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6. 아버지와 아들(2)
잠시 후, 한참 동안 그 상태로 있던 루이스는 문득 인상을 찌푸리고 아시엘을 떼어냈다. 아시엘이 영문을 몰라 눈을 꿈뻑거리고만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너, 다쳤어? 약 냄새 나는데."
"아.. 하하."
되도록이면 안 들키려고 했는데. 아시엘은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파견지에서 일 하다가 좀. 별 거 아니에요."
"어느 놈이?"
루이스의 목소리는 어느새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사나워진 그의 눈을 물끄러미 보던 아시엘은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몸뚱이랑 목을 따로 분리시켜 줬으니까."
"...아, 그래.."
역시, 가만 나뒀을 리가 없지. 루이스는 애매한 미소를 흘리다 말머리를 돌렸다.
"무슨 일이었는데?"
"괴물 소탕이요. 메르티스 백작령에서. 그것보다 선물 안 뜯어볼 거에요?"
아시엘이 짐짓 토라졌다는 얼굴로 툴툴거리자 그는 아, 하고 방금 받은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시엘이 황제의 기사로서 받은 첫 월급으로 산 선물. 루이스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뭐든지 상관은 없지만 궁금하기는 하니까. 한 번 볼까?"
그는 조금 기대하며 봉투에서 곱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는 혹시나 포정지가 찢어질까 조심조심 붙여진 부분을 떼어냈다. 곧 벨벳으로 감싸진 고급스러운 케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어 보세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마음에 들고 자시고가 어디에 있어. 네가 준 건데."
루이스는 투박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비단 쿠션에 소중하게 놓여져 있는 것은 바로 금색의 브로치였다. 기사의 방패 아래에 교차된 검이 정교하게 세공된 위에 화려하지 않고 적당히 심플한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오오.. 멋진데? 어디서 샀어?"
"전부터 봐 뒀던 가게에서요. 마음에 들어요?"
아시엘은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런 그가 귀여웠던지 루이스는 흐뭇하게 미소짓고 곧바로 브로치를 가슴에 달았다.
"굉장히. 고맙다."
"아...!"
그제야 소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시엘은 아이다운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네요! 전 이때까지 아저씨한테 해 드린 게 없었으니까.. 계속 받기만 하고. 그래서 이런 거라도 해 드리고 싶었어요."
"하아.. 아시엘."
루이스는 그를 부드럽게 불렀다. 아시엘이 고개를 들자 그는 손을 올려 아들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주었다.
"받기만 한 건 네가 아니야. 착각하지 마."
"네?"
"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행복하니까. 선물도 필요 없어. 나한테는 너 자체가 선물이었으니까. 그냥 아프지 말고, 거기에 있으면 돼. 황궁 상황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제 거기에서 널 빼오지는 못 하겠지만. 다치지 말고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게 없지. 가끔 어리광도 부려주면 더 좋겠지만."
네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줬는지, 넌 모르겠지. 루이스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시엘을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서서히 변해가는 제국의 상황에 그가 휩쓸린다면 루이스는 곧바로 조용한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지러운 이 곳을 떠나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무래도 정세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모양이었다. 라이펜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대공이 그를 눈여겨보고 았다고 했으니.그리고-
"아시엘."
"네?"
"무슨 일은 없지?"
아시엘의 얼굴이 잠깐, 아주 잠깐 굳었다가 풀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옛날에 왜 황궁을 떠나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왜 여기에 있는 거에요?"
"뭐?"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이스는 말문이 막혔다. 아시엘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태연하게 씩 미소지었다.
"한번도 안 가르쳐 주셨잖아요. 폐하 바로 옆에 계셨다면서 왜 나와계시나 해서요."
".. 별 거 아냐. 그냥 뭐 좀 조사하러 나왔다가 널 만난 김에 그 핑계로 아직까지 안 들어가고 있는 거지."
"흐음.. 그렇구나. 무슨 조사였어요?"
아시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묻자 루이스는 무어라 말 하려 입을 뻐금거리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넌 몰라도 돼."
".. 그래요?"
아시엘은 빙그레 어른스럽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루이스는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없는거 맞지?"
"네. 아저씨한테 아무 일도 없는것 처럼요."
그가 소년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곧 그 속에 숨겨진 뜻을 읽어낸 루이스는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읽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던 루이스는 후, 하고 짧게 헛웃음같은 한숨을 터뜨렸다.
"있잖아, 아시엘. 난 가끔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떼 쓰고, 조르고, 가끔씩은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랬으면 이런 일에 휩쓸릴 일도없었을 텐데."
"하하.. 글쎄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세요. 아저씨의 일이 제 일과 같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전."
아시엘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루이스는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역시 그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어느새 소년은 그의 품을 떠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루이스는 갑갑함에 마른 세수를 했다.
"하아... 이 골치 아픈 녀석 같으니라고."
"죄송해요."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아시엘은 그렇게 사과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 태도에 루이스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 난 또 이렇게 너한테 지는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니."
"죄송.. 해요."
아시엘은 다시 느릿느릿 사과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미세한 그 변화를 읽어낸 루이스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러니까 확신만 줘."
".. 전염병,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땅, 이상한 마력."
소년이 작은 목소리로 단어들을 나열하자, 루이스는 하아- 하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심경을 대신하는듯 자신의 뒷머리를 아무렇게나 벅벅 헝클어뜨린 그는 곧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황제 폐하께서 그 사실을 알고 계셨으니까. 그 분께 따로 알려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
물론 이렇게 딱 정답일 줄은 몰랐지만, 아시엘은 헤헤 하고 평소의 웃음을 만들어냈다.
"웃음이 나와?"
"나와요. 솔직히 엄청 막막했거든요. 이기적이라는 건 알지만 역시 안심이 된다고나 할까."
그 말에 루이스는 에휴,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 네? 네."
아시엘은 영문을 몰라 눈을 꿈뻑이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루이스는 갑자기 킬킬 심술궂게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렇다고?"
"그런데요. 근데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데요?"
"그렇단 말이지."
아시엘이 뭐라고 하든 그는 숨죽여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가락을 뿅, 치켜들고 아시엘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꼭 찔렀다.
"그럼 아버지라고 불러 봐."
"네에?!"
그 난데없는 요구에 아시엘은 정말로 놀란듯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어버버거렸다.
"아버지라고 불러 보라고."
"그런다고 갑자기 되, 될 리가 없잖아요!"
그는 애써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이미 하얗던 얼굴에 미미한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천하의 아시엘이 당황했다는 그 희귀한 상황에 재미있어진 루이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짓궂게 물었다.
"왜 안돼? 내가 아버지인게 싫어? 아니면 아빠~ 는 어때?"
"그쪽이 더 안 돼요!"
아시엘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생활관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이 본다면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즐겁게 낄낄거리는 루이스와 얼굴이 달아오른 아시엘이라니- 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 특이한 부자의 투닥거림에 충분히 익숙해진 교수들 뿐이었다.
" 그렇게까지 말하면 좀 서운한데. 왜 싫다는 거야?"
"그거야.."
아시엘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져 그는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볼을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짜증스럽게 툴툴거렸다.
"갑자기 그게 될 리가 없잖아요. 한번도 안 해 봤는데."
"아아, 그러니까 쑥쓰럽다는 거지?"
"아니에요!"
그가 항의하듯 외쳤지만 루이스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나마 어린애다운 구석이 남아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이런 것으로 안심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그는 픽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 약속 하나만 하자."
"무슨 약속이요?"
아시엘은 겨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양 뺨에는 아직까지도 붉은 기가 맴돌고 있었다. 루이스는 조금은 기대 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손에 깍지를 꼈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한번이라도 좋아. 아버지라고 해."
".. 나참,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시엘은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난감하게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농담조로 말한 것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간절함의 한 조각이 녹아 있었다.
일이 끝난 후가 언제가 될자는 아무도 몰랐다. 한 달 후가 될지, 십년 후가 될지, 그 때 그들이 멀쩡하게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구천을 방황하는 혼백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게 된다면. 그 때가 온다면. 한번쯤은 뻔뻔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결국 아시엘은 못 이기는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루이스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