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31화 (13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0. 몬스터 사냥(3)

"....하."

누군가가 내뱉은 한숨에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마른 세수를 했다. 그을음과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처에서 난 피가 섞여 손바닥에 묻어났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삼 몸 이곳 저곳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케빈은 인상을 찌푸리고 어깨를 주물렀다.

"나 참. 우리 기사단은 사람 너무 굴린다니까."

"동감이에요."

아시엘은 작게 웃으며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마법을 갑자기 과하게 사용해서 그런지 속이 울렁거리고 어질어질했다. 카이스와 키프스 역시 멍하니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엄습하는 피로감에 그들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채 한동안 꼼짝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저마다 맨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빙빙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려 눈을 감고 있던 아시엘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잡혔다.

"....?"

"야, 왜 그래?"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키프스는 이상하다는듯 눈을 꿈뻑이며 말을 건넸다.

"죄송한데 잠깐만 조용히 해 주실래요?"

"..아, 미안."

그는 재빨리 입을 꾹 닫았다. 다른 이들 역시 덩달아 숨을 죽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병사들 역시 어리둥절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

아시엘은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불에 타서 엉망이 된 주변과 허옇게 뼈를 드러내고 있는 건물들 그리고- 방금 생겨난, 시커먼 웅덩이였다.

소리의 근원을 알아챈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헬쓱해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루이카엔은 야, 하고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곧 그 역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부글거리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괴물이 녹아버린 곳에 남아있는 끈적한 웅덩이에서 기포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

마찬가지로 사색이 된 그들은 검을 거머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처음에는 겨우 눈에 보일 정도로 작게 올라오던 기포는 점점 갈수록 크기도 커지고 빈도도 잦아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부글부글 급격히 끓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이거!"

케빈은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뒤로 물러섰다. 검은 액체에서 일어난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곧 코를 찌르는 지독한 악취가 풍겨와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냄새 뿐만이 아니었다. 웅덩이 위에 마치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농도 짙은 마력에, 아시엘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야, 아시엘. 이건 분명-"

"네. 그 때의 마력이랑 같아요."

케빈 역시 무언가 알아차린듯 얼굴을 와락 찌푸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액체는 점점 더 격하게 끓어올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잠잠해져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야."

루이카엔은 기사들은 검을 꽈악 쥐었다. 겉보기에는 일단 얌전해진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력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내상이 채 낫지 않은채 마법까지 남발했던 아시엘의 얼굴은 완전히 백짓장처럼 질려버렸다.

"야, 야. 괜찮아?"

"하하..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잖아."

카이스가 걱정스럽게 건네는 말에 그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멀쩡하지 못한 건 나 뿐만이 아니잖아요."

"일단 그렇긴 하지."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 케빈이나 여기저기 부딪히고, 불에 데이고 긁힌 자국 투성이었다. 그나마 상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카이스와 키프스 역시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안 끼지. 침 바르면 나아."

"그러다 또 아델한테 혼난다."

케빈이 툴툴거리자 루이카엔은 우스갯소리처럼 덧붙였다. 이 상황에 무슨 대화를 하는 거야, 병사들은 황당해졌지만 그 말을 밖으로 꺼내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그 때- 드디어 검은 액체가, 크게 요동쳤다.

푸슉, 푸슉. 한데 뭉친 끈적한 체액이 마치 기둥처럼 하늘로 치솟아올랐다. 시커먼 점액질 기둥은 하나 둘씩 갯수를 늘려갔다.

"으아악! 저게, 저게 뭐야!"

"호들갑 떨지 말고 물러서. 도망쳐도 괜찮아."

루이카엔은 입가에 곡선을 그리며 비명을 지르는 사병들에게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듣도 보도 못했을 현상이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 역시 기사 생활 십여 년 동안 구경은 커녕 귓등으로도 들은 적 없는 일이었다.

검은 액체들은 스스로 꿈틀꿈틀거리더니 곧 제멋대로 뭉쳐져 제각각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팔 부분이 사마귀의 그것처럼 변형된, 사람의 모양을 띈 이족보행 몬스터들. 그는 차분하게 그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서른.

"야, 야.. 장난 아니네."

케빈은 씩 웃으며 자세를 낮추고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 그의 뺨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키프스는 품에서 곡도 두 개를 꺼내 양 손에 쥐고 다급하게 외쳤다.

"피해야 합니다. 너무 위험해요. 다들 지친 상태인데.."

"키프스 님."

루이카엔은 이마를 슥 훔치며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키프스는 의아하게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이카엔은 히죽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저희는 이쪽이 더 취향이라."

"네?"

그 뜻모를 말에 키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아시엘이 몸을 풀듯 검을 붕붕 휘두르며 뒤를 이었다.

"싸움이라면 역시 작전이고 뭐고 다 치워놓고 몸 가는 대로 하는게 제맛이니까요."

"그렇지! 뭘 아네."

케빈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키프스는 아연해져 마지막 희망을 걸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이스 역시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말했다.

"동감입니다."

".....하아아아."

키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들 이러는 거야,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차마 뭐라고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공격 태세를 취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루이카엔은 그런 키프스를 힐끗 곁눈질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리라고 여기에서 물러났다가는 저 놈들 당장에 마을로 내려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인가요."

키프스가 살짝 뒤로 물러나며 웃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웅덩이 안에 서 있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그럭, 덜그럭. 굳은 관절을 풀고 목을 울려 크르릉거리는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케빈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빨리 꺼져버려! 방해되잖아."

"...아. 네, 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듯, 그들은 지체 없이 뒤로 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아시엘은 킥킥 짓궂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역시 훈련 다시 하는게 낫지 않아요?"

"시끄러워, 나도 알고 있다고."

키프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제 몬스터들은 슬슬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매우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손 대신 붙어있는 날이 아직 채 꺼지지 않은 불의 빛을 받아 예기를 발했다.

"동 트기 전에 끝내죠."

"그걸 말이라고."

카이스가 툭 내뱉는 말에 케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놈들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끈적한 액체가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검은 기운이 그들 하나하나에게서 스멀스멀 올라고오 있었다.

"키에에에엑!"

선두에 선 몬스터가 찢어지는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던듯 몬스터 떼가 일제히 빠른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섯 사람은 씨익 미소지으며 각자의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일시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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