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0. 새로운 관계(2)
집무실을 나온 아시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한결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곁을 급하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듯 눈으로 좇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는 걸을 때마다 주변을 찬찬히 살피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항상 같은 풍경이라도 전과 다른 모습을 찾게 되고 또 그에 쉽게 심취했다. 마치 일상이라는 공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갑자기 어둡고 냄새나는 시궁창에서 세상으로 끌어올려졌던 어느 날부터,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이 다 조심스러웠다. 두려운 것도 많았고, 이따금은 아무것도 없이 공허한 먼 옛날의 기억의 저편에 잡아먹힐까 잠도 못 이룰 때가 많았다.
주변을 자세히 살피는 버릇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언제 이 곳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꿈에서 깨어나 다시 뒷골목으로 돌아가더라도 아쉽지 않도록 하나하나 마음에 새겨넣는 것이 언제나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선사해 준 은인이 선물한 이 세상을 놓치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함이었다.
"꾸륵."
어깨 위에 잠자코 앉아있던 에니르가 귀를 약하게 깨무는 느낌에, 아시엘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새삼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
아시엘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곱게 깔린 잔디에 깔끔하게 관리된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길을 잘못 들었나."
황궁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게 웃기는 상황이긴 했지만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궁이 워낙 넓고 구조가 복잡하다 보니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자주 미아가 되곤 했다. 생활관과 본궁 사이만 오가던 아시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누구를 붙잡고 길을 물어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걷자니 해가 질때까지 헤멜지도 몰랐다.
"으.. 어쩌지?"
돌아가고 싶어도 딴생각을 하느라 어디로 왔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아 아시엘은 난처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물쭈물하는 그가 답답해졌는지 에니르가 갑자기 푸드덕 날갯짓을 했다.
"어? 에니르!"
아시엘이 당황해 그를 불렀지만, 에니르는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그대로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졸지에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혼자 남겨진 아시엘은 황당하게 독수리가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새한테 버려지다니.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오전 11시가 좀 넘은듯 태양이 아까보다 위로 올라가 있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오늘의 계획을 망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시엘은 마음이 조금 급해져, 그는 일단 무턱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야."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라 다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하고 아시엘이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한번 더 똑같은 목소리가 예민한 귀에 파고들었다.
"야...! 들려?"
"......"
앞에도 사람은 없고, 뒤에도,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음성의 주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하는 마음에 아시엘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
그는 딱 시선이 마주친 누군가 덕분에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왜 이런 곳에? 상대는 꽤 높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채 못마땅함으로 가득찬 황금색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금안의 낯설지 않은 상대 역시 아시엘을 알아본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곧 미간을 찌푸렸다.
"파티장에서 봤던 그 녀석이로군."
"아..."
아시엘은 한참동안 눈을 의심하며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카이스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머리칼에 금색 눈동자일 소년. 이 제국의 황제와 닮은 준수한 얼굴과 언짢다는듯 치켜올라간 눈썹을 가진 그는 틀림없이 제 1황자, 유트리안 디아란 세튼이었다.
"..아, 저. 그. 어째서 이런 곳에..?"
상당히 어이없는 만남에 아시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물었다. 예의도 제대로 차리지 않는 얼빵한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유트리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여기는 내 거처에 딸린 정원이다.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지?"
"아아."
아시엘은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걷는 사이에 이런 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저는 폐하를 알현하러 갔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우연히..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곧장 돌아가겠습니다."
"잠시만!"
정말로 돌아서려는 그를, 유트리안은 꽤 다급한 목소리로 불러세웠다. 아시엘은 의아해져 다시 몸을 돌려 나무 위의 황자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저.. 그. .... 려줘."
웅얼웅얼거리듯 씹어 삼키는 뒷말이었지만 아시엘이 알아듣기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순간 벙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네?"
"아 진짜.. 내, 내려달라고!"
역시 그랬군. 아시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소 힐난이 담긴 붉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유트리안은 무안해져 얼굴을 붉히고 공연히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너 혼자 안 될것 같으면 사람을 부르던가! 어떻게든 해 보라고."
"못 내려올 것 같으면 아예 올라가지를 마셔야죠."
아시엘은 그의 말을 따라하며 쯧쯧 혀를 찼다. 제국의 황자를 대한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불손한 태도였지만 유트리안은 인상을 쓸 뿐 변명하지 못했다.
"얼른 내려주기나 해."
"네."
아시엘은 그를 향해 손을 뻗고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 위에 하얀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플라이."
아시엘이 시동어를 외치자, 순간 따뜻한 기운이 유트리안을 감싸안더니 곧 그의 몸이 붕 허공으로 떠올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어?"
유트리안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의 발이 땅에 닿자 마법이 스륵, 풀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판단이 서지 않아 그는 눈을 꿈뻑거리며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 있었던 나뭇가지를 올려보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법사? 너 마법사야?"
"검사이기도 하죠. 마검사라고 해요."
아시엘은 항상 차고 다니는 허리춤의 레이피어를 보여주었다. 유트리안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새삼스럽게 눈 앞의 작은 기사를 살폈다.
"네가 마검사라고? 셀레니스에 마검사가 합류했다더니, 그게 너였단 말이야?"
"뭐 문제라도 있나요?"
아시엘은 조금 언짢아져 되려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황자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면 루이스 경이 양아들로 삼았다는 녀석이.. 소문이 어느 정도는 맞다는 건가?"
"...소문, 이요?"
문득 불길한 느낌에 아시엘은 얼굴을 굳혔다. 어디에선가 비슷한 말을 듣고 봉변을 봤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치료사 영감의 거처였던가. 유트리안은 나무줄기에 등을 툭 기대고 대꾸했다.
"파견 갔던 루이스 경이 굉장한 미모를 가진 여자애한테 반해서 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카데미에 보내주며 키웠는데, 그 뒤로 여자애는 경을 따라 셀레니스에 입단했다고. 근데 사실 그게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었다- 랬던가."
"....."
"그래도 역시 소문이란 건 믿을만 한게 못 되는군. 아니면 자신이 어린애한테 반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루이스 경이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던가. 어떻게 봐도 멀쩡한 여자애한테 남자라니."
그는 말을 마치고 아시엘에게 어때, 라는 시선을 보냈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바닥만을 응시하던 아시엘은 곧 헛웃음을 터뜨렸다.
".. 그거, 누구한테 들으신 겁니까?"
"아바마마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다."
아- 썩을. 일 때려치울까, 빌어먹을 주군에게 새삼 살심을 느끼며 그는 속으로 몇 번째일지 모를 욕설을 내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