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13화 (11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07. 소년과 소년(4)

"야, 야. 마음대로 먼저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어라, 카이스?"

아시엘은 낯익은 목소리에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스의 등장이 의외였는지 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왔어? 먼저 가라니까."

"그런 식으로 떨궈내졌는데 너라면 가만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카이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시엘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꽤나 아팠는지 아시엘은 익, 소리를 내고 맞은 곳을 감싸쥐었다.

"아야야.. 이게 무슨 짓이야!"

"일전의 복수야."

그는 퉁명스럽게 툭 내뱉고는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아시엘과 대치하고 있던 무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신입생 중에 나이가 많은 편인,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니스와 그 뒤에 고만고만해 보이는 아이들. 그들은 새로운 방해꾼의 등장에 어이가 없어졌는지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야, 넌 또 뭐야?"

"일단은 저 녀석 친구라고 해 둬."

니스가 시비조로 묻는 말에 카이스는 귀찮음을 숨기지 않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시엘은 작게 킥킥 웃음을 삼켰고, 나스의 얼굴은 보기에도 참혹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쌍으로 진짜..!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지?"

"상황 파악이 안 되기는. 여기에서 너희들이 비열한 짓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가문을 들먹이면서 나를 협박하고 있잖아. 안 그래?"

아시엘은 싱긋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아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멍하니 비열한 짓, 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으득 이를 악물었다.

"이게 진짜! 조그만 게 겁도 없이!"

"봐주니까 우리가 만만하게 보이냐?"

소년들을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고압적인 어조로 윽박질렀다. 기분이 나빠진 카이스는 살짝 인상을 썼다가 아시엘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진짜 어설프네."

아시엘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카이스에게나 겨우 들릴 정도였으니 앞의 아이들에게 닿았을 리가 없었다.

그의 말투는 꼭 어른이 철없는 아이들을 보며 혀를 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뭐지?'

또다시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카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아이처럼 착하고 순진한 듯 하면서도 또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마다 확확 바뀌어버리는 아시엘이라는 소년은, 카이스로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그는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야! 지금 말 무시하는 거냐?"

"......"

아시엘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는 그저 무심하게 그들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것이 니스를 더욱 자극한듯, 그는 얼굴근육을 꿈틀거리며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어라, 저거 좀 위험하지 않나. 카이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찰나, 아니나다를까 니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번쩍 치켜올렸다.

"이게 진짜!"

"...! 아시엘!"

카이스가 아시엘을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미 늦은 듯 했다. 손은 그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휘둘러졌다. 바로 코앞에서 내질러진 주먹을 그가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카이스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시엘은 가볍게 뒤로 살짝 물러서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쉽게 공격을 피해 버렸다.

"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순간 소년들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엘은 목표물을 놓친 니스의 주먹이 허공을 휙 가르는 것을 바라보며 쿡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뻔하잖아."

"...! 이게!"

있는 힘껏 헛스윙을 한 꼴이 된 니스는 분노와 수치심에 얼굴을 더욱 붉그락푸르락 물들이고 으득 이를 갈았다.그리고는 다시 주먹을 그러쥐고 소년에게 힘껏 휘둘렀지만, 그것 또한 아시엘은 간단하게 회피했다.

"어딜 치는 거야?"

"....하."

니스를 비웃으며 여유롭게 팔짱을 끼는 그를 바라보며, 카이스는 황당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생긴 것과 완전히 다르게 논다는 것은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지만 역시 완벽하게 적응하기는 무리였다.

절대로 얌전한 녀석은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카이스는 문득 첫날에 자신의 옆구리에 꽂혔던 무시무시한 주먹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도 그 자리에는 약간 푸르스름하게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후에 아시엘이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트라우마가 남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뭐야, 너!"

니스는 악에 받힌 목소리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엄청난 기세에 그의 뒤에 모여 있는 아이들이 움찔했지만, 아시엘은 살짝 미소지으며 사뿐사뿐 요정같은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섰다.

"주먹부터 나가는 버릇은 나쁘다고 들었는데."

응? 안 그래? 하고 묻는 그의 은근한 목소리는- 굉장히 얄미웠다. 상황은 역전된 듯 보였다. 니스는 완전히 여유를 잃고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아시엘은 일관된 느긋함으로 응수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말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카이스는 인상을 쓰고 두 사람에게로 한 걸음을 옮겼다.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평민 소년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 때, 그는 어쩐지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시엘 역시 곧 이상함을 느끼고는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

니스와, 그 무리의 소년들의 얼굴 역시 차차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카이스는 고개를 돌리기가 무서워졌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등 뒤에서 낯선 남자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이 말한게 이 녀석들이냐? 간 크게도 입학 몇 주만에 싸움을 벌였다는."

"아, 아뇨.. 싸움이라기 보다는.."

뒤이어 베리스온이 우물쭈물하며 말했지만 남자는 듣지 않고 성큼성큼 소년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덥썩.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아시엘의 뒷덜미를 붙잡아 가볍게 들어올렸다.

"우아아!"

"한 놈 잡았고."

남자는 버둥거리는 아시엘을 한 손으로 꽉 잡고 니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몸을 홱 돌리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 곧 아시엘처럼 잡혀 나머지 한쪽 팔로 짐짝처럼 옆구리에 끼워지고 말았다.

"으악! 이거 놔요!"

"조용히 해. 얌전히 교무실로 따라와."

남자는 몸부림치는 니스를 간단하게 제압하고 씨익 웃었다. 카이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른 즈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머리칼은 회색 빛이었다. 두 소년을 가뿐히 들어올린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넓은 어깨는 탄탄하게 다져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남자다운 미남으로 보였다.

니스를 따르던 소년들이 도망쳐버렸지만 그는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남자는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평민 소년과 카이스를 내려다보며 살짝 고갯짓을 해보였다.

"정신 차리고. 너희들도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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