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86. 메르티스 가(2)
루이카엔의 당당한 선언에 아델레트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네가 직접 간다고?"
"뭘 그렇게 놀라? 이번 일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내가 직접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동안의 지휘권은 모두 너한테 넘겨줄게. 제르닌이랑 둘이서 잘 해 보라고."
루이카엔은 씨익 장난끼 담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새하얗던 아델레트의 볼이 점차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정말..!"
"어? 아델레트 부단장, 얼굴이 빨개졌어요. 몸 안 좋으세요?"
"....!"
아시엘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들여다보자 그녀는 재빨리 양손으로 뺨을 감싸쥐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루이카엔!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농담이야. 왜 그렇게 열을 올리고 그래?"
루이카엔은 낄낄 짓궂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 앉아있던 케빈까지 큭큭대기 시작하자 아델레트는 이마를 탁 짚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아.. 말려든 내가 죄인이지. 하던 얘기나 계속해. 안 그러면 나 나간다?"
"알았어, 알았어."
루이카엔은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면서도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보였다. 일련의 대화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출발은 1시간 뒤고, 인원은 나와 아시엘, 카이스 그리고 케빈으로 4명. 일단은 우리가 먼저 가서 확인하고 지원이 필요하면 연락하는 걸로. 아델레트와 제르닌, 그리고 베르칸 벨킨 쌍둥이는 생활관을 지켜."
"1시간 뒤? 너무 급하지 않아?"
단장의 말에 케빈은 목에 감겨있는 뱀을 쓰다듬어주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몬스터가 나타난 건 며칠 전이야. 되도록이면 빨리 가야 피해를 줄일 수 있어. 일단 그 지역의 사람들은 대피시키도록 했지만."
"쳇.. 알았어.
케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카엔은 만족스럽게 두 손을 비비고는 다시아델레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동안의 단장 업무는 아델레트에게 인수인계한다. 뭐.. 늘 하던 거니까 괜찮겠지?"
"네, 네. 어차피 네가 있으나 없으나 서류작업은 거의 다 내 차지니까."
그녀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꾸했다. 루이카엔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아시엘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나저나.. 아까 카이스가 한 말. 내가 신경 안 써도 괜찮아?"
"..음.."
아시엘은 애매한 소리를 내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에 단장은 금세 결론을 내렸다.
"네가 망설이는 걸 보아하니 안 괜찮을 것 같네. 무슨 사정이야?"
"..아뇨, 그리 큰 문제는 아니고. 그냥 메르티스 가 사람들이랑 별로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흐음- 루이카엔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전 메르티스 백작도 그랬지만, 현 백작과 백작부인이 평민들을 심하게 차별한다는 것은 꽤 유명했다. 영지는 부유하게 잘 돌아가는 편이지만 그것도 영지민들을 위한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 가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
과한 과세와 수탈은 반발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들을 대충 상기한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확실히 그런 인간들은 껄끄러웠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흥,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 생각을 털어버리고 다시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세상에 널 미워할 수 있는 인간도 있었나. 별일이네."
"놀리지 마세요. 휴온 선배도 저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시엘이 시무룩하게 대꾸하자 그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처음에야 대련에서 지고 나서 심술을 좀 부렸다지만 최근에는 일부러 틱틱거리면서도 챙겨 주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으니.
".. 뭐, 어쨌든 그쪽은 신경 안 써도 괜찮아. 설마 셀레니스의 제복을 입고 있는데 섯불리 무시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더군다나 단장이 함께 있는데 말이야."
"....."
그의 말에 아시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이스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카엔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야, 긴장 풀어.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하냐?"
"...아니요."
그제야 카이스는 억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동자는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이야기가 끝맻어지자 그들은 각자 짐을 챙기기 위해서 집무실에서 나왔다. 카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기 사작하는 아시엘의 어깨를 덥썩 붙잡았다.
"엑? 뭐, 뭐야?"
"..정말로 괜찮겠어?"
난데없이 강한 힘에 붙들린 아시엘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곧 이어진 그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이스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아니. 우리 카이스군이 내 걱정 참 많이 하는구나, 싶어서."
아시엘은 빙글빙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카이스는 조금 당황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 말은.."
"나도 알아."
아시엘은 싱긋 그 특유의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정말로 괜찮아. 아무 일도 안 생길 거야.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내 걱정만 하지 말고 백작님이랑 백작부인 걱정이나 해. 그래도 어머니잖아?"
"......"
카이스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 아시엘은 먼저 간다, 하고 손을 살짝 흔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이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좋으련만. 무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곧 불길한 생각을 털어버리는 것처럼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친구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아시엘은 뒤로 시선을 줘 카이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점차 위로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문을 탁, 소리나게 닫고 힘없이 벽에 기대어 섰다.
"아아.."
아시엘은 마치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자신있게 괜찮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 괜찮.. 겠지."
아시엘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되뇌었다. 아무 일도 없을거야, 괜찮을거야. 그는 하아, 한번 더 답답한 가슴으로부터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그는 곧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냐. 정신 차려야지. 이러다 민폐만 끼치겠어."
아시엘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탁, 탁 쳤다. 그러고는 다시 후- 하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