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37화 (13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5. 죽어버린 숲(1)

백작의 집무실 앞. 잠시 그 앞에 서서 주저하던 키프스는 손을 들어 노크했다. 전날 아침, 한창 사냥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잠시 만났던 것 이후에는 전혀 카스란을 만나지 못했었다. 오면서 마주쳤던 하인들에게 물어봐도 오늘은 한 번도 못 봤다는 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또 심사가 뒤틀린 건가.'

키프스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잠시 후. 혹시나 없거나 있어도 대꾸를 하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걱정과 달리 안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왠일이지? 키프스는 반가움보다는 의아함이 앞서 고개를 갸웃하며 그는 문을 열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아프다며 조명을 어둡게 해 둔 평소와는 다르게, 내부는 은은한 햇살에 감싸여있었다. 언제나 닫아두었던 커튼이 조금 열려 그 틈으로 오후의 볕이 스며들어오고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커튼을 다 열어 두시고."

"기분 전환이다. 신경 꺼."

키프스가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카스란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툭 내뱉았다. 그는 집무용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백작의 검은 눈동자가 책상 한 귀퉁이에 내려앉은 한 줄기의 햇빛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본 키프스는 작게 미소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 아무것도. 너는 무슨 용무지?"

카스란은 눈을 감고 미간을 문질렀다. 동생은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냥 오늘 하루종일 보이지 않으시기에. 몬스터 사냥의 결과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네가 빙글거리면서 여기에 서 있으니 당연히 성공했다는 거겠지."

백작은 여전히 동생을 바라보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키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놀랍게도 우리 병사들 중 사상자는 0명입니다. 기껏해야 생채기 뿐, 다친 사람도 전혀 없어요. 그들이 호언장담한 대로 말입니다."

"...그래."

카스란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복잡한 감정이 미미하게 깔려 있었다. 카이스와 똑같은 흑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책상 한 켠에 걸려 있는 한 조각의 햇빛에 닿아 있었다.

키프스는 잠시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씨익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대신 정작 본인들은 너덜너덜해졌지만요. 막판엔 저까지 쫒아내고 마구 날뛰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지만요."

"치료는?"

"아일린 양을 불러서 어떻게든지 했습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동생을 힐끗 곁눈질한 카스란은다시 시선을 옮기고 생각에 잠겼다. 톡, 톡, 무의식중에 움직인 그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며 일정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키프스는 눈으로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다,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궁금하시다면 저와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뭐?"

카스란은 곧바로 황당하다는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하지만 동생은 아랑곳하지않고 빙글빙글 웃으며 뭐가 문제냐는듯 덧붙였다.

"제가 볼 땐, 형님이 그녀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이 아니면 영영 그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겁니다."

"......."

무어라 대꾸하려던 백작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그가 그 녀석이라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이 그런 생각 때문에 어제부터 심란했던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음..."

카스란은 골이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확실히 머릿속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 된 것은 그 때 이후-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꼬마에게 목숨이 구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였다.

"하아... 그래, 가자. 돌려받을 것도 있으니."

결국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키프스는 킥킥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형제는 나란히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말없이 복도를 걸어 케빈과 아시엘, 카이스가 머물고 있는 방 앞에 다다랐을 때 마찬가지로 방으로 돌아오고 있던 루이카엔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 루이카엔 경. 어머님과의 대화는 끝내셨습니까?"

"예. 대충은요."

루이카엔은 여유롭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 박자 늦게 백작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까닥하고 숙였다.

"여기까진 왠일이십니까?"

"제 책과 지도를 아직까지도 안 돌려주셨지 않으셨습니까."

카스란은 살짝 인상을 쓰고 대꾸했다. 그에 그저께 밤에 아시엘이 '빌려' 왔다던 책들과 지도를 떠올린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랬던가요?"

그들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가장 먼저 침대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사과를 우적우적 씹고 있는 케빈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의 소파에서는 아시엘이 카이스에게 기댄 채 꾸벅꾸벅 졸다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아, 오셨어요?"

"그냥 자지, 왜 일어나."

비몽사몽간에도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다가간 루이카엔은 장난스럽게 소년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아시엘은 머리칼이 엉망이 되기 시작하자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으아아! 무슨 짓이에요!"

"뭐 하는 짓이긴, 너 괴롭히는 짓이지."

루이카엔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투닥거리기 시작했지만, 카이스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까 아시엘이 깼을 때 마찬가지로 눈을 떴지만, 그의 시선은 줄곧 한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 큰 형님?"

"어?"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카스란을 부르자, 아시엘과 케빈은 그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평민 주제에 불손하다, 며 불쾌해했겠지만 이제 말해봤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카스란은 푹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가져간 책과 지도, 돌려주지 않겠나."

"아, 맞다. 깜빡했네요."

몰래 빼돌렸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전혀 없는지 아시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 뻔뻔한 작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루이카엔 및 세 사람은 골이 아픈듯 이마를 턱, 짚는 백작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엘은 움직이기도 귀찮다는듯 구석에 쌓아둔 책들과 지도 쪽으로 손을 뻗고 간단한 마법을 시전했다.

"플라이."

그의 손바닥에 잠깐 마법진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희미한 빛에 감싸인 책들이 둥실 공중에 떠올라 천천히 카스란 쪽으로 다가갔다. 백작이 어리벙벙해져 멀뚱멀뚱 그것을 보고만 있자 아시엘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안 받으세요?"

"아, 아.

카스란은 그제야 팔을 뻗었다. 그러자 곧바로 마법이 해제된 책들이 툭, 떨어져 그의 품에 안착했다. 뒹굴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빈은 뼈만 남은 사과를 이리저리 흔들며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컨트롤은 정말 죽인다니까. 속은 이제 괜찮냐? 아까 마법 너무 많이 써서 어지럽다며."

"이 정도는 문제 없어요."

아시엘은 손을 휘휘 내젓고는 다시 카이스의 어깨에 푹 기댔다. 카이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입을 열었다.

"자려면 누워서 자."

"괜찮아!"

아시엘은 히죽 장난스럽게 웃었다. 순식간에 백작인 자신에게서 신경을 꺼 버리는 그들의 모습에 카스란은 황당해졌다. 이들 중의 대다수가 그보다 지위가 낮-물론 셀레니스라는 이유로 모든 것들이 설명되기는 하지만- 은데다 나이도 루이카엔을 제외하고는 적었다.

"하아.."

"형님. 아까 할 말이 있으시다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저 녀석 잘 태세인데, 그 전에 하셔야죠."

"....."

아, 때리고 싶다. 하필 이 타이밍에 저런 말을 꺼내는 동생에게 카스란은 살심이 치솟았다. 그 덕에 카이스는 물론이고 루이카엔과 케빈까지 자신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정말로 한 대 걷어찰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다.

하지만 천진한  빛이 서린 아시엘의 빨간색 눈과 마주치자, 이상하게도 순식간에 차분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몇 시간씩 고민했던것 치고는 꽤 쉽게 말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 고맙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네?"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표정이 묘해진것은 나머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키프스만이 쿡쿡 소리 죽여 웃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뻘쭘한 기분에, 카스란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때, 나를 위해 마법을 계속 유지했던 것. 고맙다."

"아..."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듯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카스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던 남자의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뭐, 괜찮아요. 다 살았으니 된거죠."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시엘은 시원스레 미소지었다. 일말의 적대감이나 분노 따위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에 오히려 얼이 빠진건 카스란이었다.

"... 그걸로 끝?"

"왜요? 돈이라도 주시게요? 셀레니스 기사단은 임무에 관해서 황성에서 나오는 월급 외의 돈을 받으면 안 됀대요."

참 답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그는 뭐가 문제냐는듯 눈을 꿈뻑이는 소년을 바라보다 결국 픽, 하고 힘빠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그들을 쳐다보던 케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낄낄거렸다.

"저 녀석 앞에서 안 무너질수 있는 사람은 없다니까."

"그렇지. 복장 뒤집히거나 넘어가거나, 둘 중 하나야."

루이카엔 역시 옆에서 거들었다. 아시엘은 제가 뭘요, 하고 잠시 툴툴거리더니 곧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일행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지만 그것으로 끝, 곧 잠들 태세인 아시엘을 위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카스란 역시 한번 더 한숨을 푹 내쉬고 방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런데 그 때, 반쯤 잠이 든 듯 얌전히 있던 아시엘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맞다!"

"우앗, 깜짝이야! 자는 거 아니었어?"

바로 곁에 서있던 루이카엔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시엘은 그는 안중에도 없이 언제 졸았냐는듯 또랑또랑하게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백작님! 저한테 고맙다고 하셨죠?"

"뭐?"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카스란은 고개를 돌리고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아시엘은 히히, 하고 방긋 웃고는 소파에서 내려와 그에게로 척척 걸어갔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카이스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루이카엔과 케빈은 동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아시엘은 다짜고짜 그에게서 지도를 빼앗았다.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 뭘 말인가."

아시엘은 지도를 활짝 펼쳐 그를 향해 들이밀었다. 나름 소중하게 보관하던 지도에 못 보던 표식이 커다랗게 생긴 것을 발견한 카스란이 뭐라 말하기도 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제가 표시해 놓은 숲 있잖아요. 십 년 전쯤에 다 말라버렸다는. 거기에 좀 데려다 주세요."

"뭐?"

그 뜬금없는 요구에 카스란은 황당하게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한없이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거기, 통제됐다고 들었는데 백작님이라면 들어갈 수 있죠? 조사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래요."

"야, 야. 거긴 왜?"

케빈이 황급히 끼어들었지만 아시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카스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조용히 그에게 답할 것을 종용할 뿐이었다.

카스란은 눈살을 와락 찌푸리고 내가 왜, 라고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돌려 아시엘과 눈을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하아."

그는 이 방에 들어선 뒤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결국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