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82. 대전회의(6)
'내가 아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애는 애군, 이라는 거였던가? 아시엘을 보며 제르닌은 조금 허무해진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애라고? 저 녀석이? 웬만한 사람들은 대공과 황제 앞에서 벌벌 떨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시엘은 딱히 큰 동요도 보이지 않고 슈베이만에게 맞서고 있었다. 담이 큰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건 상상 이상이었다. 제르닌은 아까 전에 긴장 풀라며 격려해주었던 스스로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라이펜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는 뿌듯하게 미소지으며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
약간의 이상한 점을 발견한 라이펜은 작게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 역시 놀라움으로 조금 커졌다. 눈을 뗄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아시엘을 응시하던 그는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여러모로 엄청나다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팔걸이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신입 부하와 배다른 형의 대치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혹시 더 질문하실 것 있으십니까?"
아시엘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하지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슈베이만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니, 되었네.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군."
"과찬이십니다."
여전히 속에는 날카로운 뼈가 들어있는 말이었지만 아시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황제, 라이펜 쪽으로 돌아섰다.
"이상입니다, 폐하."
"...하."
그가 천연덕스럽게 예를 갖추며 말하자 라이펜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수고했다."
아시엘은 한번 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뒤로 물러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에서 힘을 쭉 빼고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아아아아.. "
"......"
제르닌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픽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했다."
"저 무슨 실수는 안했죠?"
아시엘은 선배를 올려다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실수? 이번에야말로 제르닌은 정말로 어이가 없어져 작게 허!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럴리가."
"그럼 다행이네요."
아시엘은 그제야 안심한듯 베시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는 다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바로 했다. 줄곧 아시엘 쪽을 힐끗거리던 라이펜은 그가 똑바로 서자 웃는 얼굴로 대전을 쭉 둘러보았다.
'웃기는 녀석.'
그렇게 당당하게 굴면서도 손끝을 조금 떨고 있던 아시엘을 떠올린 그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눌러담고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에서 정할 것은 그 에슈튼 그리원의 처분과 새로운 경비대장의 명에 대한 것. 의견이 있으면 마음껏 부탁하지."
귀족들은 갑자기 바뀐 황제의 분위기에 의아해하면서도 수군거리며 곁의 귀족들과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폐하. 에슈튼 그리원의 처분은 논의가 가능하지만, 후대 대장은 여기에서 쉬이 결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음, 왜지?"
라이펜은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보통 경비대의 대장은 그 내부의 대원들 중에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오나.. 중간에 대장이 살해당하고 부대장이 체포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 중앙에서 추천한 자를 내세워야 할 듯 한데, 송구하지만 저희는 그 경비대에 속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제 5경비대라면 대공 전하의 관할이니 전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아니, 그건 안 될 말이다. 형님의 관리 아래에 있던 경비대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겼는데,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안 그렇습니까, 형님?"
황제는 싱긋이 웃으며, 하지만 날이 선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대공은 심기가 조금 상한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곧 다시 원래의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이 건은 나의 불찰이니. 여기에서 제 것을 지키려 한다면 그저 영역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려는 늙은 길고양이밖에 되지 않겠지요."
라이펜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의 곡선을 더더욱 짙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러면 추천할 만한 인물, 있소?"
그가 대전을 빙 둘러보며 말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 때, 잠자코 있던 제르닌이 무례하지 않게 살짝 손을 들었다.
"지금 현재 대장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고 있는 것은 헨슨 파블이라는 자입니다. 그는 에슈튼을 체포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으니- 저는 헨슨 파블이 그 직무를 정식으로 맡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는군. 모두 다른 의견은?"
라이펜은 다시 한번 좌중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귀족들은 눈치만 볼 뿐,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대전 안에 감돌던 그 때, 파슬렌 공작이 앞으로 조금 걸어나왔다.
"반대하는 자는 딱히 없는 듯 하니 별 문제는 없을 듯 합니다."
조용하지만 힘있는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라이펜은 정말로 그렇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한번 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황제 파의 이들은 물론이고 대공 쪽의 귀족들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단지 얼굴만이 만족스러운 표정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뉘어졌을 뿐.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라이펜은 묘하게 유쾌해져 가볍게 말했다. 나중에 마음껏 칭찬해 주마, 하고 그는 이 분위기를 만들어 낸 제르닌과 아시엘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회의는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2시간여가 흘러서야 겨우 끝이 났다.
"이야~ 좋은 허세였어, 아시엘."
대전회의가 끝난 후 다시 집무실로 돌아온 라이펜은 아시엘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
"덕분에 살았다고. 뭐 먹고싶은 거 있어? 아니면 뭐 갖고싶은 거나."
그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시엘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페이튼이 건네준 과자를 우적우적 씹었다.
"됐어요. 이거 다 저장해놨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청구할 거니까."
"딱히 저장해 놓을 건 없지 않아?"
라이펜은 동의를 구하며 곁에 있는 제르닌과 페이튼, 그리고 은근슬쩍 따라 들어온 파슬렌 공작을 돌아보았다.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뭐야? 뭐? 내가 뭘 했다고!"
".. 진심이세요?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라구요. 여장을 하게 만들지를 않나.. 거기다 일부러 웨슬린 백작님이랑 집무실에서 만나게 해서 곤란하게 하고."
라이펜이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외치자 아시엘은 서글프게 대꾸했다. 페이튼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에게 설탕이 듬뿍 들어간 쿠키 몇 개를 더 내밀었다.
아시엘은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고는 입으로 또 하나를 밀어넣었다. 그런 그를 재미있게 바라보던 파슬렌 공작은 문득 라이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폐하. 이번에는 좀 경솔하셨습니다."
"아아.. 저도 압니다. 설마 형님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죠. 아시엘이 잘 넘어가준 덕분에 살았지, 안 그랬으면 정말 위험할 뻔 했습니다."
내 생각보다 그쪽에서 이쪽 신입 기사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라이펜은 씨익 웃고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자 묵묵히 쿠키를 씹고 있던 아시엘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왜요?"
"음? 아- 안돼. 어른들의 비밀이야."
라이펜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손가락으로 소년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하고 쳤다.
도대체 뭐지?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으로 라이펜을 좇았지만, 황제는 더이상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는지 그저 빙긋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뭐야?'
괜히 궁금증만 더 커진 아시엘은 방금 전 라이펜의 손이 닿았던 이마를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