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6. 죽어버린 숲(2)
"피곤해 죽겠는데 이게 또 무슨 짓이야."
한 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머리를 북북 긁던 케빈은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결국 카스란과 키프스, 그리고 기사들은 각자 말 한 마리씩을 끌고 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었다. 부상까지 있는데 말은 절대로 안 된다며 펄쩍 뛰는 동료들 덕에 카이스의 뒤에 타게 된 아시엘은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러니까 저랑 백작님 둘이서만 가겠다니까요. 왜 다들 따라나오고 그래요?"
"우리가 미쳤냐, 몸도 성하지 않은 놈을 뭐가 있을지 모를 곳에 혼자 보내게?"
곧바로 선배의 고함이 터져나오자, 그는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자신의 허리를 꼭 잡고 있던 아시엘의 손이 풀리는 것을 느낀 카이스는 살짝 인상을 쓰고 잔소리를 했다.
"꽉 잡아. 떨어질라."
"네-"
아시엘은 착한 학생처럼 대답하며 다시 친구를 붙잡았다. 그들의 옆에서 천천히 말을 몰던 키프스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사랑받고 있네. 나중에 시집간다고 하면 한바탕 난리 나겠군."
"시집 갈 일 없으니까 신경 끄세요."
아시엘은 미소짓는 얼굴로 산뜻하게 대꾸했다. 다시 대화가 위험한 패턴으로 흘러가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끼어든 루이카엔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뭔지는 몰라도 어차피 우리 일이랑 관련 있는 일일 테니까. 그런데 왜 숲이야? 갑자기 말라 죽는 숲이 드물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
"아뇨.. 그냥,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잠깐 확인만 하려는 것 뿐이에요."
아시엘은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이번에도 확답을 내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 케빈과 단장은 끙, 하는 답답한 소리를 냈지만 더이상 캐묻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가장 선두에 서 길을 안내하던 카스란은 어이가 없어져 입을 열었다.
"그것으로 되는 겁니까? 정확한 목적도,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았잖습니까."
"별 상관 없습니다. 저 녀석이 간다니까 같이 가는거지. 아시엘이 의미 없는 일을 하진 않으니까요."
루이카엔은 쾌활한 곡선을 입가에 그렸다. 그 때, 그의 말이 히히힝, 하고 푸레질을 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어?"
"어라?"
나머지 말들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스의 말은 갑자기 뒷발질을 하며 주춤 물러섰고 케빈의 말은 아예 우뚝 서서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카스란 역시 흥분해 울음을 내뿜는 말의 고삐를 세게 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저 숲, 말라죽은 뒤로 가본 적 없죠?"
아시엘의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에 시선을 주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숲의 경계선이 눈에 들어왔다. 죽었다는 말이 사실인듯 희미하게 보이는 나무들은 잎이 하나도 달려있지 않고 말라있었다.
"역시 네 촉이 정확했던것 같네, 아시엘. 저 숲에 뭔가 있어."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케빈은 쳇, 하고 거칠게 혀를 찼다.
"이놈의 영지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이 모양이냐.. 말은 여기에 두고 가야겠네."
"그렇네요.."
아시엘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결정되자 일행은 말에서 내려 그들을 나무 한 그루에 묶어두고 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숲 안에 들어갈겁니까? 수 년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니 제대로 된 길도 없을 텐데요. 자칫하면 헤메게 될 겁니다."
"음.."
키프스가 묻는 말에 루이카엔은 자연스럽게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카이스 역시 바로 옆에서 걷는 친구에게 시선을 주었고, 케빈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스란까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아시엘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왜 절 봐요?"
"왜냐니. 여기에 볼일 있다고 한 건 너잖아. 어쩔 거야?"
루이카엔은 소년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단장의 손을 치운 아시엘은 미안한 기색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가능하다면 들어가보고 싶은데. 어디까지일지는 저도 몰라요."
"그럼 결정. 길은 어떻게든 되겠지."
키프스와 카스란은 전혀 단장답지 않게 무책임한 말을 툭 내뱉은 루이카엔에게 황당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인 카이스와 케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말에서 내린지 2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숲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멀리서 보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걸음을 멈췄다.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 속에 섞인 좋지 않은 기운 역시 그들의 감각을 미세하게 자극했다.
"..이걸 오싹하다고 해야 하나."
카스란은 메마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숲은 그야말로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말라 죽은 나무들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마치 무덤을 파헤쳐 뼈를 드러내놓은 것 같았다. 더 이상 잎을 키워내지 못하는 가지들이 위태롭게 하늘을 향해 뻗은 손에 햇볕이 막혀 버렸는지 숲 안은 어둡기까지 했다.
바닥에는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채 누렇게 비틀어진 풀들이 아무렇게나 깔려 있었다. 아시엘이 살짝 허리를 숙여 빼빼 마른 잎을 살짝 건들이자 그것은 곧바로 바스락, 소리와 함께 부숴져버렸다.
"좀 찝찝하기는 하지만."
그는 자세를 바로 세운 후 손을 탈탈 털고 스릉, 레이피어를 뽑았다. 가볍게 검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 꽤 큰 흠집을 낸 아시엘은 다시 뒤돌아 일행들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어쨌든 가볼까요?"
"그러자, 꼬맹아."
케빈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이 아니거든요, 하고 바로 날아드는 아시엘의 불평과 함께 그들은 죽음의 숲으로 발을 들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밖에서 바라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스산한 광경이 그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들리는 것은 외부인인 다섯 남자의 발소리 뿐인,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이 흘렀다.
본래는 건강한 갈색이었을 나무들은 죄다 새하얗게 탈색된데다 군데군데에 정체 모를 검은 얼룩들이 남아 있었다. 대기 중에는 신선한 공기 대신에 싸늘하고 음습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 흔한 벌레조차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멈춘 숲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뭔가 기분 나쁘네. 조용하니까 꼭 무덤에 들어온 것 같잖아."
케빈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아시엘은 동감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들려요. 움직이고 있는건 우리들 뿐인것 같아요. 거기다 정말로 미미하지만 이거.. 공기 중에 마력이 떠돌고 있어요. 어제 그 몬스터에게서 느껴지던 것과 비슷한."
"그래? 우리야 마법사가 아니니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케빈 말대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네. 아, 잠깐."
발걸음을 멈춘 루이카엔은 검을 뽑아 콱, 하고 나무에 상처를 냈다. 처음에 아시엘이 한 것처럼 스무 걸음마다 흔적을 남겨 길을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거 귀찮네."
"어쩔 수 없죠."
카이스의 무뚝뚝한 대꾸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검을 집어넣던 그는 갑자기 발 밑에서 우지직, 부러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우앗, 뭐야?"
그의 발치에 방금 밟혀 가루가 된 동물의 유골이 나뒹굴고 있었다. 하얀 나무와는 다르게 시커멓게 변해 있는 뼈를 내려다보며 일행은 인상을 썼다.
"뼈가 흩어지지 않고 모양 그대로 삭았어요.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힌 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죽었나봐요."
"자연사는 절대로 아니겠지."
아시엘의 말에 키프스가 덧붙였다. 확실히, 작은 동물의것으로 보이는 뼈는 앞으로 쓰러진 자세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루이카엔이 부순 다리뼈 외에는 딱히 상한 곳도 없어보였다.
케빈은 꺼림직한 얼굴로 쭈그려앉아 그것의 두개골을 집어들고 요리조리 살폈다.
"자연스럽게 마른 숲에는 동물 시체가 없어. 먹이가 줄어들면서 짐승들이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옮겨가니까."
"그렇다면 역시.. 여기는 모종의 이유로 동물들이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죽어버렸다는 거네요. 적어도 일주일 사이로."
아시엘은 그렇죠? 하고 묻는 듯한 눈빛을 키프스와 카스란에게 보냈다. 아니나다를까 백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6, 7 년쯤 전에.. 카이스는 아카데미에 가 있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건강하던 숲이 단 사흘 만에 이 꼴이 되었지. 그때는 나무에 전염병이 퍼져서 그렇다고 결론지었는데.."
"전염병 따위는 절대 아니에요. 다들 못 느끼는 것 같아서 말은 안 하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점점 진해지고 있어요. 여전히 미약하지만.."
아시엘의 말에 카이스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기운이 있다는 것만 감지될 뿐 밖에서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루이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난 잘 모르겠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네 감각은 거의 강아지 수준 아냐? 엄청나네, 정말."
"그건 아니죠. 그것보다 어째 기분이 영 안 좋아요. 혹시라도 제 터무니없는 생각이 맞다면-"
아시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케빈은 의아아게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
"...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
잠시 망설이던 아시엘은 곧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더 이상 말해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그는 끙 소리를 내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다시 시선은 정면으로 옮겼다. 여전히 어둡고, 음침하고 불길한 백색의 숲이 깊숙한 곳까지 이어져있었다.
"결국 계속 가 볼 수밖에 없다는 거겠네."
그가 쓰게 웃자, 케빈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