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7. 흔적(1)
"-어이, 아시엘! 왜 멍 때리고 있어? 뭐가 보여?"
"아.."
아래에서 들려오는 키프스의 목소리에 아시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여전히 말도 안 되게 거대한 흔적이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지만, 그는 작게 미소지었다.
"아뇨! 아무것도 없어요. 내려갈게요!"
거짓말은 아니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카이스나 다른 선배들이 올라왔더라면 아마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 라고 대답했을 터였다. 곧 아래쪽에서부터 카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심해서 내려와."
"알았어."
터무니없는 것을 알아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등골에 스쳐가는 오싹함을 애써 무시하며 아시엘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일이 커져버리면 잡아먹히겠지, 그들에게.'
그의 머릿속에 붉은 제복의 기사단장, 에피로스와 그 주인 슈베이만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 아울까지.
아시엘의 발이 지면에 가까워졌다. 그는 팔에 힘을 주고 으쌰, 하고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자마자 곧바로 루이카엔이 다가와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아시엘은 방긋 미소짓고 제복을 탈탈 털었다. 어느새 옆에 와 선 카이스가 살짝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뭐가 있었어?"
"아~무것도.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어."
아시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일행은 흐음-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키프스 역시 복잡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그럼 도대체 뭐야? 저 이상한 덩굴들 하며.. 절대로 우연은 아니라고."
"전들 알겠어요. 여기에 있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성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아직은 때가 아냐- 아시엘은 덤덤한 어조로 제안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던 일행은 수긍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그들의뒷모습을, 아시엘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스란과 키프스는 물론이고 루이카엔과 동료들이 흑마법의 진실에 근접했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지금은 아직 대공 측이 기회를 살피며 한 번씩 소동을 일으키는 정도로 행동을 자제하고 있지만 만약 셀레니스가 그 사실을 알아냈다는 정보가 들어가면 분명 망설이지 않을 터였다.
그럴 경우 가장 먼저 표적이 될 인물은- 흑마법을 발견하는 장소에 함께 있었던 메르티스 백작과 키프스. 그리고 셀레니스의 단장 루이카엔, 케빈, 카이스.
황성에서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비밀을 유지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벽에도 눈과 귀가 있었다. 한 사람에게라도 말한다면 그것은 파멸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르고 있다면 그들의 공격에 대비할 방법이 없어질 터. 발설할 수도,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었다.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시엘을 상념에서 깨운 것은 때마침 날아온 카이스의 목소리였다.
"아시엘! 안 와?"
"...아아, 가!"
그는 재빨리 그들에게로 달려갔다.그가 뒤처졌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케빈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이 녀석 역시 몸 안 좋은거 아냐? 하며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루이카엔은 왠 늦장이야,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장난스럽게 아시엘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하하.. 아뇨, 잠깐 주변 살펴본다고 그랬어요."
아시엘은 단장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입으로는 그들과 시덥잖은 말들을 나누며, 머릿속 한 구석 어렴풋이 떠올렸다.
알아차린 것도 혼자, 알고 있는 것 역시 자신. 그러니 만일의 경우에 맹수의 이빨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혼자라면 피해는 최소화되겠지.
"그래서, 언제쯤 돌아가실 예정입니까?"
"오늘 안에 출발을 해야죠. 늦으면 무시무시한 부단장한테 박살나니까요."
키프스의 물음에 루이카엔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옆에서 케빈은 쭈욱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앤 보고 싶다아! 루이카엔 자식의 멍청한 새한테 무슨 짓 안 당했겠지?"
"멍청한 새라니, 우리 에니르는 네놈의 지렁이보다 훨씬 똑똑하거든!"
단장이 빽 소리를 지르자 케빈 역시 사나워진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지렁이? 하긴, 여자만 후리고 다니는 네놈이 뱀의 아름다움을 알 리가 없지."
"무식하게 힘만 세서 어울리지 않게 왠 아름다움? 미적 감각이 그 모양이니 아직까지 여자친구 하나도 제대로 없는거다."
"뭐야, 이 자식아?"
"해볼테냐?"
결국 두 사람은 다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드잡이를 시작했다. 골치가 아파진 카스란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키프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스도 친구의 곁에 붙어 서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아시엘 역시 웃었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칼부림이라도 나면 이 숲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구요."
"확실히 그럴지도."
키프스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로 툭 내뱉았다. 그렇게 죽음으로 물든 숲은 다시 한 번 떠들썩한 목소리들로 채워졌다.
"전하. 아울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하녀의 음성에 슈베이만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황금색 눈동자에 들어오는 것은 집무실의 익숙한 천장. 그는 곧 자신이 일을 보다 깜빡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쳇.."
갑자기 잠드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것 또한 강력한 힘을 얻은 부작용 중의 하나라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슈베이만은 몸을 일으키고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어디에 계시나."
"여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아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듯 슈베이만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어어. 녹스 녀석은 잠시 나간다더군."
아울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턱을 괴고는 언짢게 인상을 찌푸렸다.
"안의 녀석으로부터 전언이 왔어. 게르만으로 만든 내 작품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더군. 거기다 그 뚱땡이 놈도 죽지 않은 것 같으니 놈들의 손에 들어간 것 같아. 뭐, 숨이 붙어 있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하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렇습니까."
슈베이만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분명 보고받은 바로는 토벌에 나선 인원은 네 명- 셀레니스의 단장 루이카엔과 케시비언, 카이스 그리고.
"아아- 별 기대는 안 했지만 허무하네. 잘 하면 성가신 것들을 한꺼번에 치울 수도 있을거라고 기대했는데."
"하지만 메르티스 영지에는 그게 있지 않습니까? 에스테반 님을 불러낼 때의 그것 말입니다. 자칫하면 들킬 지도 모릅니다."
대공의 말에 스며들어있는 '어째서 그런 곳에 몬스터를 보낸 거냐' 는 물음에 아울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긴 흑발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아아. 어차피 봐도 모를거야, 녀석들은. 그리고 혹시라도 알아차렸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아. 우리가 원하는 건 나약한 인간들이 흩뿌리는 아름다운 선혈, 그것 뿐이니까."
슈베이만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는 자신의 탐욕스러운 계약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흑마법은 이단. 강력한 힘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누구라도 알게 된다면 당하지 않기 위해 즉각 제거하고 영리한 황제가 방비하기 전에 나라를 뒤집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차근차근 안쪽에서부터 밟아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성급하게 행동하다가는 일이 성사된 후에도 남아있을 황제와 셀레니스의 싹이 자라날지도 몰랐다.
그 때. 똑똑, 하고 노크음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곧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전하. 레이 베르튼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붉은 제복을 입은 소년, 레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카펫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례를 취했다.
"레이 베르튼이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지?"
레이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아울에게도 꾸벅 허리를 숙인 뒤 대공에게 다가가 가지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에피로스 단장님이 이걸 가져다 드리라고.."
"보고서인가. 고맙군."
슈베이만은 그것을 받아들고 몇 장을 대충 훝어보았다.그동안 레이는 부동 자세로 그의 옆에서 대기했다. 곧 대공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 하고 종이 몽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그건 그렇고.. 골치 아프게 됐어, 레이."
"예?"
갑작스럽게 그가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자 레이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그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슈베이만은 발을 이었다.
"셀레니스에 친구가 있다고 했던가."
"예? 아, 네.."
레이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슈베이만은 느긋하게 손깍지를 끼고 의자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아주 대단한 친구들을 두었더구나. 특히 그, 아시엘.. 아르셰인. 역시 루이스 경이 거두어들였다고 할 만 해. 황제 폐하가 부러울 정도야."
"전하.."
레이는 얼굴색을 흐렸다. 곧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누군가가 전하의 앞길을 방해한다면 그를 주저 없이 배제할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아시엘이라고 해도. 이제 저에겐 그럴 만한 힘도 있으니까요."
"흐음."
슈베이만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레이가 뒤로 물러설 새도 없이 가까이 다가가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소년과 시선을 맞추고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
"네? 아, 당연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당황해 말을 더듬는 레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상기되었다. 슈베이만은 그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 가 보라며 손짓했다. 레이는 급하게 허리를 푹 숙이고는 거의 뛰다시피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쿵.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슈베이만은 의자에 걸쳐두었던 겉옷을 들었다.
"그럼 저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과의 티타임 시간이 다가오는군요."
"언제나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넌 나보다 더 악마야."
아울은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장난기 어린, 하지만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일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슈베이만은 잠시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다 곧 픽 웃음을 터뜨렸다.
"칭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