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05화 (10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99. 여자와 소년(2)

키프스는 방에 있는 이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대충 걸터앉아 있던 루이카엔은 그에게 손을 슥 들어보였다.

"여, 오셨습니까? 백작님께 가신다더니 오래 걸리셨군요."

"어머님이 부르셔서 조금 걸렸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부엌에 들러 이것도 좀 가지고 온다고요."

키프스는 한쪽 손에 들린 머그컵을 흔들었다. 따뜻한 것이 담겨 있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것을, 그는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아시엘에게 내밀었다.

"약초차야. 내상에 효과가 있으니까 마셔둬. 설탕도 잔뜩 넣었으니까 쓰지도 않을거야."

"아.. 감사합니다."

아시엘은 헤헤 웃으며 컵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키프스는 귀엽다는듯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메르티스 가의 가주를 구해주신 은인한테 이 정도도 안하면 쓰나."

"은인이라니, 그런 거 아니에요."

아시엘은 정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차를 입에 가져가 한모금 들이키다 바로 아뜨, 하는 소리를 내며 컵을 떼고 혀를 빼물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하는 그를 재미있게 바라보던 키프스는 고개를 돌려 동생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건 그렇고, 어머님이 섭섭해 하시더라. 네가 왔으면서도 곧바로 찾아뵙지 않았다고."

"...... 사적인 일로 온게 아니니까요."

카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키프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네 기분은 알겠지만 계속 피해다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언젠가는 끝을 봐야지."

"끝을 본다니, 가족 간에 할 말은 아닌것 같은데."

분위기를 살피던 케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무리 미워도, 앙금이 맺혀 있어도 보통의 가족이라면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키프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일단은 피를 나누고, 같은 성을 가진 가족이긴 합니다만.. 귀족의 가정에서 그런 것들은 소용 없을 때가 왕왕 있지요. 저는 용기가 없어 집을 떠나 떠돌이로 살아가는것을 택했습니다만-"

그는 잠깐 말을 끊고 바닥만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동생을 힐끗 바라보았다.

"저녀석은 나와는 다르게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선택했지요. 어머니와 형님의 뜻을 완전히 거스르고 셀레니스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

카이스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지자 키프스는 다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듯 굳어졌던 얼굴에 원래의 장난꾸러기같은 미소를 띄웠다.

"아 참. 어머님께서 여기까지 오신 기사님들께 직접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시던데요."

".....콜록!"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호로록 차를 마시던 아시엘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쏟아냈다. 그 격한 반응에 루이카엔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야, 왜 그래?"

"콜록! 켁.. 아니, 아니에- 쿨럭!"

아시엘은 입가에 흘러내린 찻물을 대충 소매로 닦고 어색하게 웃었다. 키프스는 키득거리며 그에게 손수건 하나를 내밀었다.

"쥐가 고양이를 만난 꼴이로군.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머님은 아직 네가 있다는 건 모르셔. 하지만 찾아온 기사가 카이까지 넷이라고 보고받았으니 빠지는 것도 무리겠지."

"하하.. 하하. 그렇겠죠?"

어떻게 잘 지나가나 싶었더니. 아시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어떻게든 미소를 지었다. 백작 부인-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백작보다도 더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천하의 아시엘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케빈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쿡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몸의 반이 간뎅이로 만들어져 있는 것같은 녀석이."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제 간은 정상 사이즈라고요."

아시엘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그러자  곧바로 키프스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아니, 그건 절대로 아냐."

"내 생각도 그래."

"... 나도."

덩달아 루이카엔과 믿었던 카이스마저 그렇게 말하자 아시엘은 끙 하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된거야.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제 간 크기가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녁 식사 시간은 언제에요?"

"5시 반부터."

키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대꾸했다. 그에 루이카엔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힐끗 보고는 어이가 없어져 입을 벌렸다.

"지금이 네시 사십 분입니다만."

그의 눈에 '왜 이제야 말하냐'는 힐난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을 읽은 키프스는 조금 무안하게 웃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형님과의 대화가 조금 길어져서 말입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것보다 형님. 아시엘과 어머님을 만나게 한다면 무슨 사달이 날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말리셨어야지요."

카이스가 얼굴을 굳히고 걱정스럽게 말을 꺼내자 그는 안심하라는듯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괜찮아, 아마도.. 꽤 좋은 방패를 구해놨거든. 약간의 트러블은 있겠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치뤄야 할 일이었으니까."

방패? 그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키프스는 그 이상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댁네 형이나 어머님이나 아시엘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가끔가다 밉상이긴 하지만, 미움 살 만한 녀석은 아니잖아."

의자에 비스듬이 기대 앉아 잠자코 대화를 듣던 케빈은 이해가 안된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루이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타입이 더 원한 사기 쉬운 법이라고. 특히문제아와 모범생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요 녀석이라면."

그렇지? 그는 의미있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시엘은 대답 대신 애매한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맞다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하하.. 그것보다 얼른 준비해야하지 않아요? 저도 아직 이런 꼴이고."

그는 편안한 차림인 자신의 옷자락을 살짝 들어보였다.확실히 대충 티셔츠만 입고 있는 모습이 저녁식사 자리에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케빈 역시 칭칭 감긴 붕대 때문에 윗옷을 벗고 있었고, 키프스는 바로 백작을 만나러 가느라 전투 때의 겉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아시엘은 자신의 옷차림을 휘휘 둘러보는 이들을 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그렇죠? 다들 어서 옷이나 갈아입러 가세요."

"응? 어, 어."

그는 갑작스러운 말에 어리벙벙해진 이들의 등을 마구 떠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어, 어어? 하고 졸지에 복도로 쫒겨난 꼴이 되버린 그들은 자신들 뒤로 매정하게 탁, 닫혀버리는 문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저녀석."

"나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겠지, 저녀석도."

케빈이 황망히 중얼거리자 루이카엔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에 카이스가 조용히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날 준비가 아니라 참을 준비겠지만요."

"아니면 싸울 준비라거나."

키프스는 쿡쿡 웃으며 동생의 말의 뒤를 이었다. 확실히 그들을 쫒아내던 아시엘의 미소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 루이카엔과 케빈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만두었다.

아시엘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참거나 혹은 폭발하거나. 그 중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도 저녁 만찬이 조용히 끝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상황이 되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편이라는 것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