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3. 하얀 사냥개(4)
"죄송해요.. 제가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네요."
아일린은 아시엘의 상처를 치료하며 송구하다는 얼굴을 했다. 크게 베인 곳에 소독약이 닿자 새삼 화끈거며 쿡쿡 쑤시는듯한 느낌에 아시엘은 인상을 썼다.
"으.. 아니에요. 익숙하니까, 뭐.."
"그럴 만도 하겠어요."
그녀는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붕대를 꽉 감아주었다. 익숙해, 익숙하다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이들은 속으로 소리없이 외쳤다. 괜찮은데 전력으로 단도를 던지냐! 하지만 그들중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저 입만 뻥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과 친구의 그런 이상 상태에도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이리저리 둘러볼 뿐이었다.
"으.. 역시 붕대는 좀 불편한데요."
"절대로 풀지 말아요. 상처가 벌어지면 큰일이니까."
아일린은 단호하게 말하며 이번에는 루이카엔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살짝 곤란하다는듯 눈썹을 휘고 미소지었다.
"이런 미녀 치료사님이 치료해주신다니 설레지만, 전 붕대는 좀.."
"안 돼요! 답답해도 감고 있어요."
벌써 두 번째 똑같은 말을 내뱉은 그녀는 어김없이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꽉꽉 둘러주기 시작했다. 관통상을 입은 어깨가 순식간에 하얀 붕대로 감기자 루이카엔은 하아,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러면 수련도 못 하는데."
"그러게요."
아시엘도 꿍얼꿍얼 덧붙이자 키프스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꼴이 되고도 수련을 할 생각입니까, 당신들은? 아까내 말은 어디로 흘려들은 거에요? 몸 좀 사리라니깐."
"아무렴 어때."
"아무렴 어때, 가 아닙니다. 당신들 사람 말 안듣는다는 소리 많이 들어봤죠?"
케빈이 태연하게 하는 말에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기사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뻔뻔한 얼굴로 일제히 대꾸했다.
"가끔."
"하아...."
키프스는 답답함에 이마를 턱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시엘은 어쩐지 그에게 연민이 느껴져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며칠 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잔소리하는 엄마 모양새가 되어 버린것일까.
"뭐 어때요. 다들 사지 멀쩡하면 다행이지."
"내가 나름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너랑 네 선배들 사고방식은 따라갈 수가 없어."
키프스는 힘빠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빈까지 치료를 끝낸 아일린은 걷어올렸던 소매를 바로하고 짐을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제가 한 건 응급처치 정도밖에 안 되니까, 돌아가면 제대로 치료를 받도록 하세요. 붕대 절대! 풀지 마시고요."
"...치료? 돌아가서?"
순간 케빈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돌아가서 치료- 즉 황성에서 치료를 받으라는 말은.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루이카엔과 카이스 역시 창백하게 질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시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치료받으러 갔다가 그대로 이 세상이랑 작별해야 할지도 모르는데요?"
"맞아. 칼이나 단검 같은걸로.."
케빈이 그렇게 거들자 루이카엔과 카이스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황성의 괴팍한 치료사 노인에게 한 번씩은 크게 데여본 경험이 있는 터였다. 귀찮으니까 꺼져, 라고 외치며 단도를 내던지거나 왜 또 왔냐고, 이번에야말로 직접 죽여준다고 수상한 약물을 들이밀거나. 갈 때마다 달라지는 반응 덕분에- 하나같이 생명의 위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하아아아아..."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자, 키프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고생하고 사나 보네, 동생아.."
"...하아."
카이스는 대꾸하는것 대신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똑똑. 문득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방 안의 이들은 고개를 들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루이카엔은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곧 정중한 목소리가 새어들어오고 문이 달칵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깔끔한 하인복을 입은 한 남자였다. 아일린은 자신이 끼일 곳이 아니라는 것을 대충 알아차리고는 기사들에게 꾸벅, 간단히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것을 힐끔 곁눈질로 확인한 하인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가 폈다.
"마님께서 여러분의 무사 귀환을 매우 기뻐하고 계십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지만 모두들 피곤하실듯 하니 괜찮으시다면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만 지금 거처를 방문해주십사 하십니다."
"어머님이?"
키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이카엔은 잠시 흠- 하고 턱을 쓰다듬다가 곧 순순히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쭉 켜며 입을 열었다.
"으그그!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만 기다려 줘. 아직 이 꼴이니까."
그는 자신의 드러난 상체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그 말에 아시엘은 불안하게 단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루이카엔은 그와 눈을 맞추며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잠이나 자고 있어. 금방 올테니까."
"하지만..."
어제 그렇게 심한 말을 들었는데, 아시엘은 뒷말을 속으로 꿀꺽 삼켰다. 미우나 고우나 이 곳에는 백작부인의 아들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것이었다. 대충 그의 생각을 짐작한 루이카엔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넌 뭘 그렇게 신경쓰는 거야. 정작 자기 일은 생각도 안 하고."
"맞아. 제일 험한 꼴 당한건 네녀석이잖아.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키프스 역시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고 어깨를 으쓱하자, 무어라 대꾸하려던 아시엘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진 것이었다. 루이카엔은 큭큭 웃으며 키프스가 가져다 준 새 옷을 챙겨입었다. 매무새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그는 다시 한 번 아시엘의 머리에 짓궂게 손을 척 올렸다.
"그럼 형님 다녀온다."
"누가 형님이에요."
아시엘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툭 내뱉았다. 그 반응이 마냥 재미있는지 루이카엔은 연신 빙글빙글 웃으며 하인을 따라나섰다. 그러자 키프스 역시 몸을 일으켰다.
"저도 같이 가죠. 다른 분들은 잠시 쉬고 계세요. 식사시간때 다시 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카이스의 인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하인을 따라 복도로 나섰다.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살짝 방문을 닫은그들은 몸을 돌려 카펫을 밟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바닥에 깔린 두터운 천 때문에 발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왔다.
".. 영 느낌이 좋지만은 않네요.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인것 같습니다."
키프스가 힘빠진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에 루이카엔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순간 제대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키프스는 의아한 눈으로 루이카엔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씩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아무래도 조금 실례를 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래도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아 주세요."
키프스는 애매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모호한 웃음만 얼굴에 띄울 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사람은 앞장서는 하인만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복도와 홀이 이어지는 곳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키프스였다.
"저는 이대로 형님께 가 보겠습니다. 조금 있다 뵈죠."
"그러십시오."
루이카엔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그 역시 히죽 웃으며 목례했다. 그렇게 둘로 갈라진 후, 하인은 아무 말 없이 루이카엔의 성의 안으로 안내했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내부는 딱히 구경할 것도 없어 그는 슬슬 지루해지려고 했다. 아시엘은, 그 녀석은 뭐가 그렇게 신기해서 하나하나를 다 뜯어보고 다니는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듯 중얼거린 그는 문득 하인이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자리에 섰다.
굳게 닫힌, 무거운 목제 문이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거의 꾸며지지 않고 최소한의 조각만 되어 있는 딱딱한 느낌의 고동색 문고리를 잡은 하인은 그대로 똑똑, 노크했다.
"마님.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페일의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는 두 손으로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곧 벌어지기 시작하는 문 사이로 그녀의 방 안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허락을 구한 루이카엔은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인기척을 느낀 페일이 그쪽으로 돌아서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