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4. 밤의 무도회(1)
아시엘이 그리도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파티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아델레트는 조금 이른 오후부터 아시엘을 자신의 방으로 끌고 들어가 꽃단장 시키는 중이었다.
"저기, 선배..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아시엘은 귀 아래로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머리장식을 만지작거리며 꺼림직하게 말했다. 지금 그의 머리는 예의 그 가발로 인해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아델레트는 그 쓸데없이 생생한 가짜머리를 뒤에서 매만지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짧게 대꾸한 그녀는 다시 심도를 기울여 아시엘의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에휴. 자포자기의 한숨을 내쉰 아시엘은 몸에 힘을 빼고 눈앞의 거울을 응시했다.
투명한 유리거울 너머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빨간 입술과 하얀 피부가 매혹적인 소녀.
어쩐지 머릿속을 무언가가 쿡쿡 쑤시는 것 같아 아시엘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항상 악몽을 꾸고 난 다음날과 비슷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어왔다.
"왜 그래? 속이라도 안 좋은 거야?"
"아뇨. 그냥. 아 참!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머리를 길렀었어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녀가 걱정스레 물어오자 아시엘은 사뭇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다행히도 아델레트는 새로운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래?"
"네. 홧김에 잘라버리기 전까지는 꽤 병적으로 머리 기르는 데 집착했죠."
"흠.."
아델레트는 흘러내리는 양쪽 옆머리를 땋은 것을 가운데에 핀으로 고정시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잘랐는데? 애지중지 길러놓고."
"아~ 그냥 조금 열 받는 일이 있어서요. 단도로 썩둑 잘라버렸어요."
"하아.. 참 답다고 해야 할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자 아시엘은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도 똑같은 말을 하더라구요."
"그럴 만도 하지... 자, 됐다."
머리 손질을 끝냈는지 아델레트는 손을 탁, 털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 장식장에서 전날 걸었던 것 보다 더 화려한 붉은 루비 목걸이를 꺼내 그의 목에 걸었다.
"마지막으로, 이거."
그리고는 조그만 금반지 하나를 꺼내 아시엘의 가느다란 약지에 끼워 주고, 또 다른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엥? 이게 뭐에요?"
"벌레 쫒기용. 그리고 이걸 루이카엔에게 줘. 남자들이 들러붙으면 그 녀석 한테 가면 돼."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아시엘은 반짝이는 반지를 살폈다. 아델레트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고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문 밖으로 떠밀었다.
"자! 어서 나가. 나도 준비해야 하니까."
"네? 아.. 네."
아시엘은 얼떨결에 붉은 하이힐을 신고 반쯤 쫒겨나고 말았다. 콰앙! 하고 눈앞에서 그녀가 문을 닫아버리자 그는 몸을 움찔했다.
"너무하시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한동안 그 앞에서 맴돌던 아시엘은 안쪽에서 아델레트가 안 가?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로비에는 멋들어지게 파티복을 차려입은 루이카엔이 주섬주섬 회중시계를 챙겨넣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오랜만에 인간 모습인 채 마찬가지로 한껏 멋을 부린 벨킨과 베르칸 쌍둥이 그리고 케빈이 있었다.
아시엘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또각, 또각 소리가 거슬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선배들! 꽤 멋있는데요?"
"음.. 아..."
고개를 돌리며 아시엘, 이라고 부를 작정이었던 루이카엔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케빈과 늑대 쌍둥이 역시 마찬가지. 아시엘은 입을 떡 벌리고 망부석이 되어 버린 선배들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뗐을 때,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고 휙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변태같은 눈으로 제 친구 빤히 쳐다보지 마십시오. 닳습니다."
아시엘의 앞을 가로막고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이는 카이스였다.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린 아시엘은 그의 등을 칭찬하듯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뻘쭘하게 표정을 가다듬는 루이카엔에게 다가가 금반지를 건넸다.
"이건?"
"아델레트 선배가 루이카엔 씨한테 주래요. 벌레 쫒기 용이라나?"
아시엘은 그렇게 대꾸하며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루이카엔은 잠시 헐?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씨익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뭐, 간만에 보는 동생이랑 아버지를 놀래켜 주는 것도 괜찮겠네. 그래도 혹시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니까, 이건 주머니에 넣어 놓을게."
"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한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로 놀래켜요?"
"아니야, 아무것도! 뭐 어쨌든 귀찮은 것들이 추근거리면 나한테 와. 그리고 임무도 잊지 말고."
임무라는 말에 그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거, 정말 저보고 하란 말이에요?"
"응. 너도 알다시피 우리 기사단은 전원 얼굴이 알려져있어. 카이스도 메르티스 백작가의 일원이니 아는 사람 한둘 쯤은 있겠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가 아시엘에게 맡긴 임무는 황제가 말했던 거래 훼방이었다. 어차피 체포도 못할 거 그냥 잘 지켜보다 방해만 하라는 것이었다.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는 아시엘의 머리를 헝클어지지 않게 조심 조심 쓰다듬었다.
"우리 예쁜이, 잘 부탁한다?"
"내가 전에도 말했다시피 남자한테 예쁘단 말은 칭찬이 아니거든요?"
아시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피했다. 그러자 루이카엔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아시엘의 머리장식을 정리해 주었다.
"대공 전하, 준비하실 시간이옵니다."
반쯤 수면에 잠겨 있던 슈베이만은 밖에서 들려오는 하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꾼 것 같았다.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였던, 검은 생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가 망가뜨려 놓은 화려한 금발의 미친 여자.
한 여자는 그를 뿌리치고 저승으로 도망쳐 버렸고, 또 다른 여자는 간절한 소원 하나 때문에 스스로 미쳐 날뛰다 자신의 고향을 피바다로 만들어 놓고 죽었다.
"하!"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린 그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그때 다시 하녀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알았어."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슈베이만은 밖을 향해 말했다.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오늘은 나의 새로운 전력을 공개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