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76. 마탑(4)
그 남자- 캐롤 교수는 잠시 멍하게 두 눈을 꿈뻑이기만 하더니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성큼성큼 아시엘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꽈악 붙들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에 왔어?"
"아, 그.. 조금 부탁이 있어서요.. 아니, 그것보다 그만 좀 흔들어 주실래요?"
그제야 손을 거둔 교수는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옛 제자의 옆에 앉아 있는 제르닌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시엘, 같이 오신 분은?"
"그러니까 부탁이 있어서 왔다고 했잖아요. 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캐롤은 응접실의 한구석에 놓인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시엘과 제르닌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 잠깐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인데? 저 분은 누구시고?"
"그 전에. 누가 엿들을 사람은 없죠?"
"뭐?"
아시엘의 물음에 캐롤 교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곧 눈을 살짝 감고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아이솔레이션."
순간 미풍이 일며 그들의 머리칼을 작게 흔들었다. 그리고 투명한 마력의 벽이 응접실을 부드럽게 감쌌다. 캐롤 교수는 다시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고위 음파 차단 마법이야. 원래 응접실 자체에도 사일런스 마법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감사합니다."
아시엘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옆의 제르닌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교수님, 저희 기사단 선배님이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제르닌이라고 합니다."
제르닌은 고개를 작게 숙여보이며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캐롤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런 그와 아시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사단? 아시엘, 너 벌써 졸업했냐? 아니, 아니.. 그 전에 무슨 기사단?"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이요."
아시엘이 한글자씩 똑똑히 발음하면 할수록 교수의 입도 같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뭐야아아아아아?"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응접실에 울려퍼졌다.
캐롤 교수가 진정할 때 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만 틀어막고 있던 아시엘은 그가 잠잠해지자 손을 내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 자, 자, 잠깐만. 네가 그 기사단에 들어갔다는 거야? 황제 직속 기사단에?"
"네. 선배, 이 분은- 좀 시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5서클의 대마법사인 캐롤 교수님이세요.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들어오셨다가 졸업하기 2년 전에 나가셨지만요."
제르닌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조금 새로운 눈길로 캐롤 교수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루이카엔이나 제르닌보나 2, 3살쯤 더 들어 보이는 정도였다. 거기다 바다같은 푸른색 머리칼과, 그와 비슷한 눈동자 색깔. 거기다 투명한 피부에 아주 훌륭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 생각보다 젊어 보이시는군요."
"선배, 속지 마세요. 저거 환영 마법으로 얼굴을 바꾼 거니까. 실제 나이는 루이스 아저씨랑 비슷해요."
제르닌의 솔직한 감상에 아시엘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에 캐롤의 눈매가 조금 사나워졌지만 옆에 붙어 있는 제르닌 때문인지 소리 내어 화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루이스 그 자식은 잘 지내냐?"
"물론이죠."
"혹시라도 그놈 밑에서 지내는 게 싫어지면 말해. 내가 대신 아버지 해 줄 테니까."
캐롤 교수는 말투를 은근하게 바꾸며 말했다. 하지만 아시엘은 짖궂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싫어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전 이제 독립한 성인이니까."
"성인? 니가?"
캐롤은 헹,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르닌 역시 자신도 모르게 풋 하는 소리를 냈다가 아시엘의 사나운 눈길을 받고 웃음기를 싹 지워야만 했다.
아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품을 뒤져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더 이상의 잡담은 시간 낭비인 것 같으니까 그만두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요."
"엥? 이게 뭐냐?"
캐롤은 테이블에 올려진 꾸러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폈다. 아시엘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저랑 선배가 온 이유에요. 이걸 좀 조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캐롤 역시 얼굴을 살짝 굳혔다. 그는 그제야 두 사람이 기사단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제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게 뭔데 그러냐?"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셀레니스의 기사로서 의뢰하는 것입니다."
제르닌의 말에 캐롤은 꾸러미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 제국의 상황은 나도 잘 알고 있어. 당신들이황실 마법사에게 가지 않고 날 찾아온 걸 보아하니 정치적인 문제가 끼여 있는 물건이로군."
"맞아요. 임무지에서 찾아낸 것들인데 하나는 이상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다른 것도 아마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서.. 저희 힘으로는 무리라 교수님을 찾아뵌 거에요. 제가 아는 마법사 중에 가장 강하면서도 믿을 수 있으니까."
아시엘은 첫번째 구슬을 찾은 경비대 감옥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캐롤의 얼굴은 더더욱 딱딱하게 굳어 갔다.
"실체가 있는 환영에, 골렘? 내 생각엔 그것도 환영의 일부인 것 같은데. 아니,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길래, 그 많은 것들을 다 일으켰다고?"
경악한 얼굴로 그는 손에 들린 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아시엘은 조금 절박해진 목소리로 말을이었다.
"네. 그.. 조사하다 보면 교수님이 위험해지실 수도 있어요. 그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그래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음......"
캐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아시엘은 내심 조마조마해져 손으로 자신의 망토를 꼭 쥐었다. 교수는 그런 그를 힐끗 훔쳐보고는 다시 꾸러미를 보았다. 그는 쯧 짧게 혀를 차고 팔짱을 척 꼈다.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거냐? 이정도야 당연히 해 줄 수 있지.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고. 어쨌거나 아무도 모르게 조사하면 되는 거 아니야?"
"감사합니다!"
아시엘이 환하게 미소짓자 캐롤은 쑥쓰러움을 숨기듯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뭘 이정도 가지고. 고마운 줄 알면 좀 자주 찾아오기나 해.. 뭐, 이제 바빠서 그것도 무리이려나."
마지막 말을 거의 혼잣말처럼 끝맻은 그는 꾸러미를 챙겨 품 속에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 보기나 해. 나도 바쁜 몸이니까. 앞으로 네 덕분에 더 바빠지겠군."
"하하.. 죄송해요."
아시엘은 그를 따라 일어서며 쑥쓰럽게 사과했다. 캐롤은 괜찮다는 듯 한 손을 슥 들어보이고는 두 사람이 나갈 수 있도록 응접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시엘은 다시 한 번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후배의 뒤를 따라가던 제르닌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캐롤을 바라보았다.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감사드립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답례하겠습니다."
"아, 신경쓰지 마. 그런 걸 위해 돕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또 딱히 황제의 편을 들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캐롤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순간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 한 제르닌은 예? 하고 되물어야만 했다.
"하아.. 그러니까, 난 그냥 옛날에 꽤 아끼던 제자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라고. 당신, 제르닌 경이라고 했나."
"예."
느닷없는 물음에 제르닌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캐롤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르닌 경, 당신은 저 녀석의 부탁을 거절할 자신이 있어?"
적어도 난 없거든."
"아..."
"저 얼굴로 부탁받으면 왠지 거절하기 힘들만 말이지. 뭐, 이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캐롤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르닌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고는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고, 응접실 안에 혼자 남게 된 제르닌은 그대로 허공을 응시하며 서 있기만 했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이해는 됩니다."
이미 가버린 상대의 물음에 대답을 하며 그는 문을 힘껏 밀고 바깥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