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셀레니스 기사단 유령 소동(1)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과 조금의 심술이었다.
"어이, 케빈."
오랜만의 비번일이라 여유롭게 소파에 늘어져있던 케빈은 오스카가 은근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왜그래? 음흉하게 웃기나 하고."
"흐흐흐.."
오스카는 말 그대로 음흉하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혹여나 누가 들을세라 주변을 두어번 살피고는 케빈에게 바짝 다가갔다.
"있잖아, 우리 신입 꼬마가 놀라는 꼴을 보고싶지 않아?"
무슨 헛소리야. 케빈은 일순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일단은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신입이라면 아시엘, 아니면 카이스?"
"두 녀석 다. 하지만 아시엘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냐? 카이스도 차분한 녀석이지만 난 그것보다 아시엘이 벌벌 떠는게 궁금한데."
확실히 꼼꼼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 초보다운 실수를 보이는 카이스와는 달리, 신입주제에 지나치게 유능한 아시엘이 겁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완전히 셀레니스의 업무가 천직인양 일을 척척 해치워가는 그 녀석은 일단 성격은 좋은 듯 보이지만 한 성깔 하는 모양이라- 들어온 첫날 여자로 오인받고 난동을 부렸던 일은 기억에도 새로웠다- 사소한 장난 외에는 건들여볼 기회가 잘 없었고, 더불어 용기도 없었다.
지금 오스카는 그 금단의 영역을 선배로서 과감히 넘어보겠다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하지만 귀가 솔깃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케빈은 꺼림직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렇게 묻고 말았다. 그러자 오스카는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드리웠다.
"조금 장난을 치자는 거지. 최근엔 계속 흐린데다 간간히 천둥번개가 치고 있고 비바람도 잦아. 귀신놀이 하기엔 딱 맞는 날씨 아닌가?"
"....."
꿀꺽. 그는 마른입에 침을 삼키는 케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빈의 얼굴에도 씨익 장난스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콜."
그는 동료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바야흐로 '아시엘 놀래키기 동맹' 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선배들의 시커먼 속내를 알 리 없는 아시엘이 생활관으로 돌아온 것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저녁때였다. 온몸이 쫄딱 젖은 채 들어온 그는 축축한 제복을 벗어던지고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우와~ 비 엄청 많이 오네요. 이동하기 힘들게."
"그러게나 말이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하늘도 우중충하고."
함께 일을 나갔다가 돌아온 슌 역시 웃는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일은 참 알차게 생기니까 억울할 따름이지."
"그렇죠."
아시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샤워실로 향하는 그의 등에 대고 힘빠진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소파에 드러누워 기회를 보던 케빈은 책을 읽는 척하며 목표의 눈치를 살피던 오스카와 눈빛을 교환하고 나른하게 몸을 쭉 일으켰다.
"아아- 찌뿌둥해. 간만에 쉬는 날이라 온종일 생활관에서 뒹굴었더니 온몸이 뻐근하네."
"그러니까 일이 없어도 어느 정도 훈련은 해야 한다니까요? 몸이 굳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아시엘은 성실한 우등생답게 가벼운 잔소리를 던졌다.그러자 오스카는 기다렸다는듯 책을 집어던지고 끼어들었다.
"맞아. 게으름 피우다가는 '그 놈' 한테 당하고 만다고?"
"그놈이라뇨?"
사뭇 비장하게 말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아시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스카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후배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래. '그 놈' 말이야. 궁금해?"
"...네."
아시엘은 조금 꺼림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큼 또 다가섰다.
"흠.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놈은 말이지, 우리 생활관에 옛날부터 들러붙어 사는 녀석이야. 오래 전 적군의 검에 맞아 죽는 병사의 원혼이지."
"흐음. 그건 요컨대 유령이라는 소리에요?"
두 사람의 의도와 같이 아시엘은 흥미를 보이며 큰 눈을 살짝 반짝였다. 케빈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오스카의말에 덧붙였다.
"맞아.. 꽤 억울한 모양인지, 게으름을 피우는 놈의 어깨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나도 싸울 수 있어~ 하고 말이야."
그는 귀신 흉내를 내며 얼굴을 기괴하게 비틀었다. 하지만 두 선배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시엘은 호오, 하는 소리를 내며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네요, 그거. 그럼 전 샤워하러 갈게요."
"에?"
오스카와 케빈은 매정하게 몸을 휙 돌리고 샤워실로 향하는 아시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하지만 다음 순간-
"... 가끔씩 들리는 이상한 목소리가 그 녀석 거였나 보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으면서 소름이 싸악 끼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뭐, 뭐라고?"
두 사람은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저 녀석이 한 말이 무슨 뜻이지? 나도 몰라. 눈빛만으로 일련의 대화를 나눈 그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시엘이 간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들어가버렸는지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야, 야. 아까 그거, 무슨 얘기야?"
로비의 구석진 곳. 날씨 때문인지 전부 일찌감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후 둘만 남게된 케빈과 오스카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
"나, 나라고 알까보냐!"
케빈의 다급한 물음에 오스카는 작은 소리로 쏘아붙였다. 무슨 소리를 듣는다는 거야? 누구 목소리라고? 두 사람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될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오스카는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착각일 거야. 귀신 얘기는 우리가 지어낸 거잖아? 아니면 우리 중 하나의 목소리를 아시엘이 들은 것 뿐일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계획된 대로 하자."
"....그렇겠지?"
케빈은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는 그를격려하듯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는 소파 아래에 숨겨두었던 새하얀 시트를 꺼내들었다.
"그럼 두번째 작전을 실행하자.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계속 머리에 떠올릴 수밖에 없을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어린애니까."
훗. 두 사람은 언제 벌벌 떨었냐는듯 다시 짖궂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슌이 말려들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지."
오스카가 말하며 내민 손을 케빈은 맞장구를 치며 강하게 붙잡았다. 우르릉, 콰앙-! 때마침 천둥번개가 치며 텅 빈 로비를 환하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