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9. 새로운 관계(1)
마치 기절하듯 잠들었던 네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델레트에게 쫒겨 치료사에게 향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대로, 괴팍한 영감에게 칼침을 맞을 뻔 하고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먹은 후, 상당히 거친 치료를 받고 정신이 쏙 빠져나간 채로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에 주어진 것은, 황제에게 그나마 한 끝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장거리 파견 후의 단 하루 꿀맛같은 휴일이었다.
케빈은 더 자겠다며 일찌감치 방으로 올라가버렸고 아시엘의 옆에서 버티던 카이스 역시 꾸벅꾸벅 졸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루이카엔은 아델레트에 의해 집무실로 끌려갔고- 홀로 남은 아시엘은 지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멍해진 상태였다.
'그 때-'
경황이 없어서 이때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일단 큰 불이 꺼지고 나니 이제야 제대로 자각할 수 있었다.
몬스터의 핵을 베었을 때, 순간적으로 끌어냈던 그것. 그의 짐작이 맞다면 분명 검기였다. 그리고 한 번 마력이 뒤집어졌다가 잠잠해져서 그런지 몸 안에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략 1년 만에 찾아온 마법사와 검사로서의 진전. 뛸 듯이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당장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무의식의 다른 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것은 게르만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메르티스 영지를 떠나기 직전 그는 침대에서 숨이 끊어졌다. 그 몬스터와 흑마법에 관해 알아낼 단서가 하나 사라진 셈이었다. 아마 그것 역시 의도된 것이 아니었을까-
"...아."
아시엘은 문득 마탑의 캐롤 교수에게 맡겨두었던 구슬들이 떠올랐다. 그것도 회수하는 편이 나을듯 했다. 만일 그들의 눈에 띄인다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저씨.'
마지막으로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한 루이스를 떠올리다 그는 따뜻한 봄날의 병아리마냥, 혹은 햇볕 좋은 창가의 고양이처럼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툭, 누군가가 갑자기 어깨에 손을 얹는 바람에 아시엘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힉..!"
"야, 야. 뭘 그렇게 놀라?"
손의 주인- 루이카엔은 되려 움찔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상대를 확인한 아시엘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풀려나셨어요?"
"아아니. 잠깐 부탁 좀 하려고 나왔지."
루이카엔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로 장난스럽게 아시엘의 머리를 툭, 내려쳤다.
"이거 폐하께 좀 갖다드려 줄래?"
"아, 네."
아시엘은 얼결에 그것을 받고 이리저리 살폈다. 아마 이번 메르티스 영지 건을 비롯해 변종 몬스터 출몰 사건들을 정리한 보고서인 듯 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생긋 미소지었다.
"어차피 찾아뵐까 생각 중이었으니까요."
"엥? 폐하를? 왜?"
"그럴 일이 있어요. 아 참, 다녀오면 대련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루이카엔은 곧 픽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가 집무실로 돌아간 후, 아시엘은 곧장 제복 코트를 입고 생활관을 나섰다.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화사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정오 전의, 적당히 따뜻한 기분 좋은 볕에 아시엘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끄아아-! 날씨 좋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푸드덕, 하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지붕 쪽에서 루이카엔의 애완 독수리- 에니르가 날아와 아시엘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다 그의 어깨에 안착했다. 갑자기 몸에 실린 무게 덕분에 잠시 휘청했지만, 아시엘은 제대로 중심을 잡고 그의 부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좋은 아침, 에니르. 나날이 무거워지는 것 같네."
"꾸륵."
시끄럽다는듯 에니르는 그의 머리카락의 끝을 물고 두어 번 당겼다. 심술궂은 애교를 부리는 그를 한번 더 쓰다듬어준 아시엘은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씨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정원을 관리하는 하인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며 조각상들을 정성껏 쓸고 닦아대고 있었고, 업무를 보러 온 귀족들 역시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 아아.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겉은 평화롭네."
어떤 무서운 것이 다가오고 있더라도, 모르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혼잣말처럼 가볍게 중얼거리기를 잠시, 그는 다시 산책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와 에니르가 본성 앞에 다다른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시엘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린 입구의 경비병은 절도있게 경례를 했다.
"아시엘 아르셰인 경, 수고하십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시엘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생글 미소지었다. 그 덕에 남자 경비병의 얼굴이 일순 확 달아올랐지만 곧장 그를 등지고 안으로 들어선 아시엘이 그것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여전히 푹신한 카펫을 밟고, 전과는 조금 달라진 인테리어를 눈에 하나하나 새겨넣으며 그는 집무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제법 익숙해진 화려한 문 앞에 선 그는 그 앞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아시엘 아르셰인 경. 실례지만 무슨 용무이신지?"
그 경비병 역시 정중하게 인사하며-입에는 미소가 만연해 있었다- 부드럽게 말했다. 아시엘이 간단하게 단장님 심부름이요, 하고 답하자 그는 곧장 통신용 구슬로 안에 고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아시엘이 천진하게 감사인사를 하자, 마찬가지로 경비병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집무실로 들어가는 소년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 처, 처, 천만의 말씀입니다!"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아시엘이 하나 더 있는 문을 열고 방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라이펜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웃음을 터뜨렸다.
"온 황궁 경비병들이며 사용인을 다 홀리고 다닐 셈이야?"
"네?"
아시엘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바깥의 상황을 통신구슬로 다 듣고 있던 라이펜은 황당해 질 수밖에 없었다. 아시엘은 의아하게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라이펜은 고개를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아냐.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그것보다 무슨 일이지?"
"아.. 루이카엔 씨가 이것 좀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아시엘은 그의 책상 가까이로 다가가 가지고 온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대충 휙휙 살핀 황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다른 용무는?"
"음.."
잠시 턱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고르듯 고민하던 아시엘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폐하라면 알고 계실 것 같은데."
"뭐를?"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라이펜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아시엘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보다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건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이에요. 그리고 폐하께서 저를 벌한다고 하셔도 저는 얌전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기도 하죠."
"네 녀석한테 벌 줬다가 루이스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괜찮으니 말 해."
라이펜은 의자에 편안하게 기댔다. 아시엘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한 후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도 말했지만 전 폐하가 이미 알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냥 제 억측이고, 완전히 다른 집단의 일일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좋겠지만요."
라이펜은 계속 하라는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번에 갔던 메르티스 백작령. 그 곳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갑자기 말라죽어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된 숲과 그 한 가운데에 생긴 커다란 원형의 공터를요."
"....그래?"
"숲이 죽은 것은 7년쯤 전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 때 근처에서는 가벼운 전염병이 돌았다고 메르티스 백작님께서 알려주셨죠. 전 이런 현상이 어떨 때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더 큰일이 벌어질까 봐 루이카엔 씨에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공터, 아무것도 살 수 없게된 땅, 전염병. 라이펜은 같은 이야기를 하며 똑같이 신중하게 행동하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똑같아. 답답함에 한숨을 쉬며 마른 세수를 한 그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어. 뭐 때문에 루이카엔에게 보고하지 않았는지도.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뭐야?"
"독자적으로 조사해 볼 생각이에요. 확실한 것이 나올 때까지, 주변에 폐가 안 가도록."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라이펜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아시엘은 그 특유의, 천진한 듯 하면서도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 하아."
잠시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고 쓰게 웃었다.
"그래, 이야기 끝났으면 나가 봐. 몸조심하고."
"들어가보겠습니다."
아시엘은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가 자세를 바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라이펜은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작은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다, 곧 쿡쿡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닮았어."
순진한 듯, 막 나가는듯 하면서도 어쩔 때는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스스로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점이. 그는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나중에 루이스한테 된통 혼나게 생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