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12화 (11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6. 소년과 소년(3)

며칠이 지나자 아시엘은 놀라울 정도로 아이들 틈에 녹아들었다. 처음에 데인과 베리스온, 그리고 카이스와 쉽게 말문을 텄던 것처럼 그는 다른 아이들 역시 스스럼없이 대했다. 클래스의 동급생들도 처음에는 그가 평민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듯 했지만 솔직담백하면서도 항상 밝게 이야기하는 아이를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수들 역시 입학생들 중 가장 어리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 애쓰고 가르치면 배우는 대로 족족 흡수하는 그가 기특한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는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낯설었던 아카데미 생활은 이제 점점 일상이 되어갔고 수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잔뜩 긴장했던 신입생들 역시 제법 집단 생활에 적응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끼리끼리 무리를 짓게 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따라 악동들이 하나 둘 나타나게 된 것 역시 당연했고, 제대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부적응아가 된 몇몇 아이들이 있게 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아시엘. 너 정말로 말 안 해 줄거야?"

수업 중간의 20분 동안의 쉬는 시간. 책을 안고 다음 교실로 옮겨가던 베리스온은 곁에서 걷고 있는 아시엘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뭐를?"

"뭐긴 뭐야. 그때 집 이야기 하다 얼버무렸잖아."

"기억 안 나는데."

아시엘은 씩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조금 뒤에 있던 카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저런 식이라면 절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에이. 거짓말 하지 마. 도대체 뭐 때문에 그래?"

데인이 토라진듯 볼멘소리로 투덜거리자 아시엘은 곤란한 빛을 얼굴에 띄우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정말로 할 얘기가 없어서 그런다니까. 그리고 그 분이라면 너희들도 곧-"

그때,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 눈이 이상스레 반짝이는것 같아 카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시선을 쫒았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정원 쪽으로 가는 빈 복도 뿐이었다.

"아시엘?"

"......"

베리스온은 아시엘의 어깨를 짚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시엘은 기분 나쁘지 않게 그의 손을 치울 뿐 복도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여태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하자 세 소년은 차마 말을 붙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꿈뻑이기만 했다. 그 때, 갑자기 아시엘이 몸을 빙글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야!"

"잠깐만! 먼저 가!"

그는 손을 슥 들어보이고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아시엘의 작은 등과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데인과 베리스온은 황당해져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왜 저래?"

"낸들 아나."

잠시 아시엘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카이스는 작게 혀를 차고는 짧게 툭 내뱉았다.

".... 가 보면 알겠지."

"뭐? 야, 야!"

그리고 그까지 달려나가기 시작하자, 남은 두 사람 역시 얼떨결에 카이스를 따라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아카데미 건물 사이에 조성된 정원에 다다를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름답게 꾸며진 조각과 나무들 사이에 서있는 아시엘을 발견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신입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아시엘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동급생인것 같은 마른 체구의 아이가 잔뜩 움츠러든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뭐야? 누구야, 넌."

"내가 누구인지는 별로 상관 없잖아? 너네야말로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시엘은 팔짱을 척 끼며 눈앞에 있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회색 머리칼의 소년을 도도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베리스온은 금세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이마를 턱, 짚었다.

"맙소사. 저 녀석 니스 아니야?"

"그게 누군데?"

카이스가 묻자 그는 완전히 질린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하노빌 백작의 맏아들이야. 우리 옆의 C클래스에 있는데.. 꽤 질이 안 좋다고 들었어."

"하긴, 제 아버지가 그렇게 기세등등한데. 그나저나 아시엘은 뭘 하는거야?"

데인은 도통 감이 안 잡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분위기로 봐서는 서로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공기를 살피던 베리스온은 무리의 뒤쪽에 기가 죽어 서 있는 주근깨 소년을 발견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C 클래스에도 평민이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저 녀석인가. 보아하니 괴롭힘 당하고 있었던것 같은데."

"... 저 녀석은 그걸 알아차리고 여기까지 온 건가? 하지만 어떻게?"

카이스의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 있던 곳과 여기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무언가가 보일 리도, 들릴 리도 없었다. 세 사람이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니스라고 불린 소년이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험악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끼어들고 난리야? 네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되냐?"

"아니. 그냥 지나가다 뭐가 들리길래 와 봤어. 그런데 이렇게 치사한 짓거리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아시엘은 살짝 미소 띈 얼굴로 여유롭게 대꾸했다. 그 태도가 눈에 거슬렸는지 니스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의 뒤에 무리지어 서있던 다른 아이들 역시 불쾌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학한지 몇 주나 됐다고 이러는 거야? 남자가 되서 치사하게 하나를 여럿이서 괴롭히고. 창피한 줄은 알아?"

저, 저거 미쳤어! 데인과 베리스온은 한마음이 되어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카이스 역시 살짝 인상을 쓰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도무지 아시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 배우고, 듣고, 보았던 자신의 모든 가치관들을 송두리째 뒤엎고 있었다.

"뭐? 왠 구닥다리같은 소리야. 이래서 애송이들은 안 된다니까!"

"...하."

아시엘은 기가 차다는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의 눈에잠깐 살벌한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절대로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거라, 카이스는 직감했다.

"애송이는 내가 아니라 너야. 자신이 힘이 세다고 과시하고 싶은 꼬맹이."

"이게! 니스가 누구인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니스의 뒤에 서있던 아이들 중 덩치가 큰 소년이 주먹을 치켜들며 앞으로 나섰다. 저렇게 나올 때 아시엘의 반응은-

"몰라. 그런 거 상관 없어."

역시나. 상큼하게 웃으며 툭 내뱉는 그의 얼굴에 카이스와 베리스온, 그리고 데인은 약속이나 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부터 그런 것에 신경 쓸 아시엘이 아니었다.

그 한 마디에 상황은 점점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니스는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나이 많은 축의 신입생들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기 시작했고, 뒤에 있는 평민 소년은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한심해. 카이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신분도 낮은 주제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아시엘도, 귀족 사회의 지저분한 규칙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아이들도, 그것에 움츠러들어서 허둥지둥하는 평민 소년도 다 한심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는 저 녀석이라면, 어쩌면 가르쳐 줄지도 모르겠다고 카이스는 생각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꼭 그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어머니께 배운 것이 맞다면, 어째서 둘째 형은 자꾸 밖으로 나도는 것인지. 아버지는 왜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를 멀리했는지. 그리고 그 날, 자신의 왜 자상했던 아버지에게 뺨을 맞아야 했는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들을, 아시엘이라면 속 시원하게 풀어줄 것 같았다.

'썩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지만.'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로는 따라갈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라면 가르쳐 줄수 있지 않을까.

카이스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아시엘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옆에서 베리스온이 야, 하고 작게 불렀지만 그는 무시하고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잠깐이라도, 카이스는 아시엘의 방식을 따라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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