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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91화 (9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87. 메르티스 가(3)

아시엘이 짐가방을 들고 로비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그를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케빈은 뒤늦게 나타난 그를 발견하자마자 손짓하며 불렀다.

"얼른 와, 꼬맹이."

"그 꼬맹이 소리는 좀 빼주시면 안 되나요?"

아시엘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 쪽으로 거의 뛰다시피 다가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그럼 다 온건가?"

루이카엔은 버릇처럼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제각기 짐가방을 챙겨들고 삐딱하게 서 있는 케빈과 카이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계단 난간에 기대고 있는 아델레트.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는자 제르닌과 늑대 쌍둥아 역시 자리를 잡고 염려스러운 눈빛이 보내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뭐 장례식이라도 가는 줄 알겠다."

"걱정 안 할 수가 있나요? 아직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몬스터를 겨우 넷이서 잡으러 간다는데."

루이카엔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묻자 베르칸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꾸했다.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요. 루이카엔의 실력은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가 변명처럼 덧붙이는 말에 옆에 있던 벨킨이 동감이라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르닌이 글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적어도 이 조합이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맞아. 내가 걱정하는 건 메르티스 가 영지의 안위니까."

아델레트는 긴 하늘색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켁, 하고 당황한 단장이 목이 막힌 것처럼 마른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부단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이카엔에, 축소판 루이카엔이랑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케빈, 그리고 사고치면 수습할 것 같이 생겼지만 절대 말리지 않을 녀석이라- 심히 걱정되네."

난데없이 붙여진 난처한 호칭에 아시엘은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축소판 루이카엔 씨라니, 설마 절 말하는 거에요?"

"설마가 아니야. 너말고 또 있어? 물론 네가 루이카엔보다 조금 더 똑똑하긴 하지만."

아델레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케빈이 불만을 터뜨렸다.

"앞뒤 안 가리는 놈이라니 뭐야! 나보고 한 소리야?"

"당연하지. 늦장부리고 있을 시간 없어. 얼른 안 가?"

그녀는 말머리를 돌려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참 무서운 여자야, 루이카엔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아델 말이 맞아.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해야 내일 아침 쯤에 도착할 수 있어."

"쳇. 밤샘 이동인가. 말 타고 가면 꽤나 피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리던 케빈은 순간 말을 멈추고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카이스와 제르닌 역시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루이카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또 뭐가 문젠데?"

"아..."

전의 파견을 아시엘과 함께 했던 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의 당사자는 창피한 듯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왜 그래, 아시엘?"

"아..하하하... 그게, 조금 큰 문제가."

아시엘은 손을 내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서글프게 웃음을 터뜨렸다. 메르티스 가 전에, 더 큰 시련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 정말.."

말 못 타네. 루이카엔은 뒷말을 작은 소리로 우물거리고 삼키며 옆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어찌어찌 떨어지진 않고 중심은  잘 잡고 있었지만, 미친듯이 질주하는 말을 컨트롤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른 일행들 역시 최고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어, 예정시간보다 빨리 수도를 벗어나게 되었다.

"놀리지 말아요!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으아아아!"

"야, 야, 말하지 말고 앞이나 봐!"

그 와중에도 단장의 작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위태위태하게 말대꾸를 하는 아시엘에게 케빈은 퉁바리를 주었다.

"나 원.. 그에 반해 저쪽은 완전 물 만난 물고기로군."

"그러게."

그의 말에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저 앞에서 달려나가고 있는 카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까 전용 마구간에 들어서면서부터 아시엘과는 다르게 눈빛을 반짝이던 그였다. 평소에는 아시엘과 검 이외에는 과할 정도로 관심이 없던 카이스의 열의에 찬 모습이 루이카엔은 낯설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물론, 무언가에 서툰 아시엘 역시 희귀한 구경거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라면 가끔은 괜찮겠는데, 장거리 파견."

"네, 네. 어련하겠어."

케빈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말의 배에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힝- 그의 흑마가 놀라 길게 울음을 내뿜고는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휘유! 나 먼저 간다!"

"앗, 잠깐만요 케빈, 으앗 케빈선배애!"

흥이 나서 휘파람까지 부는 케빈의 말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자, 아시엘이 탄 백마 역시 흥분해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말의 안장에 매달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케빈은 큭큭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둘을 따라 곁으로 다가온 루이카엔  역시 풋, 하고 웃음을 떠뜨리며 소년을 힐끗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화려한 금색 머리칼을 날리며, 얼굴에는 곤란한 빛을 가득 띄운 작은 기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색해하던 제복은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하얀색이었다.

"멋진데. 좀 어설프긴 하지만, 너흰 이제 어엿한 셀레니스의 기사가 되었네. 더이상 신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않을 정도로."

"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그 골 때리는 황제 폐하의 훌륭한 개가 되었다는 뜻이야."

단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하게 되묻는 아시엘에게 케빈은 킥킥거리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경쾌했다. 아시엘은 여전히 불안불안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속도에 익숙해진 건지 허리를 펴고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후우, 이제 좀 살겠네."

"너 나중에 멈출 때 어떻게 하려고 그래?"

케빈은 낄낄 웃으며 놀리듯 물었다. 그러자 아시엘은 씨익 웃으며 시원스레 대꾸했다.

"그때처럼 카이가 어떻게든 해 주겠죠, 뭐! 루이카엔 씨도 있고."

앞에서 달리던 카이스는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쪽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자 케빈은 으엑, 하는 소리를 내며 혀를 쭉 빼물었다.

"징그러운 놈들. 네놈들 관계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진짜 궁금하다."

"나도 궁금한데. 조금 질투나려고 그래."

그에 질세라 루이카엔 역시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히히, 하고 작게 미소짓기만 할 뿐 더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들의 새하얀 제복의 긴 코트 자락이 맞바람에 휘날렸고, 셀레니스임을 뜻하는 가슴의 금 브로치가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텅 비어있는 황야 지대를 가로지르고, 몇 개의 검문소를 그냥 통과한 후 해가 완전히 넘어간 다음에야 그들은 한 도시에 다다랐다. 메르티스 백작령과 바로 인접해 있는, 작은 여행자들의 지역- 로크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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