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98.여자와 소년(1)
똑똑. 카스란의 집무실 앞에 선 키프스는 손을 슥 들어화려하게 장식된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들어갑니다."하는 한 마디만 툭 내뱉고 문을 열었다.
아니나다를까 안에는 이 성의 주인인 카스란이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형님."
"... 왜 찾아온거냐."
백작은 그제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키프스는 익숙하다는듯 말을 이었다.
"시전 중인 마법이 도중에 강제로 깨어지면 마력은 통제를 잃어버리고 날뛰게 됩니다. 마법사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내상을 입게 되고, 심각하면 죽거나 미칠 수도 있습니다."
"......"
카스란은 눈동자만을 굴려 동생을 바라보았다.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소년같은 빛을 품고 있던 키프스의 얼굴에는 드물게도 미미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골칫덩이 막내동생의 절친한 친구.
"너도 나를 원망하려 온거냐?"
"아니요. 그건 카이스에게 맡겨두고, 전 그저 그 바보같은 녀석의 마음을 좀 알아달라는 것 뿐입니다."
키프스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카스란은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말없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쳐다보던 그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 여기저기에서 꽤나 애달파하는군, 그 꼬마를. 그 기사들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도대체 왜지?"
".. 그 이유는 형님께서도 충분히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만."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손장난하듯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바닥에서 기어다니다 우연히 날아오른 벌레라는 것은 바뀌지 않아. 뭐, 그런 녀석에게 구함받은 내 목숨도 그 정도라는 건가."
"형님!"
키프스는 조금 화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카스란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다만 조금 비어버린듯한 눈으로 동생을 힐끗 곁눈질할 뿐이었다.
그는 하아, 하고 한번 더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형을 조용히 응시하던 키스프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머님을 뵈고 왔습니다. 기사님들이 여기까지 걸음해 주셨으니 오늘 밤에 대접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래."
카스란의 미간이 구겨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리고 곧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머님은 성에 그 아이가 와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다. 카이스만 기사들과 함께 왔다고 알고 계시지요. 분명 저녁 자리에서 마주친다면-"
"뒷말은 안 해도 알아. 하지만 나에게 뭘 바라는 거지?"
백작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주무르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키프스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사뭇 진지하게 본론을 꺼냈다.
"형님이 어머님을 막아요. 그 녀석의 방패가 되어 주라고요."
"..뭐?"
"어머님은 형님 이상으로 그 애를 싫어하시니까요. 한번 구해진 목숨인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그는 표정을 풀고 씨익 장난스럽게 웃었다. 카스란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쳇 하고 언짢게 혀를 찼다.
"참 너랑 똑 닮아서 답 없는 녀석이야."
붕대를 감아주는 하녀에게 몸을 맡긴채 묵묵히 있던 케빈은 옆에서 생각에 빠져있는 루이카엔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뭐?"
"그녀석 말이다. 너랑 똑같다고."
그 녀석 이라면 분명 마법이 강제로 해제된 후유증으로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아시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아 루이카엔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다음을 재촉하는 것을 알아차린 케빈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아시엘이 마법을 해제했다면, 직접 달려가서 백작을 구하려고 했지? 그런데 녀석이 제가 아파 죽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자기를 벌레 취급한 싸가지 백작을 구하겠답시고 버텨서, 넌 잔뜩 골이 난 거고."
루이카엔은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으며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케빈은 역시나 그럴줄 알았다는듯 픽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빌어먹을 녀석들. 그래도 백작은 살았고, 너도 사지 멀쩡하고. 마력이 역류해서 속 뒤집어진 꼬맹이도 일단은 살았으니 그 녀석의 판단은 정확했던 건가."
"무슨 바보같은 소리야. 떨어지면서 머리도 박았냐?"
루이카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퉁바리를 주자 그는 예이, 예이- 하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물론 나도 그 머저리 백작님이 곱게 보이는 건 아니니까. 아니, 카이스의 친형이 아니었다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단도 들고 침실에 침투할 생각이라고."
"뭐 정작 그 친동생은 골백번은 죽일 것같은 눈으로 노려보던데, 그 형을."
확실히 백작가 입장에서는 아시엘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질만 하지. 루이카엔은 그렇게 덧붙이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 때, 열린 방문 사이로 옆방에서 터져나온 호통이 파고들었다.
"이 멍청아!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거야!"
"......"
의심할 여지도 없이 확실한 카이스의 목소리였다. 그 뒤에 아시엘이 무어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들려왔다.
"깼나 보네."
"그런가 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툭 내뱉았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옆방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카이스와 자다 일어난 그대로 침대에 얌전하게 꿇어앉아 반성 모드에 들어간 아시엘이었다.
"사람 말은 죽어라 안듣고! 너 바보지? 큰형님이 뭐가 곱다고 감싸주냐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미안합니다.."
아시엘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사과했다. 그에게 화를 내는 카이스라는 보기 드문 광경에 루이카엔과 케빈은 그대로 관전에들어갔다. 아시엘은 뒤늦게 문가에 서있는 두 사람을 알아차리고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은 시선을 무시해버렸다.
"미안하지만 카이스랑 같은 생각이라서 말이야. 네 몸 생각도 좀 하라고, 바보야. 대답 안하고 어물쩍 넘어가려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고."
루이카엔은 터벅터벅 그에게로 다가가 따악, 아프게 꿀밤을 먹였다. 아시엘은 끄윽, 하는 소리를 냈지만 차마 항변은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것이 또 묘하게 거슬려 케빈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반성은 하지만 후회는 안 한다는 거냐?"
"....뭐. 하하하."
아시엘은 부정하지 않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별난 녀석. 루이카엔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고개를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곧 픽 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의 머리에 손을 턱 올리고 금발을 마구 헤집었다.
"그래서 몸은? 괜찮냐?"
"멀쩡해요! 생각보다 아프지도 않았고."
아시엘은 헤헤 웃으며 자세를 바꿔 편안하게 앉았다. 그로부터 세 시간, 내상을 입긴 했지만 온몸에 들끓던 마력은 이제 잠잠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잠시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케빈은 루이카엔을 옆으로 확 밀치고 손을 뻗어 아시엘의 뺨을 콱 꼬집었다.
"피까지 토한 놈이 말은 잘해요. 응? 얼마나 놀랐는데."
"으아아아! 죄송, 죄송해요! 선배! 아파요!"
아시엘은 악악 비명을 지르며 선배를 떼어놓으려 용을 썼다. 하지만 케빈은 새하얗던 그의 볼이 빨갛게 물들고 눈에 눈물이 찔끔 고여서야 뺨을 놓아주었다.
"아으으으..."
아시엘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얼얼한 뺨을 주물렀다.그 모습이 괴물의 손에 검과 얼음창을 인정사정없이 꽂아대던 소년과 동일인물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루이카엔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뭐, 그래도 큰 문제 없어서 다행이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정말로 화낼거야."
"네에.."
아시엘은 여전히 볼을 감싸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문 쪽에서 똑똑 하고 노크소리가 들려와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을 든 키프스가 열려있는 방문을 두드린 자세 그대로 빙그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