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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47화 (14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4. 각자의 일(2)

"으아.. 역시 상처 벌어졌었네."

아시엘은 거울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몸에 감긴 새하얀 붕대가 연하게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다시 셔츠를 여민 그는 거울에서 등을 돌리고 단추를 깔끔하게 잠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자에 걸쳐뒀던 제복 코트를 집어들다 잠시 멈칫했다.

아카데미에 간다, 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다른 용무도 있었다. 마탑의 캐롤 교수를 찾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제복 코트를 입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루이카엔의 말이 걸렸다. 잠시 갈등하던 그는 결국 새하얀 제복 코트를 걸쳤다. 마탑에서는 대충 마법으로 가리면 되겠지- 미리 외워둔 4서클의 기초 마법 수식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아시엘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안 되면 어디 들어가서 허름한 망토라도 사서 두르면 되는 거고. 무책임한 말을 중얼거린 그는 얼마 전 받은 월급을 모아둔 돈주머니를 주머니에 챙겨넣고 방을 나섰다.

생활관 밖은 여전히 맑았다. 콧노래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 좋은 날씨. 바람도 적당했다. 기분이 간질간질하게 좋아진 아시엘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게 되자 그제서야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발전은 언제나 즐거움을 가져왔다. 노력 끝의 결실, 그리고 또다시 주어진 과제. 그것은 자랑스러움과는 다른 어떤 쾌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 좋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쾌한 엇박자로 발을 내딛었다. 어느새 그의 입에서는 흥얼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배는 밝은 목소리로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인사하고 황성을 빠져나온 그는 곧장 큰길로 향했다.

행인들이 많아지자, 그 하얀 제복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눈에 띄는 외모 때문인지 아시엘에게로 모여드는 시선이 많아졌다. 하지만 잔뜩 들뜬 상태인 그가 눈치챌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시엘은 상점가가 많은 거리로 들어서자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카데미로 가기 전, 첫 월급으로 루이스를 위한 선물을 살 생각이었다.

"..아, 여기다."

그는 언젠가 봐 두었던 작은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리창 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진열대를 확인한 아시엘은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곧장 문을 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종소리가 짧게 울리고 그는 경쾌하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레이."

루아 이클립스 생활관의 연무장. 넓은 공간에서 홀로 수련에 집중하던 레이는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아, 단장님! 녹스 님!"

언제 들어왔는지 연무장의 입구에 에피로스와 짙은 초록빛 머리칼의 미남자- 녹스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검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하는 레이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열심이로군, 너는. 나쁘지 않아."

"감사합니다."

에피로스가 딱딱한 목소리에 나름의 부드러움을 담아 칭찬하자 레이는 쑥쓰럽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녹스는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마력이 안정된 걸 보아하니 이제 힘에도 익숙해졌나. 보통 1년은 걸릴 텐데. 아울 말대로 넌 이쪽 체질인가 보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레이는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섰다. 녹스는 마치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소년의 얼굴을 응시하다 곧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지?"

"아니요, 별로."

레이는 애써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꼴이 우스웠는지 녹스는 쿡쿡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려 토닥여주었다. 에피로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기뻐하시고 계신다. 각오가 보통이 어니라고."

"아..."

"친구도 벨 수 있다는 그 말. 거짓은 아니겠지."

단장의 진지한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순진하게 빛나던 그의 눈이 마치 가면을 벗어던진듯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에피로스조차 흠칫 놀랄 정도로.

"친구라는 것도, 전하께 방해가 된다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길 수 있다면."

마지막 말에 녹아있는 것은 약간의 증오였다. 에피로스는 레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녹스를 힐끗 곁눈질했다.

"뭐. 불만이라도 있나?"

"... 아닙니다."

그는 한숨처럼 대답하고 격려하듯 레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열심히 해라."

"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를 보며 작게 미소를 흘린 에피로스는 녹스에게 뭐라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뚜벅뚜벅 출구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씨는 여전히 최고였다. 대공의 궁 쪽으로 빠른 속도로 걷던 그는 갑자기 옆에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나자 그 자리에 멈춰섰다.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나의 계약자여."

연기 속에서 스륵. 모습을 드러낸 녹스는 무심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에피로스는 딱딱하게 물었다.

"역시 당신이 손을 썼던 것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녹스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 하는 말에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대공께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듣고 일부러 가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금의 대화에서 그런 결론을 내렸지요.. 인간의 감정을 헤집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는 녹스 님 뿐이니까요."

"난 별로 한 것 없어. 녀석 안에 있던 질투를 조금 건드려줬을 뿐이다."

에피로스는 무슨 말이냐는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레이, 라 했던가. 그 녀석은 그 금발 꼬마를 일단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능력 부족 때문인지 꽤 큰 열등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은 억눌러오고 있었겠지만 이젠 우정을 지켜야 할 명분도 사라졌으니."

"....."

"슈베이만이 은근슬쩍 녀석에 대한 말을 흘리니까 그것이 조금 더 커졌고. 난 그 질투와 열등감을 증오로 바꾸었을 뿐이지."

에피로스는 답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런 그를 힐끗 곁눈질한 녹스는 픽 입가에 조소를 흘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

"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다. 1차적으로는 그 녀석 스스로가 이기고 싶다, 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었으니. 조금 부추겼다고 쉽게 움직인 건 녀석이지."

".... 하."

그의 말이 끝맻어지자 침묵하던 루아 이클립스의 단장은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차갑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계약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당신은 최고이자 최악의 파트너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녹스 역시 비웃음을 머금고 짧게 대꾸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아시엘은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주변의 풍경은 어느새 번화가를 벗어나 꽤 한산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내와 아카데미를 이어주는 길- 꽤 오랜만에 오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아시엘은 새삼 주변을 구경하는 것처럼 살폈다. 그런 그의 팔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봉투가 안겨 있었고, 제복의 겉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돈주머니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수업이 이미 끝났을 시간인지 아카데미에 가까워질수록 외출에 나서는 학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수군대며 자신을 힐끔거리고 지나가는 교복의 학생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옛날 생각 나네."

야시장에 몰래 나갔다가 통금 시간을 어겨 카이스, 레이와 함께 담을 넘다 교수님께 걸려 호되게 혼났다던가. 마법 연습을 하나 실수로 나무를 태워 애꿎은 두 사람과 함께 벌을 받았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실 그다지 옛날도 아니었지만- 그 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 체감상 10년은 지난 기분이었다.

'그 때만 해도 황제 폐하가 엄청 멋있는 사람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

일 하기 싫다며 서류를 내팽개친다던가 부하를 놀려먹고 폭약을 주물럭대는 이상한 취미를 가진 인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새삼 암담한 현실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에 그는 한숨을 폭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시엘은 다시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입구가 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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