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16화 (11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0. 소년과 아버지(3)

"아으, 혼나버렸네."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이 빠져나간 텅 빈 교실. 아시엘은 필기한 공책과 교과서를 정리하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카이스는 너 때문이잖아, 하고 대꾸하려다 씨도 안 먹힐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왜 웃었던 것일까. 아까부터 밀려드는 후회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재밌었어. 카이스, 난 이때까지 네 얼굴근육이 다 죽어버린줄 알았다니까?"

"닥치지 않으면 정말로 때릴거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농담처럼 말하던 베리스온은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닫았다. 대신 데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너네 둘 오늘부터 도서관 청소 한다며? 힘들겠네."

"어어. 대도서관 청소를 달랑 학생 둘한테 시키다니, 너무하신 거 아냐?"

아시엘은 주섬주섬 필기구를 챙기며 투덜거렸다. 대도서관은 따로 아카데미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듣기만 들었지 네 소년 다 실제로 가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굉장히 크고 넓어 온 제국의 책들이 거의 다 소장되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가야해?"

"방과 후에 3시까지."

카이스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신입생이라 수업이 빨리 끝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3시까지 맞춰서 가려면 종이 치자마자 바로 전속력으로 뛰어나가야 할 판이었다.

"...잠깐만. 세 시라고?"

아시엘은 문득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카이스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는 뜨악한 표정으로 시계 쪽으로 시선을 팩 돌렸다. 2시 56분.

".....!"

덜컹, 쾅! 두 사람은 질겁하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베리스온과 데인에게 무어라 한 마디도 없이 우당탕탕 교실의 의자와 책상을 헤집어 놓고 허둥지둥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

남겨진 두 소년은 멀뚱멀뚱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서로를 마주보았다.

".. 사이 좋네."

"..그러게."

데인의 말에 베리스온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멍청하게 그러고 서 있던 두 사람은, 갑자기 쾅! 하는 거친 소리에 깜짝 놀라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바로 방금 전에 아시엘과 카이스가 요란하게 나간 문 쪽에 낯익은 이 하나가 숨을 씨근덕거리며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순간 데인과 베리스온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뭐야, 니스. 남의 교실에 와서."

베리스온이 신경질적으로 말했지만 그- 니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리며 입을열었다.

"그 자식들 어디에 있어."

"뭐, 누구?"

데인은 짐짓 모르는 체 하며 되물었다. 레이에게 거하게 얻어맞았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니스의 한쪽 뺨은 잔뜩 부풀어오른 채 커다란 거즈로 감싸여 있었다.

"그 새끼, 빨간 눈 꼬맹이 말이야! 정말로 모른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꽈앙! 니스는 주먹으로 교실 문을 세게 때렸다. 위협적인 타격음에 두 소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베리스온은 주먹을 꽉 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아도 너한테 가르쳐 줄 의무는 없거든? 왜 다른 반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고 그래?"

"..너네들까지 날 우습게 보는 거냐?"

니스는 입술이 새하얘질 정도로 입을 앙다물고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잠시 두 사람을 쏘아보던 그는 곧 쯧, 하고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됐어. 알아서 찾을 테니."

"...뭐? 야, 잠깐!"

데인이 그를 붙잡으려 팔을 뻗으며 외쳤지만 니스는 그대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아-!"

아시엘은 눈앞에 서있는 푸른빛 건물을 올려다보며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카이스 역시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첫날에 안내를 받을 때 멀찍이서 봤던 것이 다였던 대도서관이었다. 그때도 크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 정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백색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처럼, 황실에서 지은 이 건물 역시 볕을 받아 반짝이는, 비취색이 섞인 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소용돌이 구름 모양으로 조각된 회색의 주춧돌 위에는 새하얀 석회 기둥들이 건물을 받치고 있었다. 푸른색을 입힌 벽돌들이 대리석 아래에 질서정연하게 깔려 있었고 부드러운 곡선의 벽면은 잘 어울리는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문의 위쪽에는 루카인 아카데미 대도서관, 이라는 글씨가 세련되게 새겨져 있었다.

화려하다기 보다는 우아하고 웅장한 느낌.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아시엘은 입까지 벌리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살폈다.

"굉장하네..! 이게 도서관이라고?"

감탄사를 마구 연발하는 그를 힐끗 바라본 카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정말로 어린아이 같은데, 역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데, 갑자기 정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야, 놀라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이 도서관은 아카데미의 자랑이니까요. 덕분에 관리하는 데에 뼈가 부숴질 지경이랍니다."

"....!"

낯설지만 부드러운 음성에 아시엘과 카이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문 앞의 새하얀 계단에, 언제 나왔는지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깔끔한 정장에, 조금 긴 듯한 진갈색 머리는 뒤로 넘겨 하나로 묶고 인자함이 묻어나는 듯한 눈에는 외알안경이 씌워져 있었다. 살집이 없는 볼과 키가 크지만 마른 몸이 40대가 조금 안 되어 보였다.

"학생들이 입학 몇 주만에 대도서관 청소라는 가혹한 벌을 받게 된 신입생들인가요?"

"아..."

그가 여전히 웃으며 하는 말에 아시엘은 어색하게 미소지었고 카이스는 머쓱한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반응에 원하는 답을 얻어냈는지 남자는 좋아요, 하고 만족스럽게 손바닥을 비볐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도서관의 총 관리인이자 사서이죠. 그냥 비안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자, 안으로 들어오실까요?"

"....."

아시엘과 카이스는 잠시 힐끔힐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를 따라가는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 곧 종종걸음으로 비안에게 다가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더욱이 제 일을 도와줄, 똑 부러지는 학생들이라니 기쁘네요."

그는 아이들을 안으로 이끌며 가볍게 말했다. 기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듯 비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아시엘은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폈다.

바깥의 외벽과는 달리 안쪽은 전체적으로 연한 갈색빛의 대리석과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급스러운 화분들과 엔틱 풍의 가구들, 그리고 고풍스러운 조각상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바닥에 깔린 것은 차마 밟기에도 황송한 고급스러운 카펫이었다.

비안은 두 사람을 넓은 홀의 한구석에 놓인 책생 쪽으로 데리고 갔다.

"혼자서 이 넓은 곳을 관리하려니 뼈가 휘어질 지경이었거든요. 청소는 하인들이 해 주니까 책 정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는 아마 오늘 하룻동안 대출되었다가 반납된 것들로 보이는 책 무더기를 손으로 톡톡 쳐 보였다. 그의 허리께까지 몇 겹으로 쌓인 두툼한 책들을 본 카이스와 아시엘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걸 다 해요..?"

"물론입니다. 책은 일단 종류별대로 다른 서고에 나뉘어지고 또 거기에서 연대, 저자, 제목 순으로 분류되지요. 책장과 책마다 표시가 되어 있으니까 잘 보고 제자리에 찾아 꽂아주세요."

아시엘의 말에 비안은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가장 위에 있는 책을 몇 권 집어들어 그에게 안겨주었다. 갑작스럽게 육중한 무게가 얇은 두 팔에 실리자 아시엘은 균형을 읽고 비틀거렸다. 카이스 역시 곧 비안이 건네준 책들을 받고는 저도 모르게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여기에서 다른 업무를 보아야 하니 필요하시다면 불러 주세요, 꼬마 친구분들."

"네, 네에.."

아시엘은 책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쓰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 걸린것 같은 느낌에 그와 카이스는 긴장해 마른침을 꼴깍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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