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6. 밤의 무도회(3)
제국의 최 정점인 두 사람이 도착하자 파티는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인들은 독한 술과 온갖 과일, 요리를 날랐고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더더욱 경쾌해졌다.
아시엘은 함께 있던 루이카엔과 카이스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확인하고는, 살짝 그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그는 춤을 추는 사람들을 피해 홀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온갖 냄새와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머리가 다 띵할 지경이었다.
원래 아시엘은 시장처럼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는 편이었다. 하지만 역시 독한 향수를 뿌리고 휘양찬란한 보석들을 몸에 두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세상사 이야기를 하는, 이런 곳은 그에겐 조금 무리였다.
거래를 방해하러 사람들 속에 섞일 생각을 하니, 아시엘은 벌써부터 골이 아파왔다.
"하아."
관자놀이를 짚으며 천천히 걷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저기, 아가씨.."
아시엘은 몸을 살짝 틀어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그는 팔이 붙잡혀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에?"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라 아시엘은 그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몸을 홱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낯선 남자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서 있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말을 걸고 싶은데 아가씨께서 못 들으신 것 같아서.."
잠시 얼떨떨하게 남자를 바라보던 아시엘은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아가씨, 혹시 혼자 오셨습니까?"
아시엘은 조금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나이는 약 30대 초중반으로 보였고, 붉은 기가 도는 탐스러운 머리칼이 꽤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몸 전체에서 미미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시엘보다 낮은 서클의 마법사인 듯 했다.
"아니요, 일행과 함께 있었는데 잠시 떨어져 나왔어요."
아시엘은 이런 상황에 써먹으라며 아델레트가 가르쳐 준 최상의 답변을 했다. 물론 얼굴에 미소를 띠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는 저런! 그렇군요. 하고 조금 아쉬운 듯 우물거리다 다시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아가씨, 혹시 성함을 여쭈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전 리오넨. 루. 웨슬린이라고 합니다."
"웨슬린 백작님이시군요. 전.."
아시엘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실명을 밝힌다면 분명 곤란해 질 터였다.
"아, 아린이에요."
"아린 양! 얼굴 만큼 이름도 아름답군요. 성은 가르쳐 주시지 않을 건가요?"
그딴 거 없어, 미친놈아. 그리고 양도 아니거든. 아시엘은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것을 겨우 눌러담고 살짝 미소지었다.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아린 양처럼 아름다운 영애를 두었으니 아버님도 자랑스러우실 겁니다."
웨슬린 백작이 속사포로 쏟아내는 말에 아시엘은 정신이 멍해졌다. 하하, 하.. 하고 그가 어색하게 웃자 무슨 뜻으로 해석했는지 웨슬린 백작의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이 걸렸다.
"아, 제가 신기한 것 보여 드릴까요? 왠만해선 잘 안 하는 건데 아린 양께만 특별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신기한 거요?"
이 남자가 무엇을 할지 대충 예상은 되었지만 아시엘은 짐짓 모른 척 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백작은 더욱 더 신바람이 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네! 아주 신기한 것이지요. 분명 아린 양도 좋아하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그는 두 손으로 수인을 맻고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조금 지루한 표정으로 그가 장황하게 주문을 외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퀴넨 렌 테이란.."
1서클의 물 계열 마법인가. 아시엘은 속으로 그렇게 짐작하면서 백작의 손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의 예상이 맞았는지 손가락 끝에 물방울이 하나 둘 맻히고 있었다.
"아쿠아."
드디어 그가 시동어를 외치자 작은 물 덩어리가 둥실 공중에 떠올랐다. 백작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신기하죠!"
"네...에."
아시엘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백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은 마법사가 귀한 시대라 와! 마법사셨어요? 굉장하네요! 하는 대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4서클을 바라보고 있는 마검사 아시엘에게는 겨우 아이 장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백작이 이상하게 쳐다보며 묻자 아시엘은 난감해졌다.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의외의 곳에서 구원자가 나타났다.
"웨슬린 백작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 루이카엔 경."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루이카엔의 목소리가, 아시엘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루이카엔 씨!"
"오냐."
아시엘이 활짝 웃으며 그를 부르자 루이카엔도 씩 미소지으며 소년(?) 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 친밀한 모습에 웨슬린 백작은 뻣뻣하게 경직되고 말았다.
"루, 루이카엔 경. 그 영애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네에. 알다마다요."
루이카엔은 빙긋이 웃으며 아시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제 애인입니다."
"푸훕?!"
쿨럭! 아시엘은 먹은 것도 없이 사레가 들려 마른기침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럴수록 루이카엔은 그를 더더욱 가까이 끌어당길 뿐이었다.
웨슬린 백작의 얼굴은 더더욱 사색이 되어 갔다.
"하, 하지만.. 그러기엔 나이 차이가.. 그리고 경, 저번에 데려온 여자는 딴 사람이었잖습니까?"
"방금까지 여자한테 집적이고 있던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루이카엔은 입가에 더욱 짙은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백작은 당황한 눈으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루이카엔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 말이오?"
"네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루이카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입술을 깨물며 큭-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무안함을 숨기듯 억지로 웃으며 아시엘 쪽으로 돌아섰다.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린 영애. 그럼 이만, 전 일이 있어서요."
서둘러 말을 끝낸 그는 아시엘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아시엘은 인상을 썼다.
"으웩. 남자한테 이랬다는 걸 알면 얼마나 후회할까요?"
"글쎄. 웨슬린 백작은 원래부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라. 그래도 머리 회전이 엄청나게 빨라. 우리 황제 파의 주축 중 한 명이지."
루이카엔은 아시엘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며 말했다. 그제야 몸이 자유로워진 그는 몸을 돌려 루이카엔을 올려다 보았다.
"구출해 주신 건 고마운데요, 루이카엔 씨. 왜 하필 애인이에요? 나중에 곤란해지면 어쩌려고."
"괜찮아, 괜찮아! 난 더이상 망가질 이미지도 없으니까. 그래서 아델레트가 나한테 네 기사역을 맞긴 거고."
그래도 납득이 안 되는지 아시엘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러다 나중에 장가 못가도 난 몰라요?"
"괜찮다니까. 그리고 어차피 가문의 후계자도 내가 아니라 동-"
가볍게 말을 이어가던 루이카엔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홀의 가운데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분위기가 바뀌자 아시엘은 의아해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이카엔 씨?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시엘, 내가 만날 사람이 있어서 먼저 가야겠다. 되도록이면 혼자 다니지 말고 곤란해지면 불러."
그렇게 말한 루이카엔은 아시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에, 에? 잠깐.."
아시엘은 당황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 그는 행동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루이카엔의 앞에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루이카엔과 닮은, 준수한 얼굴의 중년인. 그리고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찬가지로 꽤 잘 생긴 남성이 루이카엔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엘은 그 중년인이 카시마엘 후작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루이카엔이 살짝 웃으며 읊조렸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