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5. 아버지와 아들(1)
아카데미를 지키듯 서 있는 거대한 문을 통과한 아시엘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외부인이 아카데미 내부에 들어가려면 경비원에게 출입증을 받아야 했다.
"..아. 저기 있었지."
곧 경비소로 쓰이는 작은 건물을 발견한 아시엘은 종종걸음을 쳐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옛날 사고를 친 후에 교수님들의 눈을 피해 종종 신세를 지던 곳의 유리창을 똑똑, 두어 번 두드렸다.
곧 안에서 인기척이 들린 후 미닫이 식의 작은 창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 남자가 고개를 디밀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아아?"
의자에 기댄 채 찮아 죽겠다는듯 대강 말하던 그는 상대를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 아시엘!?"
"오랜만이에요, 레비 형.. 아니지, 아저씨라고 해야 하나."
아시엘이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남자- 레비는 발끈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직 아저씨 아니거든! 코딱지만한 게 까불고 있어."
"그 소리 4년 전에도 한 거 알아요?"
"어쨌든! 아직 서른 중반이니까 형이라고. 형!"
괜히 찔리는 곳이 있는지 그는 창틀을 손으로 쾅쾅 때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던지 말던지 아시엘은 얄밉게 미소짓고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하긴 아직 장가도 못 갔으니까 아저씨라고 하긴 좀 그런가."
"오랜만에 와서 아픈데 찌르지 마, 이 녀석아!"
레비는 좁은 창문 사이로 손을 슥 내밀어 장난스럽게 그의 머리를 꾹꾹 눌러 헝클어뜨려버렸다. 아시엘은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 무슨 짓이에요?"
"내가 할 말이야, 그건. 하여튼 불쑥불쑥 나타나는 데는 선수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가 말끝을 늘어뜨리자 아시엘은 의아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제복이냐? 셀레니스의."
레비의 시선은 그의 새하얀 제복에 닿아 있었다. 아시엘은 그제야 납득하고 새삼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눈에 띄잖아, 이거- 툴툴거리듯 중얼거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비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기세로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에?!"
"오오오오오! 역시 그랬네. 멋지다, 멋져! 황제를 바로 곁에서 뵐 수 있겠네? 어때? 완전 근엄하고 날카로우시다며! 거기다 돈도 왕창 벌겠다! 일 하는 건 어때?"
갑자기 다다다다 쏟아져나온 그의 감탄사에 아시엘은 아- 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모를, 황제의 본모습에 대한 오해를 풀 풀어줘야 할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솔직하게 하기로 했다.
"죽겠어요."
".... 아아."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말에 레비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 녀석이 그런 말 할 정도라면 이미 가망 없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그는 겨우 눌러담았다.
"생각보다 편하지는 않나 보네."
"수석 노리는 학생들한테 하루만 견학시키면 다들 자퇴한다고 나설걸요. 있는대로 부려먹기나 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구르다 온 걸요."
아시엘의 웃는 얼굴에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조용한 분노가 흘러나오는것 같았다. 레비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하하.. 고생이 많네. 어쨌든 출입증 필요해서 왔지? 얼른 들어가 봐. 뭐, 넌 워낙에 유명하니 별로 필요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아."
아시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헤헤 쑥쓰럽게 웃으며 그가 내미는 작은 종이 한 장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이만 가 볼게요."
"오냐. 좀 자주 찾아 와!"
손을 크게 흔들어대는 그를 뒤로한 아시엘은 천천히 걸어 교내로 들어갔다. 아까 길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와 비례헤 그에게 모이는 시선 역시 배로 늘어났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제복인데! 선배님인가?"
"작년에 그 선배 아냐? 최연소로 졸업한 마검사 선배."
루이카엔 씨- 제복은 역시 아닌 것 같은데요. 딴에는 소리를 죽였겠지만 싫어도 들리는 학생들의 수근거림에 아시엘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 주변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들의 존경어린 눈빛은 그로서도 부담스러웠다.
'도망치자.'
줄행랑이 최고지. 아시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걷는 속도를 빨리해 거의 뛰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엄청난 규모의 아카데미 안을 기억을 더듬어 그는 가까스로 교무실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중간에 면식 있는 후배들이 "아시엘 선배-!" 하고 달려들기도 해 시간이 꽤 지체되어버렸다.
계실까, 계시겠지. 조금은 쿵쿵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는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그리고 열리는 문 틈으로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 보였고- 정면의 자리에 루이스가 앉아 있었다. 시험지 채점이라도 하는 건지 골머리를 싸안고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는 그의 모습에 아시엘은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달려갔다.
"아저씨!"
"....? 어? 아시엘!"
마찬가지로 그를 발견한 루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놀란 얼굴로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왔어? 어쩐 일이야?"
"어제 일 하나 끝내서요. 쉬는 날이라 와봤어요. 연락을 하고 올 걸 그랬나?"
아시엘은 헤헤 웃었다. 루이스 역시 픽 마주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아니, 잘 왔어. 라이펜 그 자식 밑에서 일하려니 죽겠지?"
"죽겠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대답하자 루이스는 하하.. 하고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곧 족치러 가주지, 속으로 살벌하게 이를 갈며 팔불출다운 다짐을 한 그는 아시엘을 맞은편 의자에 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말없이 양아들을 바라보던 루이스는 때뜸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네, 제복. 아주 멋져."
"고맙습니다."
아시엘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오는 길엔 꽤 고생했지만 그래도 역시 나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루이스의 눈동자는 드물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잘 지내셨어요?"
"오냐. 황궁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시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흐뭇함과 복잡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는 다시 미소지었다.
"고생 많지?"
"아니에요. 아, 맞아! 저 오늘 좋은 일 있었어요."
아시엘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다행히 루이스의 관심은 고생이 아니라 좋은 일 쪽으로 옮겨졌다. 아버지가 의아하게 뭔데? 하고 묻는 말에 소년은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 이제 검기도 쓸 수 있어요!"
"뭐? 검기를?"
"네!"
아시엘은 쑥쓰럽게 헤헤 웃었지만 루이스는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듯 했다. 어느정도 성장한 마검사에게 찾아오는 한계가 바로 검기였다. 마력의 사용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부적인 재능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 역시 내가 보는 눈 하나는 좋다니까. 잘했어, 정말. 정말 잘 했어."
"하하하하.. 아저씨, 조금 부끄러운데요."
아시엘이 머쓱하게 웃었지만 루이스는 기분 좋게 킬킬거리며 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어쩌다가 끌어낸 거야?"
"파견지에서 갑자기요. 혹시나 해서 오늘 아침에 루이카엔 씨랑 대련하면서 시험해 봤는데 되더라구요. 덤으로 마법도 4서클로 올랐고."
꽤 치열한 상황이었으니- 뒷말은 꿀꺽 삼키며 아시엘은 루이스의 손을 부드럽게 치우고 대답했다. 루이스는 그의 머리를 더 헤집으려 손을 들었지만 소년의 단호한 눈빛에 단념하고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래서, 루이카엔 녀석은 잘 지내나?"
"네. 굉장히요."
일하기 싫다고 개기다가 아델레트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아시엘이 그렇게 덧붙이자 루이스는 이마를 턱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그 녀석은.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죠, 뭐."
"그리고-"
건성으로 대답하던 아시엘은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에 의아해져 고개를 들고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케빈은?"
"네? 아- 물론 잘 지내요. 매일마다 에니르랑 엔을 두고 루이카엔 씨랑 참새니 지렁이니 하고 싸우느라 정신없어요."
".. 그래? 여전히 한심한 놈들이네."
그렇게 답하는 루이스의 눈에 안심하는 듯한 기색이 스쳐갔다. 아시엘은 더욱 궁금해졌지만 그렇다고 캐묻지는 않았다. 문득 일전의 케빈과 치료사 영감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건' 끊었나, 라고 했었던가.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
아시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딴 생각에 빠졌던 그를 현실로 돌려놓은 것은 루이스의 목소리였다.
"것보다 손에 들고 있는건 뭐야? 누가 심부름이라도 시켰어?"
"아."
아시엘은 그제야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있던 봉투의 존재를 깨달았다. 분위기를 바꿔 씩 웃은 그는 그것을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첫 월급 모셔뒀다가 산 거에요."
"선물? 나한테?"
아시엘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그는 멍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쑥쓰러움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시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감봉 먹어서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요. 그래도 이번 달 월급은 제대로 나왔어요. 어차피 생활관에 있으면 생필품은 다 나오니.... 와앗?"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갑자기 몸이 끌어당겨진 아시엘은 다음 순간 온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루이스가 그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고맙다."
"아...."
작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시엘은 작게 미소짓고는, 팔을 들어 루이스의 등을 꼭 감았다.
"별 말씀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