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45화 (14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2. 새로운 관계(4)

아시엘과 헤어진 후, 흥이 깨져버려 곧바로 거처로 돌아온 유트리안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아직까지도 치솟는 화를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젠장.."

부글부글 속이 끓었지만 그는 최대한 진정하려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다퉈 놓고도 차분한 얼굴로 돌아서던 아시엘이 떠올라 괜히 혼자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리광이라니, 제국의 황자에게. 간이 커도 그 정도로 클 수는 없었다. 아무런 응징 없이 순순히 물러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셀레니스라고 하지만. 황제인 아버지가 아끼는 기사라고는 하지만.

"쳇."

결국 그는 혀를 차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꾹꾹 쑤시는 머릿속 한 구석에는 오래 전에 파묻어두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종 주제에 황자인 그에게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쏟아내던 녀석. 언제나 곁에 있었지만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그. 아마 그것 때문에 더욱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너는지도 몰랐다.

그 때, 똑똑. 문득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유트리안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기 전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었는데 감히- 그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방문이 스륵 열렸다.

그리고 그 틈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에, 유트리안은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리고 얼이 빠져 버렸다.

"..어? 외조부님?"

"외조부라니요. 그냥 할아버지로 괜찮습니다."

방으로 들어선 풍채 좋은 노인- 파슬렌 공작은 문을 살짝 닫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십여년 전, 6살배기 아들을 두고 병으로 세상을 뜬 전 황비의 아버지이자 황제의 장인, 동시에 유트리안의 외조부가 바로 그- 드레이크. 폰. 파슬렌 공작이었다.

의외의 등장에 유트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공작은 허허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이것 참, 이 늙은 할애비더러 앉으라고도 안 하실 겁니까?"

"아, 아. 죄송합니다. 앉으세요."

유트리안이 재빨리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하자 파슬렌 공작은 흠, 헛기침을 터뜨리고 의자에 편안히 기대어 앉았다. 곧 다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이 차와 다과를 가져다주었다. 테이블에 접시들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물러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감사를 표한 그는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기분이 언짢으시다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별 것 아닙니다. 그저 오전에 건방진 꼬마와 말다툼을 했을 뿐이니까요."

유트리안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말다툼이라는 이야기에 흥미가 돋았는지 공작은 호오,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꼬마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마 외조부님은 모르실 듯 합니다. 이번에 셀레니스에 입단한 조그만 녀석인데.. 이름이."

뭐였더라, 유트리안은 기억을 더듬으려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파티장에서 이름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대충 흘려들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는데 차를 한 모금 마신 파슬렌 공작이 입을 열었다.

"혹시 아시엘 아르셰인이라는 소년이 아닌지요."

"아,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허나 외조부님께서 어찌..?"

유트리안이 의아하게 물었지만, 공작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외조부님?"

"..큼.. 큽! 큭큭.. 아, 죄송합니다. 풋.. 너무 예상대로라. 푸하하하!"

결국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유트리안은 더더욱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을 아십니까?"

"하하하! 알다 마다요. 얼마 전 대전회의에서 보고 그 후에 얼마간 이야기를 나눈 것 뿐이지만 말입니다."

파슬렌 공작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숨이 찬지 후-하고 유쾌한 한숨을 내뱉은 그는 손에 깍지를 끼고 애정이 담긴 눈으로 외손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전에서 대공 전하 앞에서도 뻔뻔하게 제 말을 밀어붙이던 아이니까요."

"예?"

유트리안은 황당해져 입을 살짝 벌렸다. 작년, 제 1황자의 권한으로 대전회의에 참석했던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불꽃이 튀긴다,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열한 자리였다. 큰 소리가 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요한 대화 사이에는 탈 것 같은 열기와 주변을 얼려버릴 듯한 냉기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결국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유트리안은 멀뚱멀뚱 서있기만 하다 회의는 끝이 나 버렸다.

"아... 그게 정말입니까?"

"그리고 회의 후에 황제 폐하께 불평을 쏟아내더군요. 잘 해준 대가로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폐하의 말씀에 그는 머릿속에 다 저장해 두고 나중에 청구할 거랬던가. 하여튼 이상한 아이입니다. 듣자하니 삶이 순탄치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공작이 다시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조로 툭 내뱉았다.

"그런 친구라면 이 할애비도 찬성입니다, 황자님. 본인의 능력도 뛰어나니까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만?"

"싫습니다. 그런 불손한 놈 따위."

유트리안이 뾰루퉁하게 대꾸하자, 파슬렌 공작은 부드럽게 미소짓고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지도 않을 테니까요."

".....!"

황자의 몸이 움찔했다. 테이블 위에 얹어진 그의 하얗고 고운 손이 작게 떨리다 곧 주먹이 꽉 쥐어졌다. 허망하게 떠나지 않는다, 라.

"믿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제 시종 하나조차 지키지 못한 그들은 싫습니다."

"... 그렇습니까."

파슬렌은 조금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곧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 척 하지만 아직까지 옛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유트리안이 안쓰러웠다.

언제였던가. 그는 옛날에 시종 하나를 각별히 아껴 곁에 두었었다.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유트리안을 제 몸처럼 아끼던, 동년배의 소년. 하지만 그는 어느날 바깥 나들이 중 갑자기 쳐들어온 암살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곁에 기사들과 호위병이 있었지만 그 중에도 내통자가 있었던 것이었다.

다들 외부의 침입자들에게 맞써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배신자가 유트리안을 베려 했고- 그 시종은 그것을 막아서 대신 칼을 맞았다.

'그때부터.. 였던가.'

겨우 시종이 죽었을 뿐이라 말하며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던 유트리안이었지만 그 뒤로 그는 아무도 가까이에 두려 하지 않았다.

배신에 대한 두려움인지,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

"그래도 황자님.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예? 뭐가 말입니까?"

한동안 조용히 있던 공작이 넌지시 입을 열자 유트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파슬렌은 곧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등받이에 편안히 기댔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늙은이의 헛소리라 생각하십세요."

어쩌면 오늘 다툼을 계기로, 하나의 새로운 관계가 이어진 것일지도. 공작은 멋들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과자를 집어들고 입에 넣었다.

"푸하하하하! 그래서, 거기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고?"

"웃지 마세요. 전 심각하다구요."

아시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루이카엔은 들리지도 않는듯 배를 잡고 연무장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덕분에 먼저 와서 수련을 하던 몇몇 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좀처럼 웃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시엘은 포기하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아.. 하. 아, 미안. 근데 너무 웃겨서.."

루이카엔은 웃음기가 가득 남아있는 얼굴로 눈물까지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라고 놀렸다가 칼까지 맞을뻔 한 전적이 있는 그로서는 아시엘이 화 정도로 끝냈던 것이 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천하의 황자님에게 어리광이라고 훈계까지 늘어놨다니. 넌 얼마나 간이 큰 거야."

"그건 저도 모르게.. 왠지 너무 화가 나더라구요. 덕분에 답지 않게 큰소리나 내고."

아시엘은 검을 닦으며 우울하게 대꾸했다. 루이카엔은 킥킥 소리를 내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뭐, 이해는 간다만. 너랑 정 반대의 인간이니까. 아마 카이스보다 한 살 많던가?"

"그래요?"

"아마도 그럴걸."

그는 몸을 풀듯 목을 좌우로 우드득 꺾고 크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래도 너무 싫어하지는 마. 옛날에 암살자 때문에 둘도 없는 친구를 잃은 것 때문에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으니까."

"전에 들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드물게 아시엘이 툴툴거리듯 말하자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에 둘러싸여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하지만 갑갑하게 살아온 유트리안과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악착스럽게- 하지만 자유롭게 살았던 아시엘. 상성이 최악일 수 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철이 일찍 들어 어딘가에 안주하기를 원하면서도 모든 것을 혼자 해치우려는 아이와, 어른들 품을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의 차이.

"골치는 아프겠지만 재미있게 됐네."

"뭐가요?"

검 손질을 끝낸 아시엘은 불만스레 볼을 부풀리며 몸을 일으켰다.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사람이 없는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가 위치를 잡았다. 아시엘 역시 걸음을 옮겨 그에게서 충분한 거리를 둔 곳에 섰다.

"왼손으로 해 줄까?"

"제 생각대로만 된다면, 후회하게 되실 텐데요."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루이카엔은 씩 웃고 왼손으로 검을 잡았다. 아시엘은 잠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역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침묵. 두 사람은 가만히 자세를 낮추고 차분하게 서로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 아시엘이랑 단장이랑 대련이야?"

누군가의 말에 순간 연무장 내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과 안전거리를 둔 곳까지 다가와 둥글게 에워쌌다.

"아시엘, 저 밉상한테 한 방 갈겨버려!"

"넌 단장한테 밉상이 뭐냐? 방해되니까 저리 가."

루이카엔의 말에도 그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단장은 못마땅하게 끙 소리를 내고는 다시 검에 집중했다. 아시엘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아주세요. 저 마법도 쓸 거라서. 그리고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마검사랑 대련이라니, 기대되는데."

루이카엔의 입에 곡선이 그려졌다. 아시엘 역시 살짝 미소지었다. 거기에서 대화는 끊어졌다. 주변의 소음들도 두 사람에게는 닿지 않았다.

웃음기가 모조리 사라져버린, 예리한 빛을 내는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살살해 주세요."

"여유가 있다면."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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