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76화 (7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73. 그의 이야기 (3)

'넌 누구지?'

훌쩍 자란 큰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꾀죄죄한 옷에,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의 소년은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당신이 던져두고 간 돌.'

십여 년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후작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고, 후계자가 될 아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그의 조부는 세상을 뜬지 오래. 전대의 카시마엘 후작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이었던 현 후작은 큰 갈등 없이 소년을 받아들였다.

호화로운 방 하나를 내어 주고, 그는 루이카엔에게 글과 검을 가르쳤다. 좋은 옷을 입히고, 도련님이라 불리우며  모자람 없이 살도록 했다. 하지만 루이카엔이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항상 어머니가 보내왔던 연민과 한탄의 눈이 아니라 애정 어린 손길을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은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대했다. 새어머니가 될 후작부인은 좋은 사람처럼 보였으나 항상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남편과 천한 하녀 사이에서 난 아이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는 외로워졌다. 여리고 여리던 어머니와 빈민가에서 살아갈 때보다 더욱 더.

"내가 원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루이카엔은 몽롱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딱히 뭘 기대했던 것도 아니야. 그래- 날 받아들여 주고 이렇게 대우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로 여겨야만 했지. 하!"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린 그는 손을 올려 갈색 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항상 날 죄인으로 키웠던 어머니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어. 난 버려져도 마땅한 죄의 부산물이 아니라.. 그냥.."

그저,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줬으면 했어.

루이카엔은 술을 홀짝이며 그렇게 덧붙였다. 그런 단장을, 아시엘은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조금 흐릿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작은 희망이 있었다면 바로 3살배기 동생, 케이르였다. 처음에는 후작과 후작 부인을 원망하는 마음에 일부러 떼어 놓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작은 손과, 통통한 볼에 머금어진 미소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어린아이다운 순수함. 그것이 외로움에 매말라갔던 루이카엔의 마음에 촉촉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퉁명스럽게 대하면서도 그는 점차 케이르를 살갑게 챙겨주기 시작했고, 작은 동생 역시 형을 잘 따랐다.

지옥같던 날에 비춰왔던 한 줄기의 빛이었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의지해 온 사람이었고, 필요로 해 준 아이였다. 하지만 겨우 1년. 그것이 다였다.

어느 날- 받아주기만 하고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카시마엘 후작이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같은 성에 있으면서도 몇 개월만에 맞대면하는 아버지의 차가운 눈동자에, 루이카엔은 다시 불안해졌다. 그의 거울같은 눈을 마주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못난 부분이 그대로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후작은 이렇게 말했다.

'검술에 재능이 있다고 들었다.'

무미건조한 그의 음성에 루이카엔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루카인 아카데미로 가라. 거기에서 기사 수업을 받고 돌아와 영지를 지키는 기사가 되어라.'

권유도, 설득도 아닌 명령이었다. 하지만 따르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그때의 루이카엔은 그저 사랑에 굶주린어린아이였을 뿐이니까.

그는 동생을 두고 아카데미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지내게 된 지 2년도 되지 않아, 후작 부인이 세상을 떴다는 전갈이 날아왔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날 아카데미로 보내게 한 것은 후작부인이었지. 케이르와 떨어뜨려놓기 위해서."

루이카엔은 과자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난 그때 후작가로 돌아가지 않았어. 아카데미에서 친구들과 교수님이랑 지내는 게 너무도 즐거웠거든. 케이르에겐 미안하지만 말이야.."

지금도 함께하고 있는 소중한 친구들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아카데미는 그에게 좋은 도피처였고, 보금자리였다.

그렇게 말하는 단장을 바라보며 아시엘은 헤실 웃었다.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히!"

"뭐, 그런 것도 있었고. 사실은 일종의 복수심 이었을지도 모르지. 당신이 날 맞이해주지 않았으니, 나 역시 당신을 배웅하지 않겠다. 뭐 이런?"

루이카엔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야, 안 가?'

본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에게 10대의 제르닌이 황당하게 물어왔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고개를 저으며 서신을 찢어버렸다.

소중한 친구들이었지만, 그는 자신과 자신의 집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르닌, 아델레트 그리고 케빈이 알고 있던 것은 단지 그가 후작가의 서자라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루이카엔이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닥 알리기 싫은 문제겠지, 하며 넘어가 주었다. 적어도 그들이 아카데미에서 봐 온 루이카엔은 때때로 사고도 치고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지만 절대로 경솔하지 않으면서도 움츠러들지 않는, 멋진 친구였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루이카엔은 당당하게 학년 수석을 차지했다. 그는 본가로 돌아와 후작가의 기사단을 이끌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차석인 아델레트, 그리고 시험에 따로이 시험에 합격한 제르닌, 케빈과 함께 셀레니스 기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입단 하자마자 엄청난 사건이 터졌었지.. 그게 벌써 11년 전이네."

"에?"

아시엘은 잔뜩 취한 듯 조금 꼬인 혀로 되물었다. 붉어진 얼굴로 쿠션을 안고 있는 그가 귀여웠던지 루이카엔은 피식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그건 일단 넘어가. 그래서 19살이었던가- 그 때 단장이었던 루이스 경이 갑자기 사라지고, 케빈이 엇나가고.. 난 거의 7년만에 본가를 찾았어."

첫째 아들이 제국 최고의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몇 년만에 나타났지만 후작은 여전히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왔나.' 라고 한 마디를 던졌을 뿐.

루이카엔은 웃으며 넘어갔다. 옛날이라면 잔뜩 상처받은 채 풀이 죽었을 테지만 그때는 달랐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고, 기사단에서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등을 돌려 훌쩍 자라버린 동생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전 후작 부인을 쏙 빼닮은 푸른 눈은 증오가 가득 차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후회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무관심한 아버지 아래에서 홀로 자랐을 아이가 가여웠다.

'꺼져! 왜 온거야!'

더이상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꼬마는 없었다. 그저 주는대로 먹고, 입히는 대로 입히고 가르치는 대로 따라하며 서서히 외로움을 증오로 바꾸어 간 작은 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그는 형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에 잠깐 함께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카엔은 아카데미로 떠나 버렸으니까.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있었고, 그 모습은 그에게서 치유받았던 루이카엔에게 비수가 되어 꽂혀왔다.

"뭐- 그렇게 된거야.. 내가 집에 들어가지는 않아도 내 성적이랑 소식은 다 전달되니까, 그녀석은 자기가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 나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말을 끝맻으며 루이카엔은 술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 뒤로 난 본가에 가지 않게 되었지. 후작부인이 세상을 떴을 때 나라도 케르를 챙겼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 때문에 복잡했거든."

아시엘은 몽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 말투와는 달리, 단장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루이카엔은 아시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자 조금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때, 갑자기 아시엘은 두 팔을 뻗어 와락 루이카엔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 아시엘?"

그는 당황한 루이카엔을 자신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취기 때문에 새빨개진 얼굴로 툴툴거렸다.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에요."

"어?"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그 미소에, 루이카엔은 정신이 멍해졌다. 새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참 묘한 얼굴이라고 떠올렸다. 아시엘의 미소는 그 어느 것보다도 순수하고 깨끗했다. 하지만 또 그만큼 어른스러웠다.

"루이카엔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

다시 한 번 더 그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웃자 루이카엔 역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소년의 금발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 말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가 쫒겨나 거지처럼 살아간 것도, 배다른 동생이 엇나간 것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단장이 되어 능력을 증명했다. 많은 동료들의 신뢰를 받고 또 신뢰를 할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슴 한 켠의 짐을 떨쳐 낼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족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아시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스륵, 하고 루이카엔의 볼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작은 몸은 앞으로 기울어졌다.

"야! 아시엘?"

루이카엔은 황급히 그를 부둥켜안았다. 술이 이미 한계에 달했던 듯, 아시엘은 그의 품 안에서 쿨쿨 잠이 들어 있었다.

황당해져 어이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루이카엔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혹시나 깨울까 봐 크게 웃지도 못하고 그는 속으로 쿡쿡거리기 시작했다.

"하!"

웃긴 녀석. 루이카엔은 입가의 미소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고, 입에서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게 그는 잠든 아시엘을 껴안고 한참을 웃었다. 술 때문인지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웃음은 주체할 수 없이 나오는데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소중한 동생의 증오에 찬 시선이 다시금 떠올랐다. 자신이 돌봐주지 못해서 변해버린.

"하.. 하하하하.. 이 녀석, 위로도 잘 하잖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 하나가 조금씩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결국 그는 물기가 섞인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단순히 '네 탓이 아니다' 이 한 마디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동요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루이카엔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시엘의 가장 큰 힘 중 하나였다. 한 치의 거짓도 위선도 없이 진심을 담아 상대방을 대하는 것. 비록 자신의 사정이나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타인에 대한 마음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고마워."

루이카엔은 한번 더 그렇게 중얼거렸다. 밤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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