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81. 대전회의(5)
".. 이런 소모적인 말싸움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깐 입을 다물고 있던 슈베이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더이상은 시간낭비만 될 듯하니 말입니다."
"그러도록 하죠. 저 역시 형님과의 입씨름으로 힘 뺄 생각은 없으니까요."
라이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그에 대공은 피식 웃음을 터뜨렀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분명.. 제6 경비대의 살인사건에 대한 처분이었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사건 개요는-"
그의 말에, 재빨리 제르닌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채 한마디를 끝맻기도 전 슈베이만이 손을 슥 들었다.
"잠깐."
"..예?"
갑작스레 말이 막힌 제르닌은 의아해져 미미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대공은 그런 그의 반응에는 신경쓰지 않고 제르닌 옆의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네,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라고 했던가."
"...? 예? 아. 네."
아시엘은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슈베이만은 아무도 모르게 씨익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나는 자네가 보고해주면 좋겠군."
".....!"
순간 아시엘은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삼켰다. 그것은 황제 측의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전 안의 공기가 빠르게 얼어붙었고 결국 라이펜은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폐하. 저 소년 기사가 특출나다고 했던 것은 바로 폐하이십니다."
그 노골적인 말에 라이펜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아시엘은 특별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었다. 단지 제르닌의 옆에서 보조를 해 줄 정도로만 내세우려 했었지만 지금 슈베이만이 원하는 것은 아시엘이 혼자의 힘으로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시엘 경은-"
"루이스 경의 아들이라고 하셨지요? 설마 단지 그것만의 이유로 아무런 능력도 없는 소년을 이 자리에 세워두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이펜은 얼굴을 굳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힐끗 아래에 서 있는 아시엘을 살폈다.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그답게 침착함을 되찾고 차분하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진짜 이래도 돼나?'
라이펜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나중에 루이스한테 맞아서 죽을지도.
하지만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아.."
결국, 한숨을 깊게 내쉰 그는 황좌의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아시엘. 보고해."
"네?"
정말로 시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아시엘은 순간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걸 내가 해도 되나. 정말로? 애써 담담함을 가정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이상,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아시엘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한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예.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제르닌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아시엘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시엘은 그것을 받아들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 특유의, 망설임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천진하지만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미소를.
그에 제르닌 역시 걱정에 물들었던 얼굴을 조금이나마 폈다.
"잘해라."
"노력은 해 볼게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아시엘은 몸을 빙글, 돌려 대공과 귀족들 쪽을 바라보고 섰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개월 전인 1월 21일, 레베카라는 여성이 칼에 찔린 채로 강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틀 후, 완전히 부패된 여자의 변사체가 골목 내에서 마찬가지로 단검에 찔린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개요입니다."
소년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전 내에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귀족들의 관심이 완전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범인은 전 경비대 부대장 에슈튼 그리원으로, 피해자 여성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은 것이 살해 동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발견된 변사체는 그가 자신의 범행을감추기 위해 아사한 여성의 시신에 칼을 박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전 경비대장이 그의 범행을 알아차리고 돈으로 협박을 하자, 대장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유기했습니다. 이것은 에슈튼 그리원이 직접 자백한 내용입니다."
아시엘이 한 치의 막힘도 없이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귀족들의 얼굴에 소리 없는 감탄이 어렸다. 라이펜 역시 입가에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고, 제르닌도 그제야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슈베이만은 그런 분위기를 살피다, 곧 살짝 입가에 곡선을 드리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들었네. 그럼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지."
"..예."
별로 좋은 감은 들지 않았지만 아시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좋아. 그럼 사건 수사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네만. 한쪽에서 과잉 진압을 했다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저 짜증나는 새끼. 라이펜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제르닌 역시 조마조마해진 마음으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한 점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잉 진압이라니요?"
아시엘이 느긋하게 웃으며 되묻자 슈베이만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체포 과정에서 파손된 것은 사건 영상석 153개, 서가 12개, 사건 자료들 등등.. 만만치 않다고 들었네만."
"그에 관한 징계로 이미 감봉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5 경비대가 수사를 진행하는 저희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반발하며 공격해 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르닌은 살짝 어이가 없어져 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쪽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온 것은사실이었지만 먼저 과격하게 침입한 쪽은 그들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아시엘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뻔뻔하게 미소지으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생긴 부상자들은 어쩔 셈인가."
"저희도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그 일은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정 단어를 일부러 힘주어 말하며 생글생글거리는 아시엘을 보며 라이펜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눌렀다. 하지만 끅끅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조금씩 새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듯 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을 하지. 나에게도 그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자네들은 경비대에게 당당히 영상석과 자료를 요구하지 않고 몰래 숨어들어가 그것을 훔쳐 나왔다고 하더군. 앞서 말한 피해들은 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저희들은 사건 자료를 요구했지만 그쪽에서 불응했습니다. 제국법에 따르면, 기사단 휘하의 경비대는 기사들의 요구가 있을 시 사건에 대한 모든 자료를 넘겨줄 의무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5경비대의 전 부대장 에슈튼을 그것을 거부했고 그에 저희들은 사건의 진상을 신속하게 밝히기 위하여 그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슈베이만이 다시 전혀 급할 것이 없다는 듯 느긋한 목소리로 묻는 것에 아시엘 역시 웃으며 또박또박 대꾸했다.
라이펜의 끅끅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고, 대전 내의 대신들은 성난 얼굴로 아시엘을 노려보는 이들과 또 기특해 죽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들으로 나누어졌다.
그에 대공의 입가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흥미로움에 가득 찬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아시엘에게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를 마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