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78. 대전회의(2)
"흐.. 속 쓰리다."
솨아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찬물을 맞으며 아시엘은 살짝 인상을 썼다. 어젯밤에 과음한 것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듯 속이 메스꺼웠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샤워기 아래에 갖다댔다. 차가운 물방울들이 그의 금발을 완전히 적셔 내려갔다. 잠시 그 상태로 멍하니 있던 아시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수도꼭지를 잠궜다. 너무 여유부리다간 늦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는 가져온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젖은 머리칼을 감싼 후 밖으로 나왔다.
제복으로 갈아입은 아시엘은 덜 말린 머리를 탈탈 털며 곧바로 로비로 내려갔다. 루이카엔은 그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5 경비대 사건 정리한 거. 정작 중요한 일들은 다 빠져버렸지만."
단장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받아 한 장씩 넘기며 훑어보았다. 확실히 살인 사건의 개요와 중요 사안만 나와 있을 뿐, 수상한 구슬이나 지하감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 참. 그리고 그건 일단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는걸로 해야 할 것 같아. 기사단 다른 녀석들한테도 비밀."
"그럼 지금 아는 사람은- 저랑 루이카엔 씨, 카이, 제르닌 선배랑 케빈 선배 뿐인가요?"
아시엘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종이를 덮었다. 루이카엔은 그에게 손가락 2개를 펴보였다.
"아니. 아델레트랑 폐하께선 알고 계시지.. 아, 그러고 보니 루이스 경께는 아직 안 알렸군."
"아, 네."
아시엘은 다시 종이를 펼쳐 하나하나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그 때 코트 단추를 잠그며 제르닌이 층계참에 나타났다.
"이번 기회에 제 5 경비대를 우리쪽 관할로 끌어당긴다. 그게 오늘의 주 목적이야."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요?"
그의 말에 아시엘은 회의적으로 되물었다. 그 질문에 제르닌 대신 루이카엔이 대답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대공 휘하에 두고. 내부의 주요 인물을 우리쪽 사람으로 임명하는 거지."
"에..?"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지 아시엘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좀 치사한 것 같지만 그렇네요."
"그렇지. 이정도로 말하긴 좀 뭣하지만 이런 것도 정치의 일부분이지."
루이카엔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엘이 떨떠름한 얼굴로 에..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제르닌은 혀를 쯧 찼다.
"이 정도로는 딱히 치사하다고 할 것도 없어. 온갖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곳이 바로 이 황궁이니까."
"그렇겠죠."
아시엘은 아까의 루이카엔을 따라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던듯 루이카엔 역시 장난스레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제르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닥거릴 시간 없어. 빨리 폐하의 집무실로 가야하는 거 아니었나?"
"아 참, 그렇지. 얼른 가봐. 다녀와서 보고해 주고."
루이카엔은 두 사람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두드려 주고는 집무실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돌렸다가, 아참 하고 다시 몸을 홱 돌렸다.
"아시엘 경의 정치계 첫 발을 축하해. 모처럼으 기회니까 윗분들에게 확실히 눈도장 찍고 와... 뭐, 만나면 꽤 곤란할 사람이 여럿 있긴 하겠지만."
"에?"
아시엘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듯 그저 웃으며 손을 슥 들어보일 뿐이었다.
"가 보면 알거야. 그럼 건투를 빈다고."
아시엘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곁에 선 제르닌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이마를짚고 서 있었다.
"선배?"
"저 자식이 정말.."
아시엘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제르닌은 유유자적 집무실로 들어가는 루이카엔을 향해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아시엘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째 굉장히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이번에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아..."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아시엘은 예를 차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의 시선은 먼저 와 있던 한 남자에게 꽂혀 있었다.
".....어떻게."
아시엘의 얼굴이 완전히 창백해졌다. 제르닌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무슨 일이냐 물으려는 찰나, 그 남자 역시 새롭게 집무실에 들어선 두 사람을- 정확히는 아시엘을 발견하고는 입을 쩌억 벌렸다.
"아린 양?"
"......"
반가움과 의아함 그리고 놀라움이 뒤섞인 그 남자- 웨슬린 백작의 말 한 마디에 제르닌은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백작과 아시엘을 번갈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황제를 아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굳이 집무실로 오라던 이유가-'
이거였군, 제르닌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여전히 창백해 진 채로 돌처럼 굳어버린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웨슬린 백작은 아시엘이 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속사포로 말을 쏟아붇기 시작했다.
"아린양!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머리카락도 자르셨군요! 예쁜 머리칼이었는데 조금 아깝네요.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
아시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피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루이카엔이 말했던 '만나면 곤란할 사람' 이 누구들인지 뼈져리게 느껴졌다. 차마 생각도 못 하고 있었지만 그는 파티에서 '아린양' 으로 여러 귀족들과 만났던 상태였다.
'아무도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아시엘은 속으로 그렇게 웅얼거리며 제르닌을 향해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런 그가 딱해보였는지, 제르닌은 결국 아시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죄송합니다만, 사람 잘 못 보신 듯 합니다."
"예? 하지만.."
백작은 그에게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제르닌은 뒤에서아시엘이 제발 어떻게 좀 해 달라는 것처럼 제복 옷자락을 꼭 쥐는 것이 느껴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아이는 셀레니스 기사단의 신입 기사로-"
"내 명령으로 파티장에 아린 양으로 나타난 거지."
라이펜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재빨리 끼어들었다. 순간 어마어마하게 살벌한 시선들이 꽂혀왔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그럼 역시 그때의 그 아린 양이 맞는 거네요!"
"......"
아시엘은 날카롭게 날이 선 눈으로 짖궂게 웃고 있는 자신의 주군을 노려보았다. 언젠가는 꼭 복수해 주겠어, 기사로서는 꽤나 불경한 말을 입 안에서 웅얼거린 그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제르닌의 등 뒤에서 나왔다.
"다시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 습니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아시엘 아르셰인이라고 합니다."
거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시엘은 힘겹게 인사를 마쳤다. 하지만 눈치 없는 웨슬린 백작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 한 술 더떠 그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아시엘은 소리 없이 질색하며 황급히 손을 뺐다. 하지만 그것조차 백작은 신경쓰이지 않는듯 환하게 웃었다.
"여리디 여린 소녀 분께서 기사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요즘엔 기사들도 전투력 외의 능력이 중요시되니까요."
소년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지자 라이펜은 터져나올 것 같은 웃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친구의 가여운 아들을 구해주기로 결심한 듯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봐, 웨슬린 백작. 듣지 못한 건가? 그 아이는 '아르셰인' 이라고."
"네, 저도 들었사옵...... 네, 네?!"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새삼 아시엘의 얼굴을 살폈다. 불쾌함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는 소녀, 아니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아르셰인이라면 그 루이스 아르셰인의 그..?"
"맞아. 그리고 이번에 내 절친인 그 녀석의 아들이 셀레니스 기사단에 들어왔지."
아들? 그 이질적인 단어가 곧바로 뇌에 입력이 되지 않아 백작은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딸..이 아니라? 아들?"
아시엘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 불만스러운 눈동자에 백작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음.."
"안녕하십니까. 아시엘 아르셰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성별은- 남자고. 물론 루이카엔씨의 연인도 아니에요."
아시엘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라도 잘못 들을까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웨슬린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 남자?? 남자라고?"
"아 참. 그리고 말이죠- 백작님. 선배 마법사로서 충고를 좀 해 드리자면. "
아시엘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주문 영창하는 연습 좀 더 하시는 게 좋겠어요.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네."
마법사? 백작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그가 정말이냐, 라고 묻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제르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짜로?"
"정확히 말하면 3서클의 마검사입니다."
제르닌이 덧붙이자, 그는 입을 쩍 벌리고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마.. 검사라고요? 저 어린 소년이?"
끄덕끄덕. 황제가 뿌듯하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두 분! 저 어린 소년이 만에 하나 마법과 검술 둘 다 소질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마법을 배우며 호신술 정도 익히신 건 마검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누구 앞에서 목청을 올리는 거지? 웨슬린 백작."
라이펜이 여전히 미소짓는 얼굴 그대로- 하지만 목소리만은 차갑게 주의를 주자, 웨슬린 백작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신 어린 시선은 아시엘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내가 설마 그 정도로 마검사라고 부르며 곁에 두겠어? 아무리 친우의 아들이라도 셀레니스 기사단이 되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하지마안.."
백작은 여전히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심한다면 황제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드는 셈이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는 백작을 보며 아시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으시던지 마시던지 알아서 하세요. 전 별로 상관 없으니까. 실제로도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야, 야."
꽤 진심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에 제르닌과 라이펜은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페이튼이 들어왔다.
"....? 이건 무슨 상황이온지 여쭈어도.."
그는 순간 방 안의 이상한 기류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숙련된 보좌관답게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전으로 드실 시간입니다. 네 분다 서둘러 주시길."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됬나?"
라이펜은 한쪽 벽에 걸려있는 화려한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느새 회의 시작 10분 전이 되어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수족들을 둘러보고는, 장난스럽게 씨익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그럼, 어디 어른들의 말싸움을 하러 가보실까?"
그는 페이튼을 따라 앞서 집무실을 빠져나가며, 아시엘의 어깨를 스치듯 살짝 짚고 지나갔다.
"....?"
아시엘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황제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제르닌의 재촉에 황급히 그들을 따라나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