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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98화 (9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셀레니스 기사단 유령소동(2)

왠일로 일찍 자겠다며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아시엘을, 슌은 별일을 다 보겠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벌써 자게?"

"네. 조금 피곤해서요."

아시엘은 고개도 빼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슌은 큭큭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후배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어라, 저게 뭐야?"

"네?"

아시엘은 그제야 이불 뭉치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그러자 창가에 서있는 슌이 밖의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가 있어요?"

"왠 하얀게 펄럭펄럭.."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아시엘은 결국 침대에서 나와 슬리퍼를 신고 터덜터덜 그쪽으로 다가갔다.

비바람이 치는 바깥에, 커다란 나무에 무언가 하얀색의 무언가가 걸려 사정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엥, 저게 뭐야?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좀더 자세히 보려는데, 갑자기 새하얗던 '그것' 이 가운데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

슌은 조금 놀라 흠칫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서서히 붉어지며 흩날리는 새하얀 천.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로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잠시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다른 쪽에 시선을 주었다.

"선배. 저쪽에 있는 건 뭐에요?"

"어?"

"저거요, 저거. 사람 같은데."

슌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거센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나무들만이 있을 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에? 저기 있잖아요."

아시엘은 조금더 팔을 쭉 뻗으며 그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무엇이 보인다는 건지, 슌은 알 택이 없었다.

"야, 야. 무섭게 왜 그래?"

그는 애써 웃으며-하지만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시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곳을 진지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뭐야뭐야 뭐냐고!"

비를 뚫고 아시엘의 방 정면에 있는 나무에 조금 장난질을 쳐 놓은 시트를 걸어놓고 동태를 살피던 두 사람은 다시 한번 피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황해서 뭐야, 만 연발하던 케빈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녀석, 뭘 보고 저러는 거야?"

"난들 알겠냐! 왜 보라는 건 안보고 아무것도 없는 데다 저러냐고!"

오스카 역시 덜덜덜 떨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까의그 의미심장한 말도 그렇고, 아무래도 건들여서는 안될 것을 건들인 것 같았다.

"..카이스한테 가 보자. 그 녀석이라면 뭔가 알지도! "

케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에 오스카 역시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짝 쳤다. 두 사람은 곧장 제르닌과 카이스의 방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벌컥!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 문을 열고 처들어온 두 사람에, 막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던 카이스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에, 뭡, 뭡니까?"

"카이스, 카이스!"

케빈과 오스카는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마구 두서없이 커다랗게 떠들어댔다. 카이스는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 애쓰며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만..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면 안됩니까?"

"그러니까- 그그, 그. 그.. 아시엘이 혹시 뭔가.. 이상한 걸 본다거나, 뭐, 그런 건 뭐.."

케빈이 더듬더듬 하는 말에 그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카이스는 꺼림직안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두 선배의 얼굴이 순식간에 헬쓱해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뭐, 진짜로?"

".. 선배들도 아시다시피, 그 녀석은 귀가 굉장히 예민합니다. 그래서 종종 들리는 모양이에요."

꿀꺽. 오스카와 케빈은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스는 음침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그런 목소리가 말입니다."

"히, 히이익-!"

"그녀석 말로는 아마 죽은 사람들인것 같다, 라고."

하던데요- 하고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우당탕탕, 방에서 나가버렸다. 카이스는 아.. 하고 멍청히 서서 그들이 사라진 문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때 안쪽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제르닌과 노닥거리러 온 루이카엔이 나왔다.

"저 멍청한 녀석들, 완전히 제 심술에 제가 넘어간 모양이네."

루이카엔은 킬킬 웃으며 안그래? 하고 제르닌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그에 제르닌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은 저 바보들을 놀리는 것도 보람찬 일이지. 난 아시엘을 응원하겠어."

카이스는 두 사람을 따라 작게 미소지었다. 그러다 곧 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조금 걱정은 되네요. 날씨가 이래서.. 왜냐하면 아시엘은-"

"으아아아아악!"

케빈과 오스카는 마구 괴성을 지르며 불 꺼진 복도를 쿵쾅쿵쾅 달렸다. 중간중간에 기사들이 문을 벌컥 열고 '시끄러워, 이 개자식아!' 내지는 '시끄러워요!' 라는 고함이 날아왔지만 두 사람은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뭐, 뭐야! 그럼 진짜로 생활관에 귀신이 있다는 말이잖아!"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케빈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뱉어내자 오스카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는 당연히 아시엘의 방이었다.

그때-

후두둑, 갑자기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졌고, 안그래도 잔뜩 쫄아 있던 케빈과 오스카는 단박에 서로를 껴안고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

한참동안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고 부둥켜 안고있던 두 사람은 어디선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웃음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쿡.. 쿡쿡.. 푸흐흐.."

분명,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그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떨어진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

돌돌 말려 끈으로 묶여져 있는 하얀 솜이불 2개.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해지자 웃음소리의 주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하하! 하하하."

"....! 너!"

장식물 조각상 뒤에 숨어있던 작은 소년, 아시엘이 배를 잡고 걸어나오자 케빈과 오스카는 순간 상황판단을 못해 멍청한 소리를 냈다.

얼굴까지 붉혀 가며 숨이 멎을 정도로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 아시엘과, 눈앞에 떨어져 있는 이불 뭉치. 그리고 아직까지도 있는 힘껏 서로를 껴안고 있는 자신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야, 너 설마..!"

"하하, 하아.. 죄송해요. 하지만 선배들이 먼저 절 놀래키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시엘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케빈과 오스카는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너,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아..?"

여기서 더이상 비참해지지 않도록 케빈은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 선배들이 쌩뚱맞은 유령 이야기를 할 때부터 대충 감은 잡았었어요. 그 뒤에 창가에 펄럭거리는 '피에 물드는 시트' 를 보고 확신했죠. 선배들이 제가 놀라는 모습을 보려고 근처에서 훔쳐보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아..."

"그리고 제가 헛소리를 하면 당장에 카이스에게 갔다가 다시 우리 방으로 올 거라고 생각해서 이쪽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놀랐던 가슴에 미칠 듯한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저 어린 녀석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꼴이 되었지만 이쪽에서 시작한 것이니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도대체 뭘 한거야."

온 방을 뒤져서 찾아낸, 굳어진 붉은색 물감을 감싼 시트를 폭풍우를 뚫고 나무에다 걸어놓은 후 몰래 지켜보겠답시고 비내리는 밖에서 덜덜 떨기나 하고. 결과는 이 모양이니 쪽팔릴 지경이었다.

"머리도 안 돌아가는 놈들이 똑똑한 녀석을 골탕먹이려고 드니까 그렇지."

때마침 다가온 루이카엔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둘을 향해 한심하다는듯 한 마디 툭 내뱉았다. 제르닌을 방에 남겨두고 구경가겠다는 그를 따라온 카이스는 완전히 정신을 놓고 허공만 바라보는 선배들을 딱하게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어서 주무시러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늦은 시간이고."

그가 아시엘 너도, 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검은 하늘이 번쩍하더니 우르르 콰앙-! 하고 어마어마한 천둥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우왓, 깜짝이야. 날씨가 왜 이 모양이야."

케빈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의눈에 묘하게 이질적인 모습이 들어왔다.

"응?"

여전히 주저앉은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오스카, 편한 가운을 걸친 채 조금 놀란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루이카엔. 그리고 낭패났다는 눈빛으로 제르닌과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는 카이스.

케빈과 오스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들이 보고 있는 곳으로 목을 틀었다. 그리고는 곧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아시엘이 쭈그리고 앉아 귀를 틀어막고 벌벌 떨고 있었다. 눈까지 힘껏 감은 모양이 무언가에 겁을 잔뜩 먹은 모양이었다.

"에?"

잠깐만, 겁을 먹어? 뭐에? 케빈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가지 가정에 입을 쩌억 벌렸다. 오스카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천둥 때문이냐? 천둥이 무서운 거냐?"

"아, 아니! 딱히 무서운게 아니라 너무 소리가 커서-"

아시엘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다시 한번 하늘이 우르릉, 콰앙! 하고 우뢰소리를 뱉아냈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귀를 더더욱 세게 틀어막았다.

"하.... 나 참. 아닌 게 아니잖아."

케빈은 어이가 없어져 이마를 턱 짚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 쿡쿡,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스카 역시 마찬가지로 슬금슬금 저 안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가를 가렸다.

"뭐야! 큭.. 꽤 귀엽잖아?"

"시끄러워요!"

아시엘은 빨개진 얼굴로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케빈과 오스카는 아까 당했던 것을 복수라도 할 요량인지 그것을 시작으로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아무리 어른인 척 해도 역시 꼬맹이는 꼬맹이구나! 천둥소리가 무섭다니!"

"푸하하핫! 귀엽다, 귀여워. 흐하하하!"

그 꼬맹이한테 된통 당해서 비명을 질러댔던 건 어디의 누구더라. 루이카엔은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아시엘을 일으켜 세웠다.

"얼른 자러나 가. 내일도 바쁠 테니까. 네놈들도! 귀신을 무서워해도 하나도 안 귀여운 아저씨들 주제에."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도 찔리는 구석은 있었는지- 케빈과 오스카는 웃음을  멈추고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다섯 명은 갑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척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뒤이어 귀신보다, 천둥보다 더 무서운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왔다.

"누가 한밤중에 복도에서 떠들고 놀라고 했을까...? 다른 사람들 잠도 못 자게 말이야."

"힉...!"

그들은 그 자리에서 뻗뻗하게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는 목만 겨우 돌려 살벌한 목소리의 주인공- 아델레트를 바라보았다.

잠옷 차림의 그녀는 얼굴에 무시무시한 미소를 띄운채 지옥의 수문장처럼 팔짱을 척 끼고 버티고 서 있었다.

"아...."

망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대충 예상했던 대로-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호통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서 자러나 가, 이 망할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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