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8. 아버지와 아들(4)
조금 떨어진 곳에 마탑이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빛 계열 마법으로 주변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시엘은 발걸음을 돌려 어두운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바깥으로 걸어나온 것은 금발의 아시엘이 아닌 , 수수한 망토를 두른 갈색 머리칼의 평범한 사내아이였다. 그는 근처 가게의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뿌듯하게 미소지었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성공적으로 바뀐 자신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피던 아시엘은 곧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푸른색으로 바뀌었어야 할 그의 눈동자는 원래의 붉은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수라도 했나, 아시엘은 잠시 고민했지만 곧 사소한 것에는 신경을 끄기로 하고 다시 바쁘게 걷기 시작했다. 행선지는 물론 마탑이었다.
구에 도착하자, 예의 그 안내원 여성이 반갑게 미소지으며 맞아주었다. 그가 마법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는 정갈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캐롤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교수님께 옛 제자가 찾아왔다고하면 아실 거에요."
아시엘의 말에, 안내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통신구슬로 내부에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는 지난번의 그 대기실로 아시엘을 데리고 갔다. 그녀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방을 나서자 아시엘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으.. 지친다."
그는 어느새 땀이 배여나와 축축해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갈색 머리칼의 끝부분부터 점점 금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짙은색의 망토 역시 점점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원래의 하얀 제복과 루이스에게 빌렸던 겉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역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외로 힘드네, 이거.. 아직 미숙해서 그런가."
마력을 응집해 몸의 근처에 두르고 눈에 보이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마법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지만 마력을 고정시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워 머리가 어질어질질할 지경이었다. 요령이 생긴다면 괜찮아지겠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쿵쾅쿵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문이 거칠게 벌컥!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
아시엘은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캐롤이 숨을 씨근덕거리며 문가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인사도 없이 문을 쾅, 닫고 성난 황소처럼 척척 걸어와 아시엘의 맞은편에 푹 앉았다.
"교수님?"
"슬슬 올 거라고 생각했어. 오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하려고 했지."
그가 의아하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캐롤은 테이블 위에 자주색 주머니 하나를 툭 던졌다.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에 아시엘은 작게 숨을 삼켰다.
캐롤은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거 정체가 뭐야?"
"하하.. 모르니까 제가 교수님께 맡겼겠죠. 그런데 사정이 좀 생겨서 회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거짓말 하지 마. 이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위험하나는 것 하나만은 알겠어. 너도 잘 알거 아니야? 그래서 뒤늦게 되찾으러 온 거고."
평소의 신경질적이지만 느슨했던 어조가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날카로워져 있었고 전에 없이 아시엘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늦은 건가, 속으로 자책의 말을 짧게 내뱉은 소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일? 별 거 아냐. 너희들이 극비라고 했는데 탑에서 연구하면 아무래도 들킬 것 같아서, 몇 달간 비워뒀던 집으로 하나를 가져갔어. 그리고 며칠동안 밤을 새서 구슬이랑 안의 이상한! 그 시커먼 마력 덩어리를 간신히 분리하는데 성공했지, 그리고- "
흥분해서 빠르게 말을 잇던 캐롤은 숨이 찬지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내 집 안에 있던 식물, 쥐새끼, 벌레 할 것 없이 다 죽어버렸어. 나야 물론 방어막을 치고 있었으니 무사했지만. 그리고 마력은 그대로 흩어져버렸지."
"아.."
아시엘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고개를 천장을 향해 젖히고 있던 캐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 눈앞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아시엘은 자세를 바로하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 그게 황실의 일과 관련이 있다지? 그 빌어먹을 황제와 대공의 기싸움 사이에서 태어난 산물인거 아냐? 셀레니스인 네가 가지고 왔다는 건 슈베이만 디아란 세튼 대공과 그의 직속 기사단 루아 이클립스의 소행이라는 거겠지."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왜 여기로 가지고 왔던 걸까. 아카데미를 떠나오기 전 루이스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캐롤은 아시엘의 주먹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얘질 정도로 꽉 쥐여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네가 나한테 맡겼었다는 건, 아마 그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일 테고. 네 성격상 조금의 위험성이라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혼자 꽁꽁 숨겨뒀을 테니까. 네 생각보다 이 녀석들이 더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찾으러 온 것 아냐?"
"... 죄송해요. 교수님께 이게 있다는 걸 알고 있는건 우리 단장이랑 저, 제르닌 선배밖에 없으니까 ..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장담은 못하겠지만 최대한 폐는 안 끼치도록 할게요."
아시엘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정면을 보고 있던 얼굴 역시 점점 수그러져 결국 바닥을 향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캐롤은 결국 이를 악물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콰앙! 내리쳤다.
"야, 이 멍청아!"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터져나온 고함에, 아시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캐롤은 정말로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가 미안해 하라고 했냐? 내 걱정을 왜 해? 지금 진짜 목숨이 위험한 건 네놈이잖아, 이 속도 없는 놈아. 왜 이럴 때는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안 드러내냐고. 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괜찮아! 꼬맹이 주제에 건방지다고. 어른을 좀 믿어!"
"......"
아시엘은 얼이 빠져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갔을까 하는 고민을 할 겨를도 없었다. 한참동안 서서 씨근덕거리던 캐롤은 다시 소파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난 이거 안 돌려줄 거다. 애초에 네가 찾으러 안 왔으면 계속 내가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으니까."
"네? 하지만-"
선언하는듯 그가 말하자 아시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캐롤은 사납게 눈썹을 올려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게 뭔지는 몰라. 모른다고, 나도. 하지만 실험할 때마나 나왔던 건 어마어마한 결과들이지. 내 집의 해충들을 죄다 박멸해준 것도 모자라서 땅에 파묻어본 것도 근처의 식물이란 식물은 다 죽여버리고. 상자에 넣어서 쥐랑 같이 몇 시간만 두니까 갑자기 돌연변이를 일으키질 않나. 위험하다는 건 잘 알겠어. 네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확신했지."
"......"
"난 발 안 뺄거고, 네놈이 이걸 가지고 돌아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전직 황실 마법사, 캘리안 루 헤시어스의 명예를 걸고."
그것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을 모두 쏟아낸 캐롤은 소리 없이 제자에게 답을 독촉했고 아시엘은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복잡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는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뱉어내고 마른 세수를 했다.
".. 죄송해요, 교수님.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진작에 그럴 것이지."
캐롤은 그제야 화난 표정을 풀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 역시 쑥쓰럽게 배시시 웃었다.
"사실.. 아까 루이스 아저씨를 만나러 갔었는데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캐롤 교수님이 구슬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아냈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고."
"잘 알고 있네."
"아저씨는 어차피 황궁 외에 있는 마법사가 한 명쯤은 필요한데다 캐롤 교수님이라면 얼마든지 끌어들여도, 아니아니, 협력을 구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정확히는, "그딴 녀석은 죽어버려도 상관 없으니까 이렇게 된 바에야 물귀신 작전으로 가자" 라고 했었지만. 솔직하게 전한다면 당장에 날뛸 것이 분명해 아시엘은 애써 말을 순화시켰다.
"뭐.. 저도 4서클이 되기는 했지만, 전 연구보다는 전투형이니까요. 셀레니스의 다른 마법사 선배도 그렇고. 황실 마법사였던 교수님이라면 정세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 적합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썩 내키진 않네요."
"착한건지 무서운 건지, 하나만 해. 니스 녀석을 탈탈 털어댈 때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간 거야?"
캐롤은 퉁명스럽지만 장난기 섞인 어조로 툭 내뱉았다. 제가 뭘요, 하고 아시엘이 뾰루퉁하게 대꾸하자 그는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네들 대련에 입회했었다는 사실을 잊었나봐? 아니지. 대련보다는 네녀석의 일방적인 구타였지, 그건."
"음... 확실히 그땐 좀 지나쳤던 감이 없지는 않지만요."
아시엘은 작게 신음을 흘리자 캐롤은 황당하게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곁에 있던 캐롤이 점점 피떡이 되어가는 니스를 보고 말려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미소지으며 침착하게 그를 두들기는 아시엘이 무서워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보다못해 말리려 한 번 시도는 했었지만 아시엘으로부터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고 바로 물러섰다)
그 후에 캐롤의 징계가 논의되는 자리에서 아시엘을 잘 아는 교수들이 강력하게 변호를 해 준 덕에- 아마 자신들이라도 말리지 못했을 거라며- 감봉으로 끝났었다는 일 역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했다.
아시엘 역시 보통이라면 퇴학이나 정학을 당할 뻔 했지만 그가 직접 나서 특유의 언변과 뻔뻔함으로 니스의 소행을 낱낱히 밝힌 덕에 가벼운 벌로 끝났었다.
"하여간 못 말리는 녀석이라니까, 넌. 예나 지금이나."
캐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아시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욕이죠?"
"그럴 리가. 그냥 재미있어서 그래."
교수는 빙글빙글 얄밉게 미소지었다. 아시엘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휘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캐롤이 먼저 선수를 쳐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래서 난 뭐 하면 돼?"
"... 그것도 모르고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고 있었어요?"
아시엘은 불퉁하게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캐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후회하지 마세요. 이제 교수님은 명백한 황제파, 반 대공파가 되는 거니까요."
"무게 잡지 마, 이 자식아. 나도 아니까."
캐롤은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제자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헝클었다.
아시엘은 조심스럽게 생활관의 문을 밀었다. 이미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 로비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캐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 버려 그는 다음을 기약하고 마탑에서 나왔다. 물론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캐롤 교수에게는 흑마법에 관한 것만 전했을 뿐, 정치적인 상황은 거의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 역시 동의한 일이었다. 그의 역할은 마력을 연구하고 그 특성과 약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한정했다. 어디까지나 그는 외부인이었고- 스스로도 정치에는 관여하고싶지 않아했으니까.
"휴..."
아시엘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을 깨우지 않으려 그는 발꿈치를 들고 천천히 방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어딜 갔다가 이제 와?"
"우왓!?"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시엘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익숙한 인영이 어둠 속의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벌렁벌렁거리는 가슴을 겨우 가라앉히고 그는 작게 볼멘소리를 냈다.
"노, 놀랐잖아요, 루이카엔 씨."
"그랬다면 미안.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었어? 카이스가 걱정하더라."
그- 루이카엔은 몸을 일으켜 아시엘에게 다가가 몸을 숙이고 그의 조그만 머리통에 손을 턱 올려 짖궂게 쓰다듬었다.
"일찍일찍 다녀, 요 꼬맹이. 지금까지 뭘 하다 온 거야?"
"그냥 이야기하다보니 좀 늦었어요."
아시엘은 머쓱하게 헤헤 웃다 얼굴에 미안한 빛을 띄우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 저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니면 뭐겠어. 얼른 올라가서 자기나 해. 또 공부한다고 앉아있지 말고. 내일도 바로 일해야 하니까."
루이카엔은 허리를 펴고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몸을 빙글 돌리고 등 뒤로 손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나 먼저 들어간다. 잘 자."
"네에.."
아시엘은 잠시 멍하니 비척비척 걸어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