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3. 조금 옛날의 이야기(2)
"먼저 친애하는 신입생 여러분들과 학부모님들, 그리고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루카인 아카데미의 이사장, 라칸. 드. 루카인이라고 합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루카인 기사양성 아카데미. 주신께 드리는 간단한 기도가 끝나고 단상에 올라선 이사장이 기나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 줄을 맞춰 서있는 수많은 아이들은 순진한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새로운 시작. 어느 봄날에 성대하게 열린 입학식이었다.
어린 카이스는 시큰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설은 이제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지겨워지고 있었다. 항상 영지에서만 지내다 보니 이렇게 많은 또래들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이 다 거기서 거기인 귀족가의 자제들일 뿐이었으니까.
딱히 흥미를 돋우는 곳도 없고 귀빈들이 있을 뒤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니 백작부인과 그녀를 수행하는 수많은 시종들과 눈을 마주칠것 같아 꺼려졌다. 카이스는 괜히 바닥을 노려보며 탁탁, 발을 구르다 다시 고개를 들고 앞으로 같은 동기가 될 아이들을 다시 훝어보았다.
여전히 고만고만한 10살에서 14살 사이의 철없는 아이들 뿐 눈에 띄는 것은-
아니, 있었다.
카이스는 앞줄에 서있는, 유난히 작은 한 아이를 발견하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살짝 보이는 옆모습이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어린 마음에도 한순간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화려한 백금발과 독특한 붉은색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빨간색 눈동자..'
처음 봤어.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아이의 주변에 있는 신입생들은 모두 그를 힐끗힐끗 곁눈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무시하는 것인지, 따분한 얼굴로 단상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카이스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차피 다를 것 없이, 귀족가에서 곱게곱게 떠받들어져 자란 아이일 뿐일 테니까. 저런 얼굴이라면 더더욱.
'나랑 똑같이.'
소년은 다시 감흥 없는 눈으로 주구장창 연설을 이어가는 이사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별 연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것과는 달리 그와 카이스가 다시 만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잘 할 거라 믿는다, 는 어머니의 크나큰 기대의 말을 받고서는 기숙사를 배정받은 후 짐을 끌고 방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그 적안의 아이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아...."
카이스는 막 방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그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이곳은 분명히 그가 앞으로 지내게 된 방이었다.
"아, 미안해. 길을 막았지?"
카이스는 문득 앞에서 들려온 미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까지도 그 자리에 서있는 자그마한 금발은 붉은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첫눈에도 독특한 그 아이는 곧바로 몸을 홱 돌려 카이스를 지나치고 복도로 나가버렸다.
"...뭐야."
잘 못 찾아 온건가. 애초에 여자애가 같은 방일 리 어없다며, 그는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기숙사로 들어섰다.
4인 1실로 나누어진 방은 꽤 넓고 깔끔했다. 4개의 침대가 양 옆의 벽에 놓여 있었고 공부할 수 있는 각자의 책상과 간편하게 쓸 가구, 생필품 같은 것들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여있었다. 벽지 역시 새로 바른듯 깔끔했다.
이미 한 명은 왔다가 짐을 두고 나갔는지 왼쪽의 침대에 가방이 하나 놓여있는 것을 본 카이스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것을 아무데나 구석에 던져두고는 오른쪽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이스의 검술이 메르티스 가의 장남과 차남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란다는 스승의 말을 듣고 그의 어머니, 백작부인이 독단적으로 아카데미에 입학 원서를 넣은 것이었다. 졸업해서 가문으로 돌아와 영주 아래에서 영지를 지키는 기사가 되라는 말에 카이스는 평소처럼 큰 반항 없이 수긍했다.
그래야만 귀족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배웠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는 믿어의심치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말대로 정말 귀족 사회에서의 인정과 지위가 인생의 전부라면 어째서 둘째 형은 항상 바깥으로 나도는 것일까. 아버지는 왜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를 멀리했던 것일까.
왜 그날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뺨을 맞아야 했던 것인지.
아직 어린 카이스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는 더이상 생각하는것을 포기하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아까의 그 금발 아이가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보통 귀족가의 자제라면 어느 정도의 소문은 떠도는 법인데 그에 대한 정보는 아무도 모르는듯 했다.
들어오면서 스치듯 엿듣게된 귀부인들의 대화에는 그에 대한 온갖 추측들만이 난무했다. 어느 집의 숨겨뒀던 첩의 자식이라느니, 귀한 집의 자제인데 건강이 나빠서 칩거하고 있었다는 소리까지 떠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카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룸메이트일 것같은 소년 둘이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와있던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뻣뻣하게 굳은 동작으로 각자의 짐을 내려놓고 어색하게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을 노려보며 초조하게 손가락을 까닥이거나 천장의 있지도 않은 무늬를 세기 시작했다.
굉장히 딱딱하고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뻘쭘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자 카이스는 쳇, 하고 속으로 혀를 한번 차고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아."
두 소년은 움찔하고는 그에게로 얼떨떨한 시선을 모았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안녕."
"안녕..하하."
하지만 그것으로 끝. 더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고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방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차버렸다. 하다못해 통성명이라도 하지. 카이스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대략 20분쯤 지났을까. 카이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입학한 오늘은 따로 일정이 없고 본격적인 아카데미 생활은 내일부터가 시작이었으니 미리 샤워부터 할 요량이었다.
"하아.."
어째 벌써부터 앞날이 막막한 느낌에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물을 틀었다. 머리에 차가운 물이 쏟아져내렸다.
대충 몸을 씻고 밖으로 나오자 그사이에 말을 섞었는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거라고는 안녕, 이라는 한마디 밖에 없지만 어쨌든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느낌에 카이스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곧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을 하며 바지만 입고 다시 거실 겸 침실으로 나섰다. 그리고 각자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세 아이를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
"어, 나왔어?"
새로운 아이, 하지만 얼굴은 익히 알고 있는 적안의 자그마한 신입생이 카이스를 알아차리고는 그쪽으로 상긋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화답할 정신이 없었다. 다른 두 소년 역시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그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아, 다 씻었나 보네. 다 모였으니까 통성명이라도 해볼까."
"이 녀석까지 우리 룸메이트래."
하지만 카이스는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은 자신이 반라라는 사실과 방에 소녀가 떡하니 앉아있다는 것 뿐이었다. 카이스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말해버렸다.
"여, 여자가 왜 여기에 있어? 룸메이트라니?"
".....누가 여자인데?"
소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그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듯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손으로 정확하게 금발 아이를 가리켰다.
"너 말이야, 너! 척 봐도 여자잖아!"
"아닌데. 나 여자 아니야."
"거짓말 하지 마!"
카이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친 직후에 날아든 작은 주먹은 꽤 빨랐고- 굉장히 아팠다.
그렇게 그의 머릿속의 금발 '소년' 에 대한 첫인상은 매서운 한 방에 의해 최악의 형태로 남아버렸다.
"난 남자야. 착각하지 마."
라고 말하는 살벌한 미소 역시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