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29화 (12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8. 몬스터 사냥(1)

밤이 깊어지고, 병사들과 일행은 조용하게 성을 빠져나왔다. 앞을 비추는 불빛도 최소화한 채 하늘에 떠있는 달의 창백한 빛만을 의지하며 기척 없이 이동하던 그들은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짐수레를 끌던 말들이 흥분하며 푸레질을 시작한 것이었다.

"...근처에 있나보군. 카이스, 말들을 풀어 줘. 최대한 조용하게 접근해야 하니까. 아시엘, 뭐 들리는 거 있어?"

루이카엔의 말에 아시엘은 눈을 살짝 감고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거대한 생물체의 거친 숨소리를 잡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면에 있어요."

"좋아."

루이카엔은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아시엘이 눈을 흘겼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사들 쪽으로 돌아섰다.

"내가 신호하면, 아까 말했던 대로 대형을 이뤄."

"네."

그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달밤, 그들은 조금씩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말들이 끌던 짐수레는 병사들이 대신 밀고 당기며 조용히 이동했다. 사위는 고요했고, 들리는 것이라곤 수레의 나무 바퀴가 끼릭 끼릭 돌아가는 소리 뿐이었다.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낯익은 폐허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허물어진 집, 움푹 패인 땅, 뽑힌 채로 말라버린 가로수.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보이는 파괴의 흔적에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짙은 어둠 때문에 달빛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들의 불안감을 한층 더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앞에 보이는 하얀 제복의 등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아시엘이 속삭이듯 말하자 그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유달리 예민한 그의 귀와 감각이 무엇을 잡아냈는지 소년은 한동안 뚫어져라 눈앞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있군. 저기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케빈 역시 중얼거렸다. 확실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채 달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병사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기사들도 어렴풋이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녀석이네."

루이카엔은 거대한 그림자를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다른 병사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작게 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알고 있지? 최대한 조용히 '그걸' 가져와. 놈은 굉장히 둔한 모양이니까 큰 소리만 안 내면 들키지 않을거야. 각자 위치로 간다."

그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움직였다. 전날과 비슷하게 루이카엔은 몬스터의 정면, 카이스는 좌측, 케빈은 우측  키프스는 후방이었다. 병사들은 몬스터를 둘러싸듯 간격을 두고 섰다. 궁수들은 활과 화살을 쥐었으며, 세 개의 대포 역시 조용히 이동해 제 자리를 찾아 두 명씩의 병사가 붙었다. 그리고 아시엘은 선배들과 병사들 사이에 서서, 가만히 호흡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병사들은 짐수레에서 네 개의 나무통을 내려 조심조심 굴리면서 기사들에게 전달했다. 각자 기름이 가득 찬 통 하나씩을 차지한 네 명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기척을 지우고 괴물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숨막히게 고요한 공간에 둥근 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병사들의 심장을 옥죄었다. 혹시라도 잘못 될까, 쿵쾅거리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앞에 서서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는 한 소년 기사가 있기에.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직접 하겠다고 나선 기사들과 영주의 동생이 있었으니.

가만히 선배들을 바라보던 아시엘은 살짝 손을 들었다.그에 따라 궁수들은 밧줄이 뒤에 연결된 화살을 활에 꿰어 시위를 당겼다. 포수들 역시 당장이라도 쏠 수 있을 태세를 취했고 궁수의 서포트를 맡은 보병들도 횃불을 든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신호가 왔다.

"됐어!"

"네!"

루이카엔의 외침에, 아시엘은 곧바로 빠르게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점점 그의 양 손바닥에 붉은색 마법진이 형성되며 발광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전한 원형의 진이 완성되자 아시엘은 스펠을 마무리지었다.

"이그니스 루 케이샤 아텐스."

그의 손에서 마법진이 사라지더니 대신 이글거리는 것 같은 붉은색 기운이 그 자리에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괴물이 이변을 느끼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아시엘은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파이어 버스트!"

콰아아앙! 순간, 몬스터의 정면에서 큰 폭발이 일고 주변이 화염에 휩싸였다. 곧이어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방에서까지 콰아앙! 하고 폭발이 일어났다.

"쿠에에에엑!"

불길 안에 갖혀버린 괴물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그리고 다시 진영 쪽으로 달려온 루이카엔이  명령했다.

"지금이야! 쏴!"

곁에 있던 보병들이 미리 기름을 먹여 놓은 밧줄에 불을 붙이자 궁수들은 곧바로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포병들 역시 심지에 불을 붙이고 괴물에게 조준, 발사했다.

피유우웅- 하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고 곧 괴물의 어깨에 직격한 포탄이 콰앙! 굉음을 내며 터졌다. 곧이어 무릎, 배 부분에 박힌 포탄 역시 공기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파박, 팍! 하고 불 붙은 밧줄을 단 화살은 정확하게 괴물의 몸에 꽂혔다. 그러자 아까 루이카엔 일행이 옮겨두었던 통들이 폭발하면서 흩어진 기름에 불이 옮겨붙으며 주변이 일시에 환해졌다. 순식간에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괴물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몸을 뒤틀었다.

"키에에에엑! 쿠어어어어어어어!"

불길이 하늘에 치솟았고, 매캐한 연기가 검은 하늘에 달빛을 더럽혔다. 케빈은 휘유- 하고 유쾌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끝내주네. - 앗!?"

그 때였다. 정신을 차렸는지 몬스터는 작게 크릉, 울음을 토하고는  한쪽 팔을 쳐들고, 불덩이가 된 주먹을 케빈과 그 근처의 병사들에게 내리꽂았다.

"우아아아악!"

"칫!"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리려던 그는 순간 멈칫하고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뒤에 있는 병사들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케빈은 주저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곧. 콰아아앙! 하는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소리가 공기를 울리고 먼지가 짙게 일었다. 바닥이 움푹 패이고 돌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케빈!"

루이카엔은 경악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욱하던 흙먼지가 조금 가라앉고, 가까스로 괴물의 주먹을 검으로 받은 채 버티고 서있는 케빈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바들바들. 그의 두 팔은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큭..."

주륵, 주르륵. 이윽고 그는 점차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지체 없이 마력을 운용해 괴물의 어깨를 겨냥해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버스트!"

펑! 콰과광! 그가 시동어를 외치자 곧바로 몬스터의 어깨에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며 불꽃이 거세졌다. 괴물은 또다른 고통에 그대로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쿠어어어어!"

"아직이다, 이 놈아!"

그리고 그 틈을 타 도약한 루이카엔은 그나마 멀쩡하게 서 있는 나무를 발판 삼아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검에 검기를 일으켜, 서걱.

약해질 대로 약해진 괴물의 팔을 베어버렸다.

".....!"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병사들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케빈을 억누르고 있던 주먹은 지지대를 잃자 힘없이 미끄러져내렸고 불덩이에 휩싸인채 몸에서 떨어져 나온 굵은 팔은 바닥으로 쿠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

케빈은 그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엄청난 압력에 속이 상했는지 입가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아아."

그는 아시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입가를 슥 닦고 손을 슬쩍 들어보였다. 탓, 하고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루이카엔은 오물이 묻은 검을 휙휙 털었다. 괴물의 점액질 체액이 떨어져나오며 튀었다.

"내 검에 그을음 묻었으면 책임져, 이 자식아."

"뭐래, 망할 단장이."

케빈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몸을 일으키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때- 한쪽 팔을 잃은 괴물이 잔뜩 성이 난 듯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길게 울음소리를 내뿜었다.

"크어어어억! 키에에에엑!"

이때까지와는 다른, 살기가 진득하게 배어나오는 절규가 귀에 파고들었다.

기사들은 굳어진 얼굴로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전신이 화염에 휩싸인 채, 몬스터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건물 하나를 우지끈 밟아 박살냈다.

이윽고 괴성을 내지르는 것을 멈춘 괴물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몸이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듯, 눈 대신 뚫려있는 두 개의 구멍에서 피처럼 새빨간 빛이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네요."

아시엘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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