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3. 소년, 소녀로(3)
셀레니스 생활관이 아우성에 휩싸여 있을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별궁은 파티 준비로 분주했다.
수많은 하녀들이 반질반질한 복도를 미끌거릴 정도로 닦고, 커텐을 바꾸어 달고 홀을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넓은 복도에, 갑자기 검은 연기가 허공에서 피어나더니 한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하녀들은 놀란 듯 흠칫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 곳에서 혀를 잘못 놀렸다간 바로 죽음이었다. 그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입을 꾹 다무는 것이 곧 답이었다.
남자는 그들의 그런 반응에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 흑발을 쓸어 넘겼다.
"쳇. 너희들 너무 쫄아 있는 거 아니야? 적어도 놀라기라도 해야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이지."
"....."
송구하다는 듯 머리만 조아리는 하녀들을 보며 흑발의 남자는 더욱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리 크게 신경쓰이는 것은 아닌지 곧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다른 녀석들은 어디에 있는지 아나? 재미있는 뉴스가 있는데."
"아.. 에스테반 님은 외출하셨고, 녹스 님께선 슈베이만 전하와 함께 계십니다."
하녀 하나가 더듬거리며 고하자 흑발의 남자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나 참. 그 꼬맹이 녀석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네가 걱정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
그 때, 갑자기 뒤쪽에서 중저음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발의 남자- 아울-은 얼굴을 반사적으로 소리를 빽 지르며 몸을 홱 돌렸다.
"남이사 걱정을 하던지 말던지!"
그 곳에는 두 명의 남자와 한 아이가 서 있었다. 두 남자 중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에메랄드 빛 머리의 남자의 손을 꼭 붙들고 서 있던 작은 남자아이는, 아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후다닥 달려갔다.
"아울!"
꼬마아이가 다리에 매달리자 아울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를 안아 올렸다.
"네 애비한테나 붙어 있지 도대체 나같은 게 뭐가 좋다는 거냐?"
"헤헷!"
귀엽게 미소짓는 소년, 디안의 연둣빛 머리칼을 두어 번 쓰다듬어 준 그는 다시 두 남자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나저나 녹스!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 그리고 슈베이만, 너도 내 계약자 주제에 딴 마족이랑 놀지 말라고!"
에메랄드 빛 머리칼의 중년 남자, 그리고 이 나라의 대공이기도 한 슈베이만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설마 위대한 대마족께서 삐친 겁니까?"
"도대체 어딜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하여간 네놈도 제정신이 아니야."
아울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슈베이만의 옆에 있던 키 큰 남자, 녹스가 외알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텐데, 아울. 네 '실험작' 을 알아차린 꼬마를 살피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오오! 맞아. "
아울은 곧바로 표정을 바꿔 싱글거리기 시작했다. 꽤 즐거워보이는 기색에 슈베이만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글쎄, 아마 네 입장에선 나쁘진 않을 걸. 이런 데서 얘기하긴 좀 뭐 하니까 네 집무실로 들어가지.... 아, 아니다. 그냥 말 안 할래."
갑자기 그거 말을 바꾸자 녹스는 불쾌한 듯 그 새하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네놈의 변덕에 장난 맞춰주기엔 지난 11년이 너무 지루했다."
"아아- 걱정 마. 내일이면 알 수 있을 거니까."
아울은 싱글벙글 웃으며 품에 있는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디안은 쿡쿡 웃으며 어깨 아래로 내려온 아울의 흑발을 장난스레 잡아당겼다.
"아프다, 꼬맹아. 어쨌든, 그.. 셀레니스 기사단이라고 했지? 그 새하얀 강아지들. 슈베이만, 너랑 징글맞도록 닮은 네 동생 녀석의 개 말이야."
"그렇게 닮지 않았습니다."
슈베이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러자 아울의 입자에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대공은 살짝 몸을 긴장시켰다. 지금 저 마족의 품에는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안겨 있었다. 혹시라도 아울이 더 흥분한다면 그 작은 몸을 짜부러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계속해서 싱글거릴 뿐이었다.
"역시. 아, 내일 파티가 기대되는군."
아울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투로 말하며 디안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아쉬운 듯 그를 올려다 보다, 이내 쪼르르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녹스는 아, 하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난 루아 이클립스 생활관에 가 보겠다. 내 계약자가 얼마만큼 '적응'했는지 봐야겠어."
"그러십시오. 아, 그리고 새로운 '계약자' 가 될 수 있는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그 애도 살펴 봐주시길."
녹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곧 검은 연기와 함께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아울은 잠시 그 자리를 맴도는 검은 마력덩어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계에서 마력을 쓰면 저 연기가 남으니까, 흔적이 너무 심해. 불편하다고."
"그렇다면 그걸 없애는 방법을 연구해 보심이. 겨우 그 정도는 쉬울 텐데요."
슈베이만이 느긋하게 말하자 아울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비아냥거리는 거냐? 겨우 꼬맹이한테 실험을 방해당했다고."
"오해는 마십시오. 전 그저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만."
슈베이만은 여전히 여유롭게 말하며 아울을 응시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흑발의 마족, 아울이었다.
"항상 그렇지만, 네놈의 머릿속은 이해를 못 하겠어. 인간 주제에 뭐가 그리 생각이 많아? 대마족을 셋이나 소환해 놓고 11년 동안이나 대기하는 것도 이상하고."
"때를 기다렸던 거지요. 내가 충분히 강력해져 친애하는 내 동생의 입지를 흔들어 놓을 수 있을 때를요."
아울은 콧방귀를 흥, 뀌고는 아무 말도 없이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슈베이만은 그가 떠난 후에 그 자리에 남아 떠도는 연기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파티, 라..'
슈베이만은 내일 있을 거래를 생각하고, 또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매와 같은 눈을 가진 세튼의 황제를. 자신을 향한 혐오를 조금은 지웠을까, 하고 생각하던 그는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 처럼. 그 역시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그것은 태어날 때 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그가 황제의 술기운에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을 때 부터, 라이펜이 황제가 사랑하는 황후에게서 태어났을 때 부터. 그리고 두 사람 다 황금빛 눈동자에 에메랄드 머리칼을 지니고 세상에 나왔을 때 부터.
"그러니까, 남자를 조심해야 된다고."
루이카엔은 손짓까지 해 가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그 앞에는 여전히 드레스 차림인 아시엘이 멀뚱멀뚱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일 파티에는 어떻게 해서든 참석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는 불안하다. 이에 만장일치로 아시엘에게 주의 사항을 불어넣기로 한 그들이었다.
"세상에는 변태들이 많아! 솔직히 너 정도 되는 얼굴이라면 남자라도 마다 않겠단 놈들도 많을 거야.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우리가 옆에 딱 붙어 있을 거지만 그래도 아무나 따라가면...."
"잠깐만요."
카이스는 살짝 손을 들며 루이카엔의 말을 끊었다.
"솔직히 저 녀석, 남자들이 추근거린다고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니잖습니까. 때려 눕힌다면 모를까.."
"그렇긴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곤란해.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올 테니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일이 커져. 그러니까 곤란해지면 바로 우리한테 오고."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루이카엔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 파티에는 거물들이 대거 참석할 거야.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도 섞여 있겠지. 그러니까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해. 주먹질 하려면 상대를 잘 봐 가면서, 되도록이면 사람 없는 곳에서. 알겠지?"
아시엘은 다시 한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드마스터에 대마법사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문득 아까 본성으로 가는 길의 그 시선이 떠올랐다. 그 사람도 대마법사나 소드마스터 중 한 사람일까.
갑자기 아시엘이 말이 없어지자 그들은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했다.
"아시엘?"
"아, 네?"
자신을 부르는 루이카엔의 목소리에 아시엘은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아무것도."
루이카엔의 물음에 아시엘은 미소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까의 일이 떠오르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참! 아까 폐하께서 전하라고 한 게 있었는데."
"뭐?"
"임무요."
그의 말에 일동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아시엘은 사뭇 경쾌하게 아까 황제가 한 말을 차근차근 정리해 말해 갔지만 머릿속은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때는 꼭 정체를 밝혀 내겠다, 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카이스가 자신을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