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59화 (15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6. 철부지 황자, 바보 기사(1)

서고에서 나온 아시엘이 다시 문을 단단히 닫고 열람실 옆에 자리를 잡자마자 유트리안과 그의 남자 선생이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이고 선생이 도서관을 나서자 유트리안은 아시엘을 힐끗 곁눈질했다.

"정말 여기에 계속 있었어?"

"별 문제 없잖아요."

아시엘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유트리안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서 도서관의 출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시엘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저질러놓은 일을 발견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황제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의도 반, 약간의 심술이 반이었다. 그러니까 시종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 같은 것이라고-  아시엘이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고 있던 그 순간, 유트리안이 밖으로 나섰고 몇초 후, 그의 호통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자식들 다 어디 갔어!"

역시. 아시엘은 웃음을 삼키고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예상대로 그는 텅 빈 황실 전용 도서관의 앞마당을 보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황자궁에서 유트리안을 따라왔던 시종들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를 지키는 호위병사들 몇몇만 어쩔 줄을 몰라 땅만 보고 서있을 뿐이었다.

"특별 휴가를 드렸어요. 다들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겠죠."

아시엘은 빙글빙글 웃으며 유트리안의 곁에 섰다. 황자는 몸을 팩 돌려 그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분노를 폭발시켰다.

"누구 마음대로! 그것들이 없으면 생활을 어떻게 하라고?"

"궁에 몇 명 남아있잖아요. 그리고 시종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아시엘은 차분하게 미소지었다. 유트리안은 완전히 어이가 없어져 그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데려왔던 시종 서른 명이 수업을 받고 나오는 사이에 증발해 있었다. 호위병들도 몇명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도서관 앞을 지키던 경비원들은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략 세 시간 전, 유트리안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안으로 들어간 후의 상황을 그들은 빠짐없이 지켜보았던 것이다.

헤실헤실 저도 모르게 혼이 쏙 빠져버릴것 같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아시엘은 귀한 물건 받은 값을 하겠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종들에게 말했다. 일주일동안의 휴가를 주겠다고.

궁에 남아있는 시종들에게도 말을 전해두라고 그는 일렀다.일주일 동안 호위 병력을 제외하고 황자궁에 5명 이상의 하인을 남겨두지 말라는 어린 기사의 말에 나이가 지긋한 시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아시엘은 유트리안을 위해서라며 차근차근 설득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시종들의 합법적 파업. 아시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하자 유트리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말이 돼? 그들의 주인은 나야. 네가 뭔데 멋대로 그런 짓을 하냐고!"

"전하, 그들은 물건이 아니에요. 게다가 지난번에 그러셨잖아요? 시도때도 없이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귀찮고 성가시다고. 이번 기회에 한번 자유를 만끽해 보시라구요."

아시엘은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그를 지나쳐 멀뚱멀뚱 서있는 호위병들 쪽으로 다가갔다. 긴 제복 코트 자락이 그 뒤를 따라 나풀나풀 흔들렸다. 그 모습에 화내던 것도 잊고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유트리안은 곧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건 그렇지만! 솔직히 없어도 전혀 상관 없는 놈들이거든? 그래도 위험하잖아. 호위병들도 수가 확 줄어들어버렸고.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넌!"

"괜찮아요. 전하의 거처를 지키는 병사들의 수는 하나도 줄지 않았으니까요. 바깥에 있을 때는 제가 곁에 있을 거고요."

아시엘의 자신만만한 말에 유트리안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네가 지키겠다고?"

"기사가 황자님을 지키겠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아시엘은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가 현장에서 어떤 전적을 세우고 다니는지 대충이나마 들어 알고 있는 호위병들도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나이에 대전회의에 참석해 보여줬던 대담한 모습은 이미 궁 안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었지만 정작 본인의 무력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셀레니스 기사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이야 신빙성이 떨어져서 대체로 무시당하는 분위기였고- 그들에 대한 신뢰도는 도대체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생각해볼 문제였다- 싸움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고 지나치게 튀는 외모 덕분에 마검사라는 사실은 자잘한 옵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라고 모두가 5서클의 대마법사가 아니고 검사라고 모두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잖아. 그건 마검사라고 해도 마찬가지 아냐?"

"음- 글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조금 충격인데."

유트리안이 자신이 아까부터 생각하던 말을 쏟아내자 아시엘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다. 유트리안은 저 방글방글 웃는 놈을 한대 치고 싶어졌다.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던 그는 결국 바락 소리를 질렀다.

"말 시킨 내가 바보지!"

"그 말 아까도 하셨어요. 학습능력이 조금 부족한거 아니에요?"

아시엘은 얄밉게 혀를 쏙 빼물었다. 평소에 유트리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호위병들은 묘하게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수습했다. 다행히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유트리안은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알게 뭐야! 일개 기사 주제에 일일히 토 달지 마! 그런거 신경 쓸 시간에 밥 더 먹고 키나 키워, 이 꼬맹아."

"꼬맹.."

빠직, 욱한 아시엘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하지만 쉽게 도발에 넘어갈 생각은 없는듯 그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제 키 걱정보다 전하의 정신연령부터 어떻게 하는게 좋을것 같은데요. 어쩔수 없는 문제를 걸고 넘어지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네요."

"아하, 어쩔수 없는 문제라고? 하긴 너같은 평민은 유전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지. 참 미안하게 됐다. 그렇다면 그 짧은 다리라도 너네 모친과 부친이 물려준 선물이겠군."

순간,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굳혔다. 저 깊은곳에 봉인된 채 숨죽이고 있던 생채기에 뾰족한 바늘이 다가가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알싸하게 찾아들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건너건너 주워들은 호위병들 역시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뒤늦게 이상한 기류를 읽어낸 유트리안은 더 거칠게 내뱉았다.

"뭐야. 왜 이래?"

".....하아."

잠시 침묵하던 아시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트리안은 모난 표정에 약간의 의아함을 숨기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시엘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 속에 녹아있는 것은 약간의 원망과, 오랫동안 묵은 상처. 그리고 복잡한 서글픔이았다. 애써 태연한척 하려 했지만 유트리안은 의도치 않게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이 뒤엔 따로 일정 없으시죠? 평소에도 수업 받는것 외에는 궁에서 잘 나오지 않으신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엉뚱한 말이었다. 아시엘은 굳었던 얼굴을 풀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 차마 거스를 수가 없는 기류가 흘러 유트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궁으로 돌아가죠. 말싸움도 질렸으니까.. 전하를 모셔다 드리고 전 생활관으로 복귀할게요."

"벌써? 해지기 전까지 붙어있는다면서."

그는 당황해 재우쳐 물었지만, 아시엘은 이미 먼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가 일찍 돌아가면 전하는 좋으실거 아니에요? 내일부터는 안 봐줄 거니까 각오해 두세요."

"뭐? 야, 알아듣게 말해!"

등을 돌리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유트리안은 서둘러 뒤를 따라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끝으로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말다툼도, 빈정거림도 없었다. 아시엘은 그저 걷기만 했고 유트리안은 그의 등 뒤를 따라가며 눈치를 살피느라 입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다.

침묵은 황자궁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유트리안의 거처 안에 들어서자 아시엘은 그제야 몸을 빙글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들어가세요.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시엘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 웃음 속에 차마 거스를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져, 유트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럼 가볼게요."

아시엘은 꾸벅 목례를 하고 그대로 그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유트리안은 망연한 얼굴로 그런 그를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조용히 물러나 있던 호위병들중 하나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유트리안 황자 전하. 잠시 한 말씀 올리도록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말해."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병사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 루이스 경께 거두어져 자랐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당연하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해?"

황자의 답에 그는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은듯 한숨처럼 말을 끝맺었다.

"그렇다면 그가 고아라는 사실도 알고 있으셨겠군요."

"물론.... 아!"

유트리안은 그제야 자신을 실수를 깨닫고 홱 고개를 돌려 아시엘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한동안 복잡한 얼굴로 아무도 없는 길을 응시했다.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다시 담을수 없었다. 유트리안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작게 신음같은 소리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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