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50화 (15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7. 아버지와 아들(3)

주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두 사람이 들어온 곳은 교직원 기숙사에 있는 루이스의 방이었다. 그답게 굉장히 깔끔하게 꾸며지고 정리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는 내부를 보며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생활관의 케빈이 혼자 쓰는 방-뱀이 있는데다 거의 카오스 수준으로 어지럽히고 사는 인간이라 함께 방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을 떠올렸다.

언젠가는 쳐들어가서 꼭 정리해야지. 다소 엉뚱한 다짐을 하며 그는 루이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구석에 꽁꽁 숨겨 뒀던 조사 자료를 찾고 있었다.

"도와드려요?"

"아니, 잠깐만..."

루이스는 책을 아무렇게다 던지며 대꾸했다. 쿵! 하고 책들이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에 아시엘은 들어오면서 음파 자단 마법을 시전한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사했다.

"평소엔 도대체 어떻게 꺼내시는 거에요?"

"안 꺼내. 위험하니까."

한참동안 씨름하던 루이스는 마침내 책 무더기와 종이뭉치들을 방의 중앙으로 끌어냈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아시엘은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겉표지는 평범한 것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는 그 중 제일 위에 있는 '루셀의 창' 이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집어들어 겉을 벗겨보았다. 아니나다를까, 그 속에  감춰져있던 검은색의 딱딱한 하드커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식으로 숨겨두고 계셨네요."

"그렇지, 뭐."

루이스는 후- 하고 이마의 땀을 훔친 후 의자에 풀썩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편안히 앉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  아무래도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할 것 같긴 하지만. 일단, 황궁 상황부터 말해 봐. 보아 하니 내가 전해 들은거랑 실제 상황은 조금 다른 것 같으니까."

"음.."

아시엘은 잠시 시간 순서대로 말을 정리하느라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곧 그는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파견 나갔던 제 5경비대에서 발견한 구슬과 이상 현상, 파티에서 만났던 게르만과 그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구슬,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 아울. 또 갑자기 나타난 변종 몬스터와 그것들에게서 나온 구슬들. 대충이나마 그의 말이 끝맻어지자 눈을 감고 경청하던 루이스는 흠-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일단 그 구슬이라는 건 일종의 매개체 같은데.. 원거리에서도 마법을 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거라던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울은 아마  흑마법사라거나 아니면 마족 본인이겠죠."

아시엘은 대공의 궁 뒷마당에서 마주했던 그를 떠올렸다. 보통 사람이라고는 하기 힘든, 그런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흑발과 흑안의 남자. 단 한번 봤을 뿐인데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참고로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울이란 남자는 대공의 측근 정도로 알려져 있어요. 물론 정체는  아무도 모르고."

"흑마법에 대해서는 너 말고 아는 사람이 있나?"

"폐하밖에 없을걸요. 적어도 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루이스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라고 해야 하나.. 무섭도록 철저하네. 루이카엔 녀석한테도 안 알려줬어?"

"조금 고민했는데.. 역시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알려져봤자 위험해지만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저씨도 같은  생각이라서 폐하 곁에서 떨어진 거 아니에요?"

루이스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짜증나는 악우, 라이펜의 얼굴이 떠올렀는지 그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털어버리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넌 어디까지 알고 있어?"

"저도 방금 말한 게 한계에요. 흑마법을 알아낸건 몇 년 전에 우연히 산 책 덕분이었고.  거기엔 정말 기본적인 것밖언 없었어요."

아시엘은 책 더미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루이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답답한듯 한숨을 토하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알았어. 하아.."

그가 진짜 내 머리가 돌았나 보군, 미쳤어, 등등의 자조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아시엘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한참동안 험한 욕을 궁시렁거리던 그는 다시 한 번 하아,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 딴놈들은 몰라도 너한테만은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걸, 네녀석한테만 얘기해야 한다니 막막해서 그런다. 물론 널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냐. 어쨌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잘 들어, 한번밖에 말 안 할 거니까."

"네."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금 더 가까이에 붙어 앉아 귀를 쫑긋 세웠다.

루이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굉장히 길었다. 평소에 깔끔하고 간결하게 수업을 하던 그였지만 심란함 때문인지 제대로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끈기  있게 그의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나와  해가 다 져가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족- 이라.'

그는 루이스가 전해준 말들을 곱씹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때까지 제국에서 비교적 최근에 마족이 소환된 흔적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된 곳은 15군데. 하지만 그 중에 정말로 성공한 곳은 메르티스 가를 합쳐 3, 4곳 뿐이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묻자 루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생기는 것과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부작용현상들이 생겼던 곳들이지. 나머지는 시도만 하고 실패하거나 도중에 그만둔 것 같아."

성공한 것은 그 뿐이었지만 꽤 많은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아시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턱을 쓰다듬었다. 흑마법의 특성은 마법사 스스로의 마력이 아니라 소환한 마족의 마력과 힘을 사용한다는 것. 대신 흑마법사는 자신이 계약한 마족이 내거는 조건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건이요? 그냥 소환할 때 바친 피로는 안 되는 거에요?"

"어. 뭐, 이것도 그냥 책에 적혀 있던 거라 100퍼센트 믿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제일 신빙성 있는 자료야."

루이스는 책 더미로 다가가 굉장히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한 뭉치의 양피지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아시엘은 그것을 받아들고 꼼꼼히 읽었고, 지금 그 종이들은 곱게 접혀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소환할 때 필요한 사람과 동물의 피. 제물은 그게 끝이 아니었던 거야."

교수는 그 말을 할 때 약간 인상을 찌푸렸었다. 소환된 마족은 자신을 불러낸 인간에게 자기 나름의 조건을 건다. 신체의 일부분이든, 장난감으로 삼을 인간들이든 다 그들 마음대로였다. 심지어는 도시 하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라고, 그 백 몇 년은 된 양피지에 적혀 있었다.

한 흑마법사 단체의 연구서였던 모양이라고 루이스가 말해 준 종이에는, 얼핏 보면 흑마법에 관련된 것인지 모를 만 한 것들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지식이 약간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연구 일지에는 단체의 회원이었던 자들의 소환 기록과 결과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갔다, 란 솔직한 결말로 끝나 있었지만 수십 번의 도전 끝에 몇 번은 성공한 것 같았다.

조건을 거절당한 마족은 하나같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마계로 돌아갔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이미 소환될 때 피를 받은 그들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조건을 수락한 흑마법사들은 그 대신에 마족의 마력을 받았고, 그들의 절대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마족들은 특유의 아름다움과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어둠 속에 있는 미의 종족이라고도 불렸었다. 척 보기에는 인간과 구별이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마족 특유의 마력 외에도 각자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족 본인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리고 또 다른 특징 하나는, 감정이 격해지거나 능력을 사용할 때 눈이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것.

'적안..'

아시엘과 같은. 루이스가 그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얼굴을 조금 굳혔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 씨익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언짢아 하지 마. 녀석들의 눈은 그냥 빨갛다기 보단 피의 색깔과 비슷했다고 하더라고. 네 눈과 비교할 게 못 되지."

아시엘은 그에게 애매한 웃음을 지어보였었다. 그는 몬스터들의 피에 젖은 듯한 붉은 눈을 상기해냈다. 그것들과 비슷한 느낌일까,  아시엘은 점점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뱉았다.

"뒤죽박죽이네..."

까마득한 세계의 것이라고 여겼던 흑마법이 사실은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칼끝은 이쪽의 목을 겨누고 있으니 혼란스러워 할 시간도 없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10년 동안 추적해서 얻은 정보들을 거의 다 그에게 전해주었으니 이젠 아시엘이 알아서 해야 할 차례였다.

그는 마탑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캐롤이 가지고 있는 구슬들을 돌려받을 참이었다. 그리고 생활관으로 돌아가면 벨킨과도 이야기를 해서 구슬을 회수해야 했다.

제국에게 고용된 관리자들이 바쁘게 오가머 가로등에 불을 붙이자 어두웠던 밤거리가 다시 환하게 밝혀졌다. 사람들은 늦은 시간에 홀로 돌아다니는 소년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눈에 띄는 제복은 루이스에게 빌린 망토로 가린 상태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시엘은 중얼거렸다. 구슬을 다 회수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들을 만든 것이 흑마법사들 측이라면 그것이 셀레니스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것을 파괴하거나 빼돌리려는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차갑게 식어가는 밤공기에, 아시엘은 망토의 앞자락을 여몄다. 저도 모르게 손 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걷는 것을 멈추고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에 별들이 하나 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아시엘은 짐짓 밝게 미소지었다.

"... 뭐 어때!"

거대한 벽이 생겼지만,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맞설 상매는 정해져 있었고, 이제야 그들의 전력을 확인한 것 뿐. 벌써부터 움츠러들면 될 일도 안 될게 뻔했다. 아시엘은 뺨을 톡톡 두드리고 다시 활기차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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