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6. 죽어버린 숲(3)
우드득. 노파의 마른 손같은 나뭇가지 하나가 밟혀 부러졌다. 꽤 오랜 시간동안 걸으면서 이미 익숙해진 소음에 아시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발을 내디뎠다.
"여기가 이 꼴이 된 게 7년쯤 전이라면, 혹시 그때 영지에 무슨 일은 없었나요? 큰 사건이라거나."
"음.."
카스란은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히 기억을 더듬었다. 옆에서 키프스 역시 흠, 하고 팔짱을 꼈다.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뭐, 나도 그땐 열 여덟이었으니 영지엔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게나 떠돌아다녔으니 알 턱이 있나."
카스란이 조금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툭 내뱉자 그는 하하, 어색하게 웃고 입을 다물었다. 동생을 조용히시킨 백작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꽤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아, 그래."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요?"
아시엘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다가섰다. 카스란은 부담스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을 꺼냈다.
"아마 그 때, 이 주변 마을에서 가벼운 병이 돌았었지. 사망자도 없고 크게 앓은 자도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그래서 숲이 죽은 것도 전염병 때문이라고 판단했었다."
"흐음..."
고개를 끄덕이며 아시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갈수록 태산이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너무 작은 소리라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색이 살짝 변한 것을 알아차린 카이스가 인상을 썼다.
"혹시 몸 안 좋은거 아니야, 너? 안색이 안 좋은데."
"에? 아냐, 그런거."
아시엘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모인 의혹의 눈빛은 가시지 않았다. 케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숙여 아시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로?"
"네, 네! 당연하죠."
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주춤 물러서자 그제야 케빈은 흠, 하고 자세를 바로했다. 루이카엔은 아시엘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단장은 자신만 밑으라는듯 씩 웃었다.
"괜찮아! 여차하면 이 오빠가 번쩍 안아다 옮겨줄 테니까."
"....."
잠깐 싸늘한 기류가 흘렀다. 아니, 원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 아시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빠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조용하던 숲에 울려퍼졌다.
루이카엔은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걷어차인 정강이를 부여잡은채 고통에 부르르 떨었다. 아시엘은 손을 탁탁 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방긋 웃었다.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그런 것 같네."
카이스는 단장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은 쯧쯧 혀를 차고 그러게 왜 그랬어, 하고 주저앉은 루이카엔을 발로 툭툭 건들였다. 황제의 명을 직접 받드는,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추태에 카스란은 한숨을 내쉬고 은근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래도 내상은 그렇게 쉽게 낫는 게 아니니까 당분간은 몸 좀 사리는 게 좋아. 마법도 되도록이면 쓰지 말고."
"네에."
키프스가 이마를 짚고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아시엘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은 한 쪽 눈썹을 찌푸리고 그의 작은 머리에 손을 턱 올리고 힘을 줘 꾹꾹 눌렀다.
"대답은 잘 해요. 거짓말 하지 마, 이놈아. 네가 몸을 사린다고?"
"제가 뭘요."
아시엘은 불만스럽게 대꾸하고 그의 손을 치웠다. 그 때 잠자코 있던 카스란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터뜨렸다.
"여기서 늦장부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여기가 어디인지 잊으신 겁니까?"
"아 참."
그제야 아시엘과 케빈, 그리고 카이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낑낑거리고 있는 루이카엔의 뒷덜미를 잡고 억지로 일으켜세운 케빈은 그대로 기세 좋게 외쳤다.
"그럼 전진 앞으로!"
"켁! 넌 피도 눈물도 없냐! 야! 놔!"
그 바람에 숨통이 막힌 루이카엔이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이미 익숙해진 상황에 아시엘과 카이스 역시 무시하고 먼저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카스란은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간간히 나무에 표식을 남겨 가며, 그들은 또다시 한참을 걸었다. 여전히 음침한 공기가 흐르고 으스스한 하얀 나무들의 향연이 이어졌지만 한 번 풀려버린 긴장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살풍경과 아무렇게나 뻗어 기괴한 모양으로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에게 목숨까지 빼앗겨 버릴 듯한 죽음의 숲 안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이 곳이 어디인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으, 케빈 놈 괴력은 그렇다 치지만 넌 조그만 녀석이 무슨 발 힘이 그렇게 세? 아파 죽겠네."
"맞을 짓 했어, 넌."
아까 주저 없이 단도를 집어던지는 모습을 보고도 용케 그런 농담을 던진 루이카엔에게 케빈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내가 뭘 했다고! 거기다 넌 어떻게 사람 뒷덜미를 잡을 생각을 하냐? 죽을 뻔 했잖아."
"그 정도로 죽을 거였으면 이미 골백번은 더 황천길 걸었어, 멍청아."
시끄럽게 말싸움을 이어가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네 사람은 그저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참 답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한 백작은 무뚝뚝한 얼굴을 찌푸렸다.
"..언제나 이런 느낌인가? 이 기사단은."
"네."
아시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스란은 후우, 하고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 출신이 많다는 것은 뺀다고 해도, 일 처리 능력도 완벽하고 전 제국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 한 실력자들만을 모아 놓은 셀레니스 기사단이 왜 그렇게 평판이 바닥을 치는지 알 것 같았다.
"왜요? 전 이것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동생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카스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때, 가장 앞에서 걷던 카이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어."
"왜 그래? -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을 본 아시엘과 키프스, 그리고 카스란 역시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드잡이를 하다 뒤늦게 일행이 걷는 것을 멈춘 것을 알아차린 루이카엔과 케빈은 의아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뭐야? 저거."
케빈은 얼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다는듯 새카만 덩굴들이 겹겹이 하나의 장벽을 형성해 앞을 막고 있었다. 루이카엔의 키의 두 배를 훌쩍 넘는데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옆으로 길게 뻗어있어 돌아가기도 여의치 않아보였다.
"나무랑 안개 때문에 못 봤나 봐요.. 확실히 뭔가 있긴 있네요."
아시엘은 침착하게 그것의 가까이로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그의 허벅지보다도 굵은 덩굴들이 일말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뒤엉켜 있었다. 거기다 줄기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솟아 있어 타고 넘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쩌지. 확 날려버려?"
"바보야, 이게 얼마나 두꺼운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걸릴걸. 거기다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케빈이 툭 내뱉은 말에 루이카엔이 핀잔을 주었다. 카이스는 아시엘의 뒤를 따라 덩굴 쪽으로 다가서 혹시라도 들어갈 틈이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무 위에 올라가서 살피는 방법밖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네.. 우리같이 덩치 큰 남자들이 올라갔다간 저 죽은 나무들이 버텨낼 리 없고."
키프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백작과 케빈, 그리고 루이카엔과 카이스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아시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어깨를 으쓱하고 곧바로 근처의 제일 굵은 나무를 찾아 기둥을 붙잡았다.
"부탁해."
"네에."
루이카엔에게 씩 웃어준 그는 나무둥치를 밟고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발 디딜 곳을 찾아가며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특유의 운동신경 덕분인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곳에 있는 가지 하나에 다다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래에서 바라보던 케빈은 손나팔을 만들고 외쳤다.
"뭐 보이냐?"
"잠시만요!"
아시엘은 크게 대답하고는 안전안 자리를 찾아 위쪽의 다른 가지를 붙잡고 중심을 잡은 후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그리고.
".... 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순식간에 말라붙어버린 입술을 간신히 뗀 아시엘은 자조적으로 미소짓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너무 딱 맞아 떨어지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 하얀 나무들이 무겁게 젖은 안개처럼 바닥에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가로지르는 검은 덩굴. 그리고 덩굴의 안은-
텅 비어있었다. 나무도, 동물들의 사체도, 바닥의 잡초도,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허로운 대지만이 말라붙은 그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야말로 죽음의 땅- 그것의 한 조각이었다.
무의식중에 아시엘은 꽤 오래 전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금서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카데미 시절 야시장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고물상 노파에게서 샀던 책을.
어디에서 흘러나와서 거기까지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자만 그것은 아시엘에게 이 세상의 비밀 한 자락을 벗겨 주었고, 지금은 커다란 바윗돌이 되어 그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 제물은 살아있는 인간의 피와 심장."
이계의 사악한 종족, 마족을 소환해 자신의 몸을 대가로 계약을 이행. 그들의 검은 마력을 얻은 자는 이 세계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강력한 힘을 손에 넣게 된다.
하지만 종족 특유의 독기가 강해, 소환이 이루어졌던 곳 주변은 아무것도 살지 못하게 되고 가까이에 있던 것들은 계약자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지게 된다. 소환된 마족의 힘이 강할수록 그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 넓어져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가벼운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라고 책의 첫 단락에 정갈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이상 현상- 예를 들면,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거나.
"하.. 하하. 젠장."
아시엘은 헛웃음 끝에 결국 욕설을 내뱉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현상들. 실체가 있는 환영과 만들어진 괴물, 그리고 그것들에게서 느껴지던 낯선 마력. 대충이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농담 아니라고, 진짜.."
아시엘은 픽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의 손 끝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이마를 촉촉하게 적신 식은땀 때문에 결 좋은 금발이 그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흑마법, 이라니."
잔혹한 방식과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강력함으로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학문. 끔찍한 희생으로 시작되어 결국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무시무시한 병기. 흑마법이 바로 숲, 이 곳에서, 고작 7년 전에 자행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