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2. 조금 옛날의 이야기(1)
탁. 문이 닫히고 식당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루이카엔은 방금 있었던 일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시엘이 앉아있던 의자의 쿠션에 묻어있는 와인을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항상 환하게 웃거나, 화를 내거나 호기심에 반짝이던 소년의 앳된 얼굴에 처음으로 빛이 사라졌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하던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느껴졌던 것은 딱딱한 벽과 그것에 커다랗게 남은 상처였다.
"-하."
정말로 민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 녀석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에 루이카엔은 실소를 터뜨리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얼어붙은듯 자리에 앉아있는 페일과 카스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속이 좋지 못해서."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의자를 뒤로 밀고 몸을 일으켰다. 케빈 역시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카엔의 뒤를 따랐고, 잠시후 카이스와 키프스도 말없이 밖으로 빠져나가버렸다.
쾅! 다시 한번 더 문이 열렸다 닫히고 홀 안에는 백작과 백작부인, 그리고 하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페일은 입술을 꼭 깨물고 주먹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카스란은 그런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서 이기셨군요."
"....."
페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르르 진동하는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분노에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텅 비어버린 테이블로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저와 어머님의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 아이의 곁은 누구보다도 아껴주는 친구와, 듬직한 선배들이 지키고 있겠지요."
본인이 바라지 않더라도. 그는 뒷말을 작게 덧붙이고는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하인들은 슬금슬금 움직여 접시들을 하나 둘 치우기 시작했다.
페일은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빈 와인잔을 집어들었다. 아시엘에게 와인을 끼얹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그것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결국 잔을 바닥에 냅다 집어던져버렸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조심스럽게 일을 하던 하인들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가만 안 둬."
페일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절대로, 가만 안 둬. 그녀는 얕게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골 때리는 아줌마로군."
일행들과 함께 복도를 걷던 케빈은 식당과 어느정도 멀어지자 거칠게 툭 내뱉았다. 왜 카이스가 아시엘이 이곳에 오는 것을 꺼려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담담하게 자신을 향한 폭언을 받아들이다가 그 독기 어린 말들이 다른 쪽에까지 뻗치자 곧바로 화를 터뜨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포자기의 얼굴로 무감정하게 '자신' 에게는 괜찮지만 '주변 사람' 들에게는 안 된다고 말하던 그. 루이카엔은 앞머리를 긁적거리며 쓰게 웃었다.
"결국 우리는 그녀석이 혼자 상처받는 것도 막지 못한 건가. 한심하게도 말이야."
"....."
모두 다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있어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이카엔 역시 대꾸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방이 있는 곳까지 다다르자 키프스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시엘을 볼 면목도 없고.. 형님께 가서 한마디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 먼저 들어가시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루이카엔은 고개를 가볍게 꾸벅 숙였다. 그러자 옆에서가만히 듣고 있던 케빈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댁 잘못은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내일은 어쩔 거지? 또 함께 나갈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무슨 계획이라도 세워진다면 일러주시지요. 필요한 것은 제가 준비시키겠습니다."
키프스는 픽 힘빠진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몸을 빙글 돌려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루이카엔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아, 작전이라."
솔직히 할 마음은 이미 싹 사라진지 오래였다. 사실 그런 것보다 더욱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루이카엔은 케빈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것보다 그녀석은?"
"어?"
"아시엘 말이야. 어디에 있냐고."
그가 얼빠지게 되묻자 케빈은 짜증스럽게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카이스는 대답하는 것 대신에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방 앞으로 다가갔다. 식사하기 전까지 아시엘이 쉬고 있었던 곳이었다. 잠시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두 남자는 곧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혹시 자고 있나? 카이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어 번 똑똑 두드렸다.
"아시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노크를 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결국 카이스는 열어보라는 선배들의 열렬한 눈치를 받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익, 하고 오래된 나무 특유의 기분 나쁜 소리가 짧게 들리고 문이 살짝 열렸다.
"..아시엘?"
카이스는 고개만 빼꼼 집어넣고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 아시엘은 이미 어디론가 나가고 없었다.
"어라? 없네. 어딜 간 거야?"
그의 고개 너머로 목을 쭉 빼던 케빈은 텅 빈 방을 보고는 맥이 빠져 중얼거리고는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루이카엔은 침대 위에 와인으로 더러워진 옷들이 깔끔하게 개어져있는 것을 보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어이없을 정도로 칼같은 녀석이네."
"..그냥 방으로 돌아가죠. 빨리 돌아올것 같지도 않고."
카이스는 앞장서서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렸다.케빈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루이카엔의 손에 질질 끌려 다시 복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쩔 거야? 작전회의를 하고 싶어도 녀석이 없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하고 싶지도 않아."
"방으로 가서 잠이나 자. 회의는 나중에 아시엘이 돌아오면 하던지."
그가 툭 내뱉은 말에 루이카엔은 다 귀찮다는 얼굴로 어깨를 풀며 대꾸했다. 그러자 케빈은 잠시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는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피곤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니까. 나 먼저 들어간다."
루이카엔은 몸을 홱 돌려 맞은편의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그의 등에다 대고 가볍게 손을 슥 들어주었다. 콰앙! 다소 거칠게 문이 닫히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카이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아아. 그래그래."
그는 단장에게 꾸벅 목례를 하고는 천천히 자신이 쓰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루이카엔의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문을 연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카이스는 방문을 닫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아 셔츠의 윗단추 두개를 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어느새 방 안에 침입(?) 한 루이카엔과 눈을 딱 마주치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너랑 같이."
루이카엔은 당연하다는듯 대답하며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보이는 모습에 카이스는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한참동안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카이스는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으려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때, 루이카엔이 선수를 쳤다.
"너도 참 고생이 많다. 그런 친구를 바로 곁에 두고."
"예..?"
카이스는 그의 말을 당장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답답하죠. 게다가 난 그 녀석에게 해준 것이 거의 없으니까."
결국, 이번에도 막아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시엘에 대한 화도 조금 섞여있었다. 왜 혼자 그러는 건지. 어째서 자신은 구정물을 뒤집어써도 괜찮다는 것일까.
".. 허세 부리기는."
괜찮지 않으면서. 카이스는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고 답답한 마음에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 친구였지만 아직도 그는 아시엘의 속을 잘 알 수가 없었다. 루이카엔은 소년의 짧은 한 마디에서 많은 것을 읽어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솔직한 것 같으면서도 절대로 깊은 속내까지 드러내는 법이 없으니까, 그녀석은."
"옛날부터 그랬어요."
카이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처럼 말했다. 바라지 않으면서, 주기만 하려고 하는. 아주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항상 그런 방식이었다.
"완벽한 것 같으면서도 정작 자기 생각은 안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진짜로 힘들다는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어요. 아마 자리를 피한 것도 자기가 혼자 있고싶어서가 아니라 저희를 위해서.. 얼굴을 보기 힘들거라고 생각했겠죠."
루이카엔은 킥킥 소리를 내며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잠시 카이스를 바라보다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때로는 그 완벽함도, 멋진 행동력도 자신이 보여주기 싫은 면을 감추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게다가 자기가 욕 먹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화살이 우리에게 돌아오니까 바로 화를 내고. 참 바보같은 보호 본능이야."
이번에는 카이스가 단장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루이카엔은 그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때? 오늘 날잡고 바보같은 친구 뒷담화나 하자고."
"....."
카이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무뚝뚝하던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들어 주신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쌓인게 꽤 많아서, 지루할지도 몰라요."
"바라던 바야."
턱 아래를 쓰다듬으며 몸을 소파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댄 루이카엔은 어서 이야기를 해보라는 눈으로 소년을 재촉했다. 카이스는 잠시 말을 고르는듯 데루룩 눈동자를 굴리다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