 들어섰고 좀도둑을 체포하러 나갔던 제르닌과 카이스도 돌아왔다.

그들은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아델레트한테 숙녀 수업을 받으러 올라갔다고?"

샤워를 하고 나온 케빈이 젖은 머리를 털며 어이없이 웃었다.

"그녀석 순순히 그러겠다고 한거야?"

"그럴리가! 난리도 아니었다고."

제르닌의 물음에 그 최대 피해자였던 오스카가 펄쩍 뛰며 기겁했다. 그 옆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던 슌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조용하던데. 난 좀 더 노발대발 할 줄 알았거든."

"넌 정신이 있냐? 마법 시전하려고 했던 거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동료가 그에게 핀잔을 줬지만 슌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카이스는 시엘이 올라갔다는 2층을 올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축제 때 이후로는 절대로 안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쨌든 뭘 기대하시건 상상 이상일 겁니다."

"뭐? 그렇게 예뻐?"

순간적으로 그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카이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일 파티장에 그런 모습으로 데리고 갈 거라면, 잘 지키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명령이건 뭐건 제가 바로 끌고 나갈 거니까요."

"...."

협박조의 강한 어투에 일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때, 윗층에서 부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싫어요! 이러고 어떻게 내려가란 말이에요!"

"괜찮다니까? 그리고 어차피 내일은 파티장에 가야 하잖아. 하이힐 신고 비틀거리지 않으려면 충분히 걸어 봐야 해."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맹렬하게 반항하는 아시엘과, 마찬가지로 좀처럼은 듣기 힘든 아델레트의 살살 구슬리는 목소리였다.

꿀꺽. 방금의 대화로 모든 상황을 파악한 기사들은 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카이스의 말을 직접 확인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먼저 계단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델레트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손아귀에 손목이 붙들려 아시엘이 질질 끌려 계단을 내려왔다.

기사들은 모두 입을 헤 벌렸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서 차마 눈을 뗄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멍청하게올려다 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예쁘다, 란 말로는 한참 모자랐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생각조차 못 할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하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난 붉은 미니 드레스에, 코르셋으로 조였는지 안 그래도 얇던 허리가 더더욱 가늘어 보였다. 거기다 그 특유의 화사한 금발이 살짝 웨이브가 진 채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머리에는 예쁜 보석이 박힌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고 목에는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붉은 루비 목걸이. 거기다가 짧은 치마 아래로 내려온, 각선미 진 하얀 다리까지. 정말로 영락없는 열 너덧 살 쯤의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뭐요, 뭐! 뭘봐!"

그 시선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던지 아시엘은 드레스를 가다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마저도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야.. 진짜 넌 남자로 태어 난 게 통탄할 일이다."

얼이 빠져버린 기사들을 대표해서, 루이카엔이 중얼거렸다. 아델레트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내 말이, 는 또 뭐에요!"

아시엘이 얼굴을 더더욱 붉히며 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꿈쩍도 안 했다. 아델레트는 그의 어깨를 살짝 떠밀었다.

"자, 마저 내려가 봐. 높은 굽에 익숙해 져야지."

"끄응.."

아시엘은 불만에 가득 찬 소리를 내면서도 조심 조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위태로워 보이는 움직임에 그들 모두는 일제히 몸을 긴장시켰다.

또각, 또각.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잠시 황홀하게 바라보던 케빈은 문득 든 한 생각에 입을 열였다.

"잠깐. 내일 저러고 파티장에 가야 한다고?"

순간 남자들 사이에서 차가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공기가 변하자 아시엘은 땅을 노려보던 고개를 들고 표정이 차차 굳어가는 선배들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안돼! 안돼! 절대로 못 가!"

그 때. 어느 한 구석에서 괴성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마치 전염병이라도 되는 것 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퍼지더니 결국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외치기 시작했다.

"변태 귀족 눈에 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 돼!"

"절대로 안 됩니다! 남자들이 추근거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왈! 와우우우-"

거기다 늑대로 변해 있던 베르칸과 벨킨까지 마구 짖기 시작하자 내부는 곧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아시엘은 더 이상 태클 거는 것도 포기하고 소파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하아.."

아델레트 역시 뒷목을 잡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 대충 예상은 했었다.

"안돼!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외간 남자랑 사귀는 건 절대로 안 돼!"

라고 외치는 케빈이라거나. 한구석에서 조용하게 동조하며 노려보고 있는 제르닌과 카이스라거나.

"무리라고. 그냥 살짝 사교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엔 너무 화려하단 말이야!"

나름의 논리를 들이대며 반박하는 루이카엔, 그리고 우우-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기사들 역시.

아델레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조용히 해!! "

하지만 소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막판에는 설움이 북받친 아시엘이 마법을 시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서야 조용해 진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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