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52화 (15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9. 개와 고양이(1)

아시엘은 슌이 깨우는 목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분명 푹 잤던것 같은데,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괴어 있었다. 앞머리 역시 축축하게 젖어 얼굴에 붙어 있었다.

"아.. ?"

"가위 눌렸어? 무슨 잠을 그렇게 험하게 자."

눈썹을 휘며, 슌은 침대에 누운채 멍청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시엘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다 헤헤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은 무슨. 더 잘거 아니면 일어나기나 해."

"네에."

그는 순순히 대답하고 부시시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탁상 위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기상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쯤 남았지만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기억은 제대로 안 나지만 악몽을 꾼게 확실한듯 골이 지끈지끈거렸다. 그래도 익숙한 감각이라 그는 머리를 한 번 휘휘 털고 침대에서 나왔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그래? 하루이틀도 아니고."

"별 거 아니에요. 기억도 제대로 안 나는데요, 오늘은."

뭐, 평소랑 똑같았겠지만. 뒷말을 꿀꺽 삼키고 아시엘은 침구를 말끔하게 정리했다.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슌은 더 잘거야, 라며 자신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어라, 일어나신거 아니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깼지. 네가 좀 낑낑거려야지."

그가 이불을 둘둘 말고 등을 돌리며 하는 말에 아시엘은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뭘 죄송까지야."

웅얼거리듯 대꾸한 슌은 그대로 쿨쿨 잠들어버렸다. 저러다 또 늦잠 자면 안될텐데, 아시엘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탈탈 털고 옷가지를 챙겨 샤워실로 향했다.

탁. 방문이 닫히고 그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자, 자는듯 눈을 꾹 감고 있던 슌은 한숨을 깊게 푸욱 내쉬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아침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샤워를 하고 로비에서 노닥거리며 마법서를 읽다 보니 어느새 기상 시간이 되었고, 부시시한 머리에 엉망진창인 꼴을 한 기사들이 하나 둘 기어나와  좋은 아침- 비슷한 인사를 웅얼거리며 지나갔다.

소파에서 뒹굴던 아시엘은 몸을 일으켜 책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려 로비 구석의 책꽂이로 다가갔다가, 문득 맨 아래칸에 정리되어 있는 제목 없는 표지의 책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응?"

평소 독서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케빈이나 다른 기사들이 저 책만은 유독 히히덕거리며 자주 읽고는 했다. 때때로는 루이카엔과 휴온도 그 틈에 끼어있었다. 새삼 고개를 드는 호기심에, 아시엘은 별 생각 없이 그것 중 한 권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막 책을 펼치려는데, 덥썩.

갑자기 뒤에서 손이 튀어나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엥?"

"아, 아시에엘? 지금 뭐 보려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건지 케빈이 한껏 굳은 얼굴근육을 억지로 구겨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접근하는 기척도, 소리도 느끼지 못한 아시엘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냐니.. 책인데요? 선배들이 재미있게 보길래. 그것보다 이것 좀 놔주실래요?"

그는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케빈은 되려 손아귀에 힘을 더 꽉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있었지만- 아시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둘은 한동안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셀레니스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케빈의 괴력을 아시엘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아시엘은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요?"

"하.. 하하.. 문제라기 보다는. 뭐랄까아.. 어쨌든 그거 내려놓지 않을래?"

평소라면 이미 물러났을 테지만 케빈은 진땀을 빼면서도 책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아시엘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니까 왜요? 제가 보면 안 될 거라도 있나요?"

"그렇다고 해야 하나.. 것보다 너 이게 뭔지 모르는 거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빈은 한층 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안돼. 아직 일러."

"음- 아아-."

아시엘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고집을 부리자니 케빈이 지나치게 필사적이었고- 잡힌 손목이 그의 손바닥에서 난 땀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자니 어째 찜찜했다.

그때, 묘한 눈싸움을 하던 두 사람 뒤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빈, 아시엘. 둘이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아.. 제르닌 선배."

그, 제르닌은 무뚝뚝한 얼굴에 한심하다는 빛을 띄우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시엘과 케빈 사이에 끼여 사정없이 괴롭힘당하던 책을 간단하게 낚아챘다.

"아."

"아침부터 쓸데없는데 힘 빠지 마. 아시엘, 이 바보는 내버려두고 내 방에 가서 카이스나 좀 깨워줘. 그 녀석 또 시체상태니까."

옆에서 케빈이 사납게 왈왈거리는 것을 싹 무시하고 제르닌이 언짢게 말하자 아시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네. 그리고 너무 바보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보통 사람에게 바보라고 하는 건 욕이 아니지만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는 건 욕이잖아요."

"그렇게 하지. 미안했다, 케빈. 넌 바보가 아니다."

"이것들이 진짜!"

제르닌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케빈은 빽 고함을 쳣다. 아시엘은 킬킬 웃음을 터뜨리고 그들에게서 몸을 빙글 돌렸다.

그가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뒤에서 철썩 하고 제르닌이 책으로 케빈의 머리를 후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멍청아,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뒤이어 케빈의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흘러왔다. 둘 다 아시엘에게 들릴세라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있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잠시 서서 선배들의 대화를 엿듣던 아시엘은 비져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계단을 한 칸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제 3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거."

-아델레트였다. 저런, 하고 짧게 케빈과 제르닌에게 유감을 표한 아시엘은 재빨리 귀를 막고 후다닥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대충 예상했던 대로 생활관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녀의 호통이 폭발했다.

여전히 시끄러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시엘이 카이스를 끌고(?) 다시 로비로 내려왔을 때는 단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원들이 한 줄로 질서정연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들고 벌을 서는 희안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는 케빈은 물론이고, 지금은 인간형인 늑대 쌍둥이와 휴온까지 섞여 있었다. 제르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똑바로 들어!"

약간 느슨해졌던 팔들이 아델레트의 호통으로 다시 바짝 들어올려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이 되는 거야, 아시엘은 그런 말을 속으로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을 발견한 아델레트는 카이스에게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늦어! 왜 이제야 와?"

"죄, 죄, 죄송합니다.."

깜짝 놀란 카이스는 답지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벌을 서는 무리의 선두에 있던 루이카엔이 볼멘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애한테 화풀이를 하고 그래, 아델. 좋게좋게.."

"주모자는 닥쳐. 저 책 들여온거 너라면서? 좋게좋게 박살나고 싶어?"

아델레트의 살벌한 말에 그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아시엘은 어느새 죄다 뽑혀 한쪽에 쌓여있는 책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각자 개인적으로 숨겨두었던 것까지 긁어모았는지 양이 꽤 많았다.

"그래서 결국 저게 뭐에요?"

"성인 남자의 참고서."

"성서."

"가뭄 속의 단 비?"

"꿈을 간접적으로 이룰 수 있는 마법의 책."

꿇어앉은 기사들이 차례차례 뱉는 의미불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빠악! 하는 타격음이 뒤를 이었다.

"커흑!"

"잘 하는 짓이다.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지막 말을 내뱉은 오스카를 후려친 실내용 슬리퍼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아델레트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왜 나한테만 그래, 하고 툴툴거리는 오스카를 무시하고 그녀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간이들이 하는 말은 신경쓰지 마. 알았지?"

"네, 네.."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벌을 서는 채로 입이 잔뜩 부어 무어라 꿍얼꿍얼대던 루이카엔이 아, 하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시엘, 황제 폐하로부터 호출이 있었는데."

".....젠장."

아시엘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얼굴에 짜증을 확 내비치자 아델레트를 제외한 일동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보통이라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불러주시는데 표정이 그게 뭐야, 라고 질책해야 마땅했지만 사정을 아는 셀레니스 기사단은 그에게 연민을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 별 일 아니시겠지. 얼른 다녀와. 오늘 오전 순찰은 카이스랑 오스카로 바꿔줄 테니까."

"그래야죠."

정말로 내키진 않지만. 덕분에 황제의 장난감 신세에서 반쯤 벗어난 루이카엔이 묘하게 유쾌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 대신 카이스의 어깨를 톡 쳤다.

"아참, 아시엘.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하자."

"네?"

아델레트는 막 걸음을 옮기려는 아시엘을 불러세웠다. 그녀는 생긋 미소지으며 한구석에 쌓여있는 책더미를 가리켰다.

"저거 좀 태워줄래?"

"그러죠, 뭐."

자, 자, 자, 잠깐마아안! 벌을 서던 이들이 단체로 괴성을 지르며 아우성을 벌이기 시작했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들에게 손을 뻗어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안돼, 아시엘! 기다려! 잠깐만!"

"파이어."

그의 손바닥 위의 공중에 붉은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화르륵! 수상한 성서(?) 위에 무정하게 불꽃이 피어올라 곧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닥, 탁, 타닥. 기사들은 점점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성서(?)를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둑 후.

"으아아아아아악! 저게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건데!"

"아시에에에엘! 어떻게 이런 짓을! 너한텐 남자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거냐!"

"여장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요."

아시엘은 생글 웃어보인 후 귀를 막고 절규하는 그들에서 등을 돌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솔직히 화풀이 한 거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해. 상상 이상으로 안타까워하는 선배들에게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보낸 그는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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