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57화 (15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4. 황실 전용 도서관(2)

끼이익. 두꺼운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시엘은 그 안으로 빼꼼 고개를 디밀고 내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발을 들였다.

퀴퀴한 공기가 훅 얼굴에 끼쳐왔다.

안은 농도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도서들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이쪽에는 햇볕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끼익- 쾅,  하고 뒤에서 문이 도로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사위는 완벽하게 빛과 차단되었다. 아시엘의 눈에도 책장들의 흐릿한 육곽만 보일 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그를 감싸안았다.

"라이트."

아시엘이 조용히 시동어를 읊조리자 선명하게 하얗게 빛나는 마법진이 그의 손 위의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다음 순간,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호오.."

바닥의 오래된 붉은색 카펫이 고풍스러운 문양을 드러내고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서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게 감탄사를 흘린 아시엘은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보안 문제 때문인지 관리인들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라 오래 갇혀있던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책들 위에도, 책장 위에도 먼지는 보이지 않았다. 왜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아시엘은 곧 공기 중에 미미하게 감도는 마력을 느끼고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천장에 박힌 마정석으로 청결 마법과 보호 마법을 시전해둔 것이었다.

생각보다 규모는 크지 않았다. 솔직히 도서관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아시엘은 이곳의 가치가 제국에서 가장 크다는 수도의 세튼 도서관보마 더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아."

조용히 사열하고 있는 책들의 제목을 살피며 아시엘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그는 유트리안 황자가 자신에게 출입증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불만스럽게 인정 못해, 하고 쏘아붙일만 하다고 어렴풋이 떠올렸다.

출입증을 요구하기 전에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 곳은 일개 기사가 들어올 곳이 아니었다. 제국의 모든 금서, 출판이 금지된 책들이 다 이곳에 모여있는듯 했다.

제국의 황실을 위협하는 사상을 저술했다는 이유로 저자가 사형당한 후 금서로 지정된 정치서적, 마찬가지로 안보를 까닭으로 출판이 금지되고 지금은 초기에 나왔던 몇 권만 천문학적인 액수로 시장에 떠돌고 있는 책, 굉장히 혁신적이고 지극히 타당하지만 널리 알려진다면 백성들을 통치하기 어려워진다는 귀족들의 이기심으로 오래 전 사장된 연구서들.

이 책들은 모두 금서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결박당해 숨죽이고 있는 화약들이었다. 누군가가 불을 붙이기만 하면 바로 폭발할 수 있는. 아시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얼핏 보기만 했지만 여기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목록을 나눠주며 읽어서는 안돼고, 손 대서도 안돼며 발견시 즉시 신고하라고 가르쳤던 것들과 일치했다.

이것들 중 몇 권이라도 시중에 풀린다면 당장에 제국민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몰랐다. 아시엘은 어쩐지 정신이 아찔해지는것 같아 서가에 몸을 기댔다.

이곳은 단순한 문서고가 아니었다. 제국의 치부가, 순결한 백색으로 점칠되어 고귀한 체하고 있는 황궁에 고여서 썩어가는 물이 고인 곳이었다.

"감사해야 하나.."

아시엘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는 그에게 넘치는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무리한 요구를 쉽게 받아주는 것으로 라이펜은 아시엘의 발을 단단히 자신의 곁에 박아놓을 생각인듯 했다.

그는 대충 손을 뻗어 제목이 적혀있지 않은 책을 펼쳤다. 곰팡내가 솔솔 풍겨오며 여러가지 숫자들이 나열된 종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옛 고위 귀족들의 비리 장부였다.

"장난 아니네, 이거. 뭐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지만."

아시엘은 장부를 아무렇게나 꽂고 더러운 물건이라도 만진 양 손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책들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유트리안의 곁에 있는다면 올 기회는 많겠지만 시간의 제약이 있으니 아무래도 한번에 최대한 많이 조사를 하는게 좋을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아시엘이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자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부터 해두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천천히 책들을 살피며 서가의 숲을 헤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에 섞인 세월의 냄새가 진해지고 있었다.

간간히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책들에게 발을 잡히기도 했지만 어쨌든 아시엘은 조금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끝까지 들어온 것인지 단단한 나무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 끝인가?"

하지만 아직 그는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설마 없는 건가, 일순 생각했지만 아시엘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구 귀족들의 비리 장부까지 모아둔 곳이었다.

"그렇다면...."

아시엘은 벽을 면밀히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가장 구석진 자리에 낡아빠진 나무문 하나가 쭈그려 앉은 노파처럼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아주 오래된 양식의 조각으로 소박하게 꾸며진 문고리를 덥썩 잡아 당겼다. 하지만 잠겼는지 덜컹덜컹, 하는 소리만 건조하게 울려퍼질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라?"

아시엘은 문고리 아래에 나있는 조그만 열쇠구멍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폐하께 가서 열쇠를 내놓으라고 할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도 걸릴 뿐더러 그가 쉬이 내어줄지도 미지수였고 무엇보다 귀찮았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들어가야 하는데 문이 잠겨있다. 열쇠도 없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아시엘은 씩 미소짓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목표물은 앞을 막고 있는 작은 문. 그는 도움닫기를 해 문의 지척까지 다가가 팍, 땅을 박차고 멋진 날려차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우아악!"

쿠아아앙! 나무 판자가 힘없이 뒤로 쓰러지며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아시엘 역시 덩달아 바닥에 처박혀 뒹굴었다. 곱게 쌓여있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그는 켈룩켈룩 기침을 토하며 발딱 몸을 일으켰다.

"콜록! 켁, 아야야.."

세게 박은 뒷통수가 욱씬욱씬거렸다. 머리를 도리질을 쳐 애써 고통을 쫓은 그는 눈을 뜨고 방 안을 살폈다. 밖의 마법이 미치지 않는지 이곳은 각종 먼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 역시 훨씬 더 탁했다.

잠시 새로운 공간을 살피던 아시엘은 먼저 귀를 기울여 방금의 소리 때문에 소란이 일지는 않았나 확인했다. 다행히 바깥에서는 아무 눈치도 못 챈듯 조용하기만 했다. 그는 더러워진 옷을 탈탈 털고 바깥에서 빛나고 있는, 라이트 마법으로 생성된 얼굴만한 빛의 구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엉망진창으로 부숴져 있는 문이었다. 여기저기 부러진 파편들을 보며 아시엘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이거 발견되면 난리 나겠는데, 그는 혼자 중얼거렸지만 곧 알게 뭐냐는 식으로 그것에서 시선을 떼버렸다.

커다란 서가들이 자리잡고 있던 바깥과는 다르게 이곳은 키 작은 책꽂이들이 고스란란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적어도 몇 년동안은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듯 했다. 청결하게 유지하려는 일말의 노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깥의 책들은 그래도 보관한다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유폐되었다는 말이 더 맞을듯 했다. 아시엘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하얀 먼지 카펫 위베 그의 작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그것을 깨달은 아시엘은 멈칫했다.

문을 부숴버린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용의선상에 자신이 올라가서는 안 됐다.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흔적은 이미 만들어 버렸지만서도 발자국 같은 것을 남겼다가는 낭패를 볼게 뻔했다. 어차피 누군가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발견되지도 않을 테지만.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는 눈을 살풋 감고 두 팔을 뻗은 후 마력을 운용했다.

"셀 르 크레아 헤이즈란. 클린!"

그의 머리 위에 푸른색의 마법진이 커다랗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강풍이 서고 안을 휩쓸었다. 휘이잉- 한참동안 아시엘의 금발을 흔들며 먼지투성이의 방을 맴돌던 바람은 한순간 딱 멎어버렸다.

아시엘은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저분하던 곳이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해져 있었다. 먼지는 커녕 티끌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책꽂이 위는 방금 걸레질을 마친 것처럼 반짝거렸고 두터운 먼지에 덮혀 무늬조차 알아볼 수 없었던 붉은색 카펫 역시 제 색깔을 찾았다.

"이정도면 대충 착한 요정이 다녀갔다고들 여기겠지, 뭐."

조금 시끄러워지긴 하겠지만 어쨌든 자신만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다. 황제가 그에게 출입증을 줬다는 사실은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증거가 없으니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을 툭 내뱉으며 아시엘은 책꽂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책의 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의 붉은색 눈이 반짝였다. 검은 겉표지 위에 멋들어진 글씨로 쓰여 있었다.

흑마법의 이론.

아시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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