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3. 하얀 사냥개(3)
"아이고오.. 죽겠다."
루이카엔은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곡소리를 냈다. 사정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키프스가 안내해준 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아시엘과 카이스, 그리고 케빈 역시 그대로 뻗어버렸다.
"진짜 우리 기사단은 사람을 너무 험하게 굴린다니까요."
어느새 입버릇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아시엘은 소파에 기댔다. 현장 정리를 병사들에게 맡겨두고 그들이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이 터 하늘이 밝아져오고 있었다. 키프스에게 사정 설명을 하자 그는흔쾌히 게르만을 성으로 옮겨 치료사에게 던져주었고,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을 이쪽 방으로 몰아넣은 후 하인을 시켜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내 말이. 진짜 터무니없는 야근이었다고."
"파견 한 번 나오면 몸이 남아나지를 않아요."
케빈에 이어 카이스까지 중얼중얼거리자 루이카엔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아아- 월급 받아먹기도 정말 힘들어."
"동감이에요."
아시엘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방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뼛속까지 지쳐 입을 열기도 귀찮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점들 때문에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는지 다시 케빈이 입술을 뗐다.
"야, 그래서 그 남자는 도대체 뭐야? 어째서 멀쩡하던 인간이 괴물의 핵이 되어 있냐고."
"비정상적인 일들은 이때까지 많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경비대의 지하 감옥에 설치되어있던 이상한 마법 트랩이라던가 갑자기 도심에 나타난 몬스터들이라던가."
아시엘은 소파에 드러누운채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루이카엔은 그 뒤를 이어 덧붙였다.
"다 어떤 식으로든지 대공 전하와 관련되있고 말이야. 이번 일도 그 연장선이라면.. 게르만이라는 남자, 슈베이만 전하의 수하와 마약 거래를 시도하고 그 이상한 구슬을 받았다고?"
"네. 꽤나 꺼려하는 걸 보아하니 아마 그게 뭔지도 알고 있었을 거에요. 그걸 제가 빼돌린거고요. 어쩌면 그때 구슬을 잃는 바람에 그런 괴물이 된 것일수도 있고.. 정말로 그런 거라면 처음에 저한테 공격을 퍼부었던 것도 이해는 되죠."
아시엘은 천장의 샹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 때 구슬을 훔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리고 그것을 도둑맞는 바람에 어떤 종류의 벌로써 그런 괴물이 된 것이었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잠자코 있던 카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해? 인간을 거대 몬스터로 만든다는게. 그리고 그 말대로라면 도시에 갑자기 나타났던 그 변종 몬스터들도 의도된 거라는 거잖아."
"그렇지. 어쩌면 그것들도 만들어진 걸지도 모르고. 골렘과 비슷한 느낌으로 말이야. 지능이 있는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아시엘의 말에 그들은 여러 마리로 분열된 후, 거의 싸움에 대한 본능과 핵을 지키려는 무의식만으로 움직이던 몬스터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다거나 의식이 있는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게르만 역시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하지만 인간의 기술로는 불가능해.. 골렘도 마법과 연금술의 조합의 극치야. 그렇게 많은 숫자를, 그것도 재생하는 능력까지 있는 괴물들을 만들어내기는.."
그는 말끝을 흐렸다. 구슬의 조사를 부탁했던 탑의 캐롤 교수에게도 아직 연락이 없었고 독자적으로 알아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인간의 기술도 아니고, 자연적인 현상도 아닌.
"....아."
"...? 왜 그래?"
갑자기 아시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탄성을 흘리자, 루이카엔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시엘은 잠시 고민에 빠진듯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다 곧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그럴 리 없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 그래?"
"그냥 말도 안 되는 잡생각 좀 해봤어요."
케빈도 눈썹을 휘며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석연치 않은 그 태도에 불만스러워진 두 선배가 무어라 캐물으려 입을 막 열었을 때, 마침 밖에서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의 상대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 키프스는 방에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늘어져 있는 기사들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면서, 결국엔 이 상태입니까? 그러게 누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날뛰라고 했습니까. 그러니까 다들 몸이 걸레짝이 되지요."
"이런 잔소리라니, 어째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케빈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손을 설설 내저었다. 나머지 이들 역시 똑같이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쓴소리- 즉 그들 모두 어디서나 많이 듣는 핀잔이라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치료사를 모셔왔으니까 치료부터 하시죠. 목욕물도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
그들은 그제야 키프스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게 기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그의 곁에 서있던 백의의 여성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가 펴고 살짝 웃어보였다.
"치료사 아일린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손에 붕대와 가위, 갖가지 약초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눈만 꿈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네 사람을 쭉 둘러보더니 가장 먼저 아시엘에게 다가갔다.
"먼저 상처를 좀 보여주시겠어요? 여기서는 좀 그러니까 일단 옆방으로 옮겨서 하는 게 낫겠어요."
"네? 옆방에요?"
아시엘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아일린은 뭐가 이상하냐는듯 고래를 갸웃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금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남자 분들도 많으니까."
".....네?"
아시엘의 짧은 되물음을 끝으로, 순간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자 원인제공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그녀는 순수한 호의로 가득찬 미소를 지으며 아시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동료 분들이 믿음직하다지만, 여성은 몸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어서 가요."
".....푸큭!"
루이카엔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아, 위험했어. 아시엘의 원망 어린 시선과 딱 마주쳐버린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정은 케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는 있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는 숨길 수 없었다. 키프스 역시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웃음을 꾹 눌러담고 있었고 카이스는 친구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웃지 말아요! 카이, 너도 그렇게 보지 말란 말이야!"
아시엘은 결국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는지 그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해 밖으로 아낌없이 내보내고 말았다.
"크하하하하! 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핫! 어쩌냐, 너! 나중에 시집가야 되겠다."
"조용히 해요!"
배까지 잡고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는 케빈과 눈물을 찔끔 훔치며 놀리듯 말하는 루이카엔에게 아시엘은 고함을 쳤다. 하지만 이미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카이스와 키프스에게로까지 전염되고 말았다.
"미안.. 풉.. 웃으면 안 돼는..큽.."
"흐흐흐흐. 너무 화내지, 큭, 마. 그래도 호의였으니까, 푸훕."
부들부들. 아시엘의 한쪽 눈썹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팍, 퍽, 퍽! 푹. 하는 둔탁한 소리가 짧게 들려왔고, 그들은 일제히 웃음을 멈췄다.
"......"
깔깔거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루이카엔은 딱딱하게 얼어버린 목을 간신히 돌려 바로 뒤의 벽을 확인했다. 아직도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방금 공기를 가르고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치고 지나간 단도가 있었던 일을 증명하듯 굳게 박혀 있었다.
나머지 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바로 옆에 기세 좋게 박혀있는 것들- 단도와 테이블 위에 있던 뾰족한 펜, 하인이 가져다준 간식 접시의 포크와 나이프- 를 힐끔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 웃었다가는 죽는다, 라는 위험 신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더 해요?"
아시엘은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언제나처럼 광채가 날 것만 같이 아름답고 깨끗했지만- 어째서일까. 무시무시한 공기가 그에게서부터 엄습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결국 그들은 얌전히 꼬리를 내렸다. 아직까지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치료사, 아일린은 영문을 모르는 채 의아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