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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70화 (7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69. 화려하고, 밝고, 어두운(3)

아시엘은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황자와의 대화 이후 기분이 언짢아졌다. 평소에야 남이 무시를 하든, 깔보든 그냥 미소지으며 넘기는 그였지만 아무래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듯 한 태도는 참기 어려웠다.

"하아-."

어느 정도 사람들 속에 섞여들자, 아시엘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어쨌든 지금은 아까 놓쳤던 수상한 남자를 찾을 때였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그는 눈을 살풋 감고 닫아뒀던 청력을 활짝 열었다.

파티장의 모든 소리가, 그의 귀에 흘러들기 시작했다. 술 취한 이들의 주정과 홀 구석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속삭임, 와인이 잔에 담기는 소리와 부인들의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악기의 현과 연주자가 움직이는 활의 마찰음까지.

아시엘은 정신을 최대한으로 집중하며 소음 하나하나를 머릿속에서 구분하려 애썼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과 다르지 않소!]

[그러니까, 그냥 작은 일 하나만 해 주면 된다고. 그럼 돈을 2배로 주지.]

그가 원하던 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엘은 눈을 살짝 떴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몰려왔다.

"윽!"

눈앞이 아찔해지며 몸이 휘청거렸지만 아시엘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섰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어지럼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린 그는 어느 정도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스쳐지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살피며 걷던 그는 곧 찾고 있던 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발을 멈췄다.

'저 자는 분명..'

아까 보았던 수상한 남자와 함께 있는 이를 본 아시엘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대공이 들어올 때 뒤를 따르던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수려한 외모의,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 흑발에 흑안은 보기 드물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이 그들은 아시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두 사람은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시엘은 주위를 살피다 시종에게 적당히 술잔 하나를 받아들고 두 사람의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 그런 일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안 한다면, 이 마약 거래 증서를 황제에게 갖다 바치지 뭐. 난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그 남자가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흑발의 미남자는  방금 건네받은 종이 뭉치를 살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런 일?'

아시엘은 더더욱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거의 애걸하는 목소리로 아울에게 매달렸다.

"이, 이번 거래도 전 억지로 응했을 뿐입니다. 마약 같은 물건에 손을 대고 싶진 않았단 말입니다."

"호오,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도 늦었다고, 게르만."

흑발의 남자는 빙글거리며 덜덜 떨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잠깐의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결국 게르만이라 불린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 습니다. 대신 대금은 확실하게 지불해 주셔야 합니다."

"고럼 고럼! 자, 이거 받아."

흑발의 남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게르만에게 건넸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은 아시엘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겉모양을 볼 수 없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쥔 남자의 손 모양을 보아서, 구체의 무언가가 손수건에 숨겨져 있는 듯 했다. 게르만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볼 일은 없다는 듯 몸을 홱 돌려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나갔다.

'...어쩌지?'

아시엘은 갈등했다. 저 흑발의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마약 거래 증서를 빼돌릴 것인가, 게르만이란 이가 건네받은 물건을 먼저 알아낼 것인가.

거래 증서가 주 목표였긴 하지만 그 물건도 신경쓰여서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몸을 돌려 게르만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품 안에 있는 물건이 불안했던지, 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홀 내 대부분의 사람이 술에 취해 있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살피던 아시엘은 시종이 건넨 칵테일 한 잔을 비웠다. 몸에 살짝 취기가 돌자 컨디션이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었다. 그는 게르만이 출구의 사람이 없는 곳에 다다른 것을 확인하고는, 행동을 개시했다.

잠시 주변을 살핀 아시엘은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속도를 높여서- 막판에는 하이힐을 신은 채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게르만에게 돌진했다.

"어, 어어?"

게르만이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자만, 곧이어- 퍼억! 하고 성대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은 장면으로 격돌했다.

철푸덕. 바닥으로 넘어진 아시엘은 둔탁한 통증에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곧 비틀비틀 일어나 마찬가지로 꼴사납게 쓰러져 있는 게르만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죄책감이 잔뜩 묻은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게르만은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괘, 괜찮소! 신경쓰지 마시오."

"하지만.."

아시엘은 두 손을 모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게르만은 다시 한 번 괜찮다고 내뱉고는 그를 밀치고 허둥지둥 파티장을 나가 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아시엘은 그가 시야에서 벗어나자 마자 얼굴에 가득 담았던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는 어느 새 손에 쥐여져 있는 손수건 뭉치를 내려다 보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아시엘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큰 소리 때문에 몇몇이 돌아보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를 유심히 살피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아시엘은 아직도 아픈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자연스럽게 걸어간 후, 아무도 모르게 커텐 뒤로 몸을 숨겼다.

"후-"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그는 신중하게 감싸인 손수건을 벗겨냈다.  그리고 아시엘은- 흡,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주먹보다 조금 작은 구슬이었다. 짙은 보랏빛을 띠고 그 안쪽에는 시커먼 연기가 출렁거리는, 낯익은 물건.

"이게 왜..?"

경악스러움에 아시엘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구슬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 역시 지난번 경비대에서 찾아낸 것과 비슷하게 불쾌했다. 아마 손수건이 항마석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 구슬이 드러나는 면적이 넓어질수록 마력 역시 강렬하게 느껴졌다.

"..월척이네."

한참을 경직되어 서 있던 아시엘은 겨우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역시. 그때의 환영은, 대공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었던 거다.'

아시엘은 조심 조심 그것을 다시 수건으로 감쌌다. 돌아가면 저번에 발견되어 자신의 서랍에 봉인해 둔 것과 함께 조사해 볼 요량이었다.

품 속에 그것을 숨긴 아시엘은 커텐 밖으로 살짝 나와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혼자서 멀뚱히 서 있는 케빈을 발견한 그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선배."

"응? 어- 아시엘."

마침 심심하던 차였는지 케빈은 아시엘을 보고 반색을 했다. 하지만 곧 후배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어?"

"저 좀 도와주세요."

뭘? 하고 묻는 케빈에게 아시엘은 손수건에 감싸인 구슬을 건넸다. 케빈은 의아해 하면서 그것을 받아들고 수건을 벗겼다. 그리고 곧 경악하며 아시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것을 알아 본 것이었다.

"야, 이거-"

그가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얼른 손수건으로 도로 감추자, 아시엘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부터 이것의 제공자를 찾을 거에요. 어쩌면 제작자까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뭐어?"

케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큰 소리를 냈다. 아시엘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게요. 선배는 출구쪽을 잘 지켜 봐 주세요. 거래가 끝났으니 조만간 나가려 할 지도 모르니까.. 전 사람들 틈에서 그 남자를 찾아볼게요."

"누굴 찾으라는 거야?"

아시엘은 간략하게 흑발의 남자의 외모를 설명했다. 눈에 확 뜨이니 쉽게 찾을 거라는 말도.

"아까 대공 전하가 들어올 때 함께 왔던 이에요."

"어. 아까 봤어.. 그 놈이란 말이지."

케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시엘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해요."

"알았어. 너도 조심해."

아시엘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홀의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어디에 있을까. 그는 주의 깊게 사람 한 명 한 명을 살폈다. 하지만 번쩍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한 남자를 찾는 것은 어려울 듯 했다. 게다가 찾아도 그 뒤에 어떻게 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소매치기 같은 방법이 통할 것 같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면 충돌하는 것 역시 좋은 방법은 아닌 듯 했다.

"어떻게 하지."

속으로 혀를 차며, 아시엘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때- 갑자기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를?"

".....!"

순간 아시엘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피가 차갑게 식은 듯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그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는 순간.

아시엘의 의식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아시엘이 간 후, 계속해서 출구를 지켜보던 케빈은 멀찍이서 보이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시엘?"

남자를 찾겠다며 안쪽으로 들어간 지 15분쯤 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시엘이 키가 큰 녹색 머리 남자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뭐야, 저 녀석."

슬그머니 불길한 예감이 들어, 케빈은 출구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의 뒤를 따르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갑자기 그는 누군가에게 어깨를 잡혔다.

"엥?"

케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그의 어깨를 잡은 채로 싱긋 웃고 있는 슌이 있었다.

"뭐야? 왜 그래?"

"내가 따라가 볼게. 넌 여기서 지키고나 있어."

언제나처럼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케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슌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어개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고는, 곧바로 아시엘을 뒤따라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케빈은 문득 떠오른 사실에 혼자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아시엘이 말했나?"

뭐 어때. 하지만 그는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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