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6. 그리고 또 다시(2)
"뭐.. 일단 그런 것보다, 어떻게 할지나 얘기하자고. 놈이 무식하게 세다는 건 오늘 온몸으로 느꼈잖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케빈이 손뼉을 짝 치고 말을 꺼냈다. 그에 루이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아무래도 우리만으로는 무리인것 같으니까 병사들을 동원해야 되겠는데.."
"가능할까요?"
키프스가 끝맻은 말에 그들은 일제히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까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던, 보기에도 애처로운 군단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가까이 가기만 했는데도 그 정도였는데 토벌에 나서기엔 무리가 있었다.
"뭔가.. 사기를 끌어올릴 게 필요해요."
"하지만 그게 당장 가능할까?"
아시엘이 이마를 짚으며 하는 말에 카이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 다시 일동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음.. 그것도 일단은 미뤄두자. 어떻게 괴물을 처치할지 가 먼저야."
루이카엔은 뒷통수를 긁적였다. 아까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져 정리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시엘은 팔을 뒤로 받치고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아까 저희도 피해를 보긴 했지만.. 녀석도 꽤 많은 데미지를 받았어요. 그곳을 집중 공략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덩치가 커서 그런지 저번의 그 작은 놈들과는 다르게 자체 치유 능력은 없는 것 같고..그놈 몸뚱이 중에서 제일 많이 상한 곳이 어디지?"
케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스가 곰곰히 기억을 더듬는듯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아마 오른쪽 어깨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케빈 선배가 베고 아시엘이 마법으로 공격했었지요, 아마. 그 뒤로 큰형님도 가세했었고."
"그리고 가슴부터 배까지 내가 찢어놨어. 목 뒤쪽도 베었지."
루이카엔도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나하나 세어보기 시작했다. 키프스도 끼어들었다.
"무릎 뒤쪽에 단도를 여러 개 박았었지요. 그리고 바닥에 묶여있던 오른쪽 손도 끊어지기 일보직전일 겁니다."
"그래요?"
아시엘은 책 하나를 집어들고 맨 뒷장의 빈 페이지 하나를 부욱 찢었다. 그리고 동료들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옆에 뒀던 깃펜으로 대강이나마 슥슥 그림을 그렸다. 곧 사람을 닮은 형상이 누런 양피지 종이 위에 나타났다.
"오른쪽 어깨랑 손. 목이랑 가슴에서 배.. 그리고 무릎 뒤. 맞죠? 일전에 나왔던 다른 변종 몬스터들 은 분명 목을 베니까 바로 사라졌다면서요?"
"어. 그 망할 구슬만 남겨놓고."
자신을 향한 그의 질문에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한 마디를 덧붙이려던 루이카엔은 문득 입을 닫았다. 외부인인 키프스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흠! 어쨌든 약점이 될 만한 곳은 목이라는 건가."
"하지만 전의 녀석들이랑 같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거대한 놈의 목을 단칼에 벤다는 건 불가능하고."
아시엘은 펜으로 종이를 콕콕 찌르며 지적했다. 루이카엔 역시 그에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 무식하게 덩치 큰 녀석의 몸뚱이를 노려야지. 그렇지? 아시엘."
"네?"
갑작스럽게 그가 이름을 부르자 아시엘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루이카엔이 빙그레 웃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곧 아, 하고 눈을 빛냈다.
루이카엔은 아시엘 옆에 놓인 등유가 담긴 램프를 응시하고 있었다. 심지에 불이 붙은 채 지도와 각종 책들을 더 밝에 비추고 있었다.
"야, 뭐야. 둘이서만 그러지 마."
케빈은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시엘은 씨익 입가에 개구진 곡선을 드리우고 램프 손잡이를 잡고 들어올렸다. 빛이 일렁, 하고 바닥과 지도 위에서 흔들렸다.
"간단하지만 화끈한 방법이네요, 정말로."
"성공할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루이카젠 역시 히죽 미소지었다. 나머지 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잠깐. 불을 놓겠다고?"
"그렇지. 간간히 터뜨리기도 하고."
케빈이 경악하며 말하자 루이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아시엘 역시 그와 비슷하게 묘하게 신난 눈빛으로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케빈과 카이스, 키프스는 동시에 이마를 탁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위치가 들어간 두 사람을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키프스는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뭡니까?"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루이카엔은 느긋한 미소를 짓고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메르티스 백작가의 성은 때아닌 소란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어이, 이쪽으로 옮겨! 그건 거기에 놓고! 다 연무장으로 옮겨!"
"알겠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카스란은 어이가 없어져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옆에는 루이카엔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하나 둘 성으로 옮겨지는 수많은 물건들을 흡족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 이게 무슨 경우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게 있습니까. 몬스터 토벌에 쓸 것들이지요. 다행히 성 창고에 있던 것들로 대부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뻔뻔한 대답에 백작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희 영지의 문제이니 그 건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는 것으로 치겠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사이에 제 집무실에 있던 책 몇 권과 지도가 사라졌습니다만. 그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하나하나 따지다간 백작님의 복장만 터질 테니까요."
루이카엔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점점 더 대화가 산으로 가는 느낌에 카스란은 다시 한 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저 많은 양의 기름과 화살을 다 쓰실 생각이신 겁니까?"
"아마도요. 아, 혹시 백작님의 허락 없이 이런 일을 벌였다고 언짢아지신 것은 아니겠죠?"
루이카엔은 작게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카스란은 더욱 골이 아파져 손으로 미간을 주물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둘째 도련님이 명령하셨다며 창고에 있던 기름과 화살, 노끈과 튼튼한 밧줄을 모조리 꺼내고 있는 하인들을 마주했을때 그는 황당함에 한동안 말을 잇지도 못했었다.
"말씀대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내 성에서 외부인이 멋대로 구는 것은 달갑잖으니.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이해 감사합니다."
루이카엔은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리고 한 편, 메르티스 가의 연무장에서도 하나의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키프스의 지휘 아래 병사들이 모두 모여 창고에서 옮겨진 기름들과 밧줄, 그리고 화살들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손질 중이었다.
"알았지? 밧줄은 기름에 푹 담궜다가 화살 끝에 매는 거다. 화살촉에도 바르는 거 잊지 말고!"
키프스가 그렇게 외치자 병사들은 일제히 예! 하고 답하고는 다시 작업에 골몰했다. 그들을 뿌듯하게 지켜보던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이렇게 하면 돼?"
"네. 충분해요."
아시엘은 생긋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병사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손길이 갑자기 경쟁적으로 빨라졌다.
"어라?"
물론 그 영문을 알리가 없는 소년 기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다, 곧 순진한 한 마디를 내뱉았다.
"왠지 다들 힘이 넘치시네요."
"... 그래, 그래. 이 무자각 녀석아."
키프스는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확실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병사들은 어제와 다르게 하나같이 의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외모에 마검사라는 희귀 능력자인 아시엘이 지켜보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병사들 중 반이 그가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마 전날, 공포에 질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자신들을 뒤로 물린 채 직접 싸우던 기사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키프스는 추측했다.
그들이라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거나, 아니면 전투력의 급이 다르긴 하지만 고작 여섯 명이 괴물에게 그만큼의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희망을 얻었을지도 몰랐다.
"뭐, 어찌됐든 좋은 게 좋은 거지."
키프스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다른 쪽인 무기고 역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에 있던 대포와 포탄 따위가 밖으로 하나 둘 꺼내지는 것을 지켜보던 케빈은 혀를 쯧 찼다.
"이거 거의 전쟁 수준인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그래도 확실하게 처리하려면 어쩔 수 없죠."
카이스는 먼지가 묻은 제복을 툭툭 털며 대꾸했다.
"아까 아시엘이 부단장님께 연락해서 옆의 영지들에 공문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무기를 움직인다고 해서 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긴 하겠지만."
케빈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누구더러 열혈 바보래, 진짜 열혈 바보는 그 두 놈이잖아. 그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을 무시한 카이스는 고개를 들어 오랜만에 밖에서 햇볕을 받고 있는 대포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이 커져가고 있었다. 아시엘과 루이카엔의 합작이니 그렇지 않은 쪽이더 이상했지만.
그래도 그 두 사람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확실하게 결론이 날 터였다. 그 방식이 어떻든지 간에. 이제 남은 건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