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2. 친구와 친구(2)
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사서실에 두 사람을 데려간 비안은 차와 과자를 내왔다. 그리고는 그들이 앉은 소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서 들어요."
"아- 감사합니다."
카이스는 인사를 하고는 넋을 놓고 방을 둘러보고 있는 아시엘을 팔꿈치로 툭 쳤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은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죄송해요. 잘 먹겠습니다."
"후후, 괜찮습니다. 책에 관심이 있나요?"
비안의 말에 단박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재미있어 보이는 것도 많고,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정말, 요즘 아이들 치고는 굉장히 순수한 반응이네요."
비안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소파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차가 점점 식어가고 있었지만 아시엘은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은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안에도 책이 굉장히 많아요."
그의 말대로, 비안이 개인실로 쓰고 있는 이 방 역시 사방이 책꽂이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도서관 속의 작은 도서관처럼 알파벳 순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돈된데다 섬세하게 관리하는듯 먼지도 한 톨 쌓여있지 않았다. 비안은 새삼 자신이 꾸며 놓은 이 곳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굉장히. 제가 이런 직업을 택한 것 역시 그것 때문이니까요. 아이들과 책을 너무 좋아해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도 이곳에 남게 되었죠."
"아카데미 졸업생이세요?"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카이스 역시 의외라는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에 비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네. 여러분의 선배가 되겠네요. 그것보다 아시엘 군, 차가 다 식고 있어요."
"아."
아시엘은 뻘쭘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찻잔을 집어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쿠키 하나를 입 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큰 눈은 바쁘게 방의 책들을 훑고 있었다. 비안은 그런 꼬마가 귀여웠는지 후후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로 관심이 많다면, 언제든지 와도 좋아요. 이 도서관에는 이 제국의 거의 모든 책들이 모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제 방엔 다른 나라의 서적들도 있고."
"네! 감사합니다!"
아시엘은 함박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진 비안의 말 덕분에,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벌은 제대로 받아야 하겠죠? 그러니까 앞으로 일주일, 두분 다 잘 부탁드려요."
"......"
급격하게 우울해진 두 사람은 묵묵하게 과자만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고, 비안은 생글생글 웃으며 더 들어요, 하고 쿠키를 한가득 접시 위에 부어주었다.
결국 그들이 무더기로 쌓인 책들을 다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해가 거의 질 때쯤이었다. 아시엘과 카이스는 비안의 배웅을 받고 완전히 지쳐버린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다녀왔어."
티테이블에 마주앉아 잡담을 나누던 베리스온과 데인은 문가에서 들려오는 지친 목소리에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와?"
"어어.."
데인이 말을 건네자 아시엘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서있던 카이스는 말없이 안으로 슥 들어와 자신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 수고했어. 일이 많았나 봐?"
"음.. 조금?"
베리스온이 안쓰럽다는듯 묻는 말에 아시엘은 애매하게 대꾸하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피곤한 몸을 샤워로 달랠 요량이었다. 그 때, 데인이 갑자기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는지 딱, 하고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아! 맞다. 너네들한테 혹시 니스 녀석 안 갔었어?"
"니스?"
아시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스 역시 영문을 몰라 넌지시 물었다.
"그 놈이 왜?"
"아까 너네들이 도서관에 가자마자 우리 반으로 찾아왔었거든. 무시무시한 기세로 찾아대던데. 그러다 혼자 찾아내겠다면서 나가버렸지만."
유치하긴. 아시엘은 작게 중얼거리며 갈아입을 옷을 안아들고 욕실로 향했다. 자신의 말을 대충 흘려듣는 것을 알아차린 데인은 인상을 쓰면서 덧붙였다.
"야, 그래도 조심해. 그 녀석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분명 너네들한테 복수하겠답시고 이를 갈고 있을걸?"
"아아- 그건 걱정 마."
아시엘은 몸을 빙글 돌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는 씨익 시원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겨우 그 정도의 녀석이 이빨을 갈아 봤자지. 문제 될 게 뭐 있나?"
"......"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고 믿음직한 말에 그와 베리스온은 할 말을 잃고 소년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아시엘이 다시 나 씻는다, 라며 욕실로 들어가 버리자 데인은 겨우 입술을 떼고 중얼거렸다.
"..저, 쓸데없이 남자다운 녀석."
베리스온과 카이스 역시 백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이 우려했던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사흘이 지나고 방과 후에 곧바로 도서관에 달려가는 것이 익숙해졌을때 쯤, 여느 때와 같이 책장에 매달려 낑낑거리는 아시엘과 카이스에게 비안이 다가왔다.
"저기, 두 사람 잠시 이리 와 보시겠어요?"
"....?"
새삼스러운 부름에 두 소년은 눈을 꿈뻑거리며 제각기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에게로 향했다. 비안은 그런 둘을 내려다 보며 언제나와 같이 미소 띈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제가 출장 갈 일이 생겼답니다. 정리를 다 하고 나서 문단속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출장이요?"
아시엘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렇답니다, 하고 대답한 비안은 그의 금발에 손을 살짝 얹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단 하룻동안 대출이 안 된다고 상급생들에게 이야기를 해 두었으니 더이상 사람이 오지는 않을 거에요. 카이스 군이랑 아시엘 군이 소등을 하고 문을 잠궈주셨으면 해요. 물론 책 정리도 완벽하게 해야 하지만요."
"음.."
아시엘과 카이스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비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아, 이거 감사 인사를 해야겠군요. 그럼 열쇠는 문 옆의 장식장 안에 넣어둘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밖에서 문을 잠그면 홀의 불은 알아서 꺼지게 되어 있어요."
"네."
그는 다시 한 번 아시엘과 카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곧장 개인실로 들어가 미리 싸둔 출장용 짐가방을 들고 나왔다. 비안은 도서관을 나서기 직전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당부를 했다.
"촛불같은 건 꼭 나가기 전에 꺼 주세요. 귀한 장서들이 많으니까 문도 제대로 잠궈 주시구요."
"네. 걱정 마세요."
아시엘은 작은 가슴을 콩, 치며 생글 웃었다. 그러자 비안은 안심했다는듯 한숨을 내쉬고는 바쁜 걸음을 재촉해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던 아시엘은 다시 카이스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자, 그럼 우린 하던 거나 마저 할까?"
"....."
성실한 놈. 카이스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라도 땡땡잉를 쳐도 될텐데, 어쩌다 이렇게 되버렸는지 그것은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 책을 양껏 들어올리고 다시 안으로 돌아간 직후, 아무도 없어야 할 홀에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
주변을 경계하며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는 바로 니스였다.
그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 발짝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두 사람이 도서관 청소를 하는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무작정 찾아왔다가 우연히 비안과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그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스스로 생각해도 후일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저 녀석들이 시작한 일이니까. 니스는 자신에게 소리없이 말했다. 조금만 혼을 내 주는 것 뿐이니까. 그런 거니까.
니스는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카펫 위로 올라서 아까 비안이 말한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그 안에 금빛을 띄는 팬던트 장식이 달린 커다란 열쇠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목적을 달성했다는듯 부리나케 바깥으로 달려나가, 활짝 열려 있는 도서관의 커다란 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쿠구구구, 콰앙! 육중한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굳게 닫히자 마자 니스는 열쇠구멍에 훔친 열쇠를 끼워놓고 돌렸다. 덜컥, 덜컥 하는 쇳소리가 울려퍼지고 곧 문이 단단히 잠겨버렸다. 그는 문을 두어 번 흔들어 제대로 잠긴 것을 확인한 후 깊이 심호흡을 했다.
"하아- 하아-"
긴장감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는듯 굳은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열쇠를 가진 채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